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87화 (287/316)

287화

‘생각보다 할 만한데?’

수혁은 도구 이용 프로그램 덕분에 스마트폰 분해를 물 흐르듯이 하고 있었다.

‘기계 분석 프로그램이 어떤 식으로 작동될까?’

핸드폰 분해를 완료한 수혁은 현명길 회장이 보내 준 리스트를 떠올리며 스마트폰 내부를 살펴봤다. 그러자 리스트에 적혀 있던 부품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진짜 신기하다. 이런 게 가능한가?’

수혁은 어플이 주는 프로그램의 효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지만, 처음 사용할 때만큼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에 띈 부품 중 하나인 GPS 모듈을 떼어 낸 후, 설계도를 그리려 시도했다.

‘회로도 자체는 별 의미가 없어. 부품을 생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체적인 공정 과정을 기록해야 해.’

수혁은 설계도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부품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와 비율 공정 방법까지 상세히 적어 나갔다. 부품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생산에 필요한 수많은 지식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이해가 되지 않아도 베끼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확실히 알면서 적으니까 스트레스도 덜하고 쓰면서도 안심이 되네.’

지난 1주일 동안 지능 스탯을 올리면서 경영학 도서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수혁은 목록에 적혀 있는 부품에 관한 논문과 과학 도서들을 사들여 공정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의 성질에서부터 공정에 적합한 온도와 습도 등 다양한 배경 지식을 쌓아 훗날, SH전자 개발팀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작업하고 있었다.

“수혁아, 여태 안 잤던 거야?”

새벽 3시가 다 된 시각, 잠깐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왔던 찬식은 수혁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할 게 많아서 쉬질 못하겠네.”

“이것들 다 네가 적은 거야?”

찬식은 종이들에 그려진 설계도와 빽빽하게 적힌 제작 방법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응, 내달 중으로 새로운 법인을 설립할 건데, 시기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려면 무리를 해야 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막상 해 보니까 10월 초경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네.”

“와, 대박이다. 이런 것들은 언제 배웠던 거야? 난 뭐가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훗, 그냥 틈틈이 공부했던 걸 끄적거린 거지 뭐. 이런 벌써 새벽 3시잖아? 나도 이제 자야겠다.”

수혁은 작업에 열중하느라 시간을 잊고 있었다.

“그래. 내일 또 학교 가야 하니까, 어서 자. 불 꺼 줄까?”

“응, 부탁할게.”

찬식은 수혁이 침대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불을 껐다.

2003년 10월 1일 수요일, 수혁은 대학 바로 옆에 있는 허드슨강에서 유람선을 타는 중이었다. 이날은 특이하게도 수업이 배 위에서 진행되어 야유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원래라면 수업을 마칠 시간인데,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긴 머리에 세련된 오피스 룩을 입은 여자 교수가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셀레나였는데, 주로 가르치는 내용으로는 비즈니스 매너와 상류 계층 사이에서 향유하는 문화를 가르쳤다. 보통의 학교라면 이와 같은 것들은 정규 과정에 편입될 일이 없겠지만, 케이턴 MBA 학생들은 세계를 이끌어 갈 리더들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야 하는 교양 수업이었다.

“첫 수업 때는 유럽의 식사 예절을 배웠다면, 오늘은 동양의 식사 예절을 배울 겁니다. 물론 저번과 마찬가지로 수업과 부합되는 음식이 제공될 예정입니다. 제가 알기로 뉴욕에서 미슐랭 스타를 받은 중식당 주방장께서 직접 요리를 하신다고 하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수업은 20분 후에 시작할 예정이니, 각자 알아서 쉬시다가 다시 이 자리로 모이세요.”

셀레나는 수업 전 공지를 마친 후 선내로 들어갔고, 학생들은 갑판 위에서 뉴욕의 풍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다른 수업은 지루한데, 이 수업만큼은 딱 내 스타일이란 말이야.”

폴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제이슨에게 말을 걸었다.

“동양 음식을 먹는 게 뭐가 좋다고 난리야? 난 살면서 중식이랑 한식은 입에 대 본 적도 없다고.”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수업만 아니었으면 쓰레기통에 있을 법한 음식들을 억지로 먹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날 것 같아.”

제이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옆에 있던 찰리 빈센트가 맞장구를 쳤다.

‘이번 수업만큼은 저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왜 하필 중국 음식이 나온 거야?’

찰리는 인종 차별주의자였기에 타문화에 배타적인 것이 당연했던 것에 반해 제이슨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다들 마음을 좀 여는 게 어때? 그래도 일반 수업을 하는 것보단 훨씬 낫잖아? 저기 석양을 좀 보라고.”

폴은 들뜬 목소리로 저물어 가는 해를 가리켰다.

“그건 저 쥐새끼가 없어야 가능한 이야기야.”

“후, 저번 주 수업을 아직도 못 잊은 거야?”

“폴,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이슨은 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셀레나는 직전 수업에서 재즈와 서양 식사 예절을 가르쳤고, 즉석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점수를 매기고 있었고, 이를 눈치챈 제이슨은 재즈와 음식을 즐기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모든 과정에 정성스럽게 임했다.

‘촌구석 같은 곳에서 온 놈이 그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어렸을 때부터 상류 문화를 접한 제이슨은 셀레나가 가르치는 내용 중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셀레나 교수가 평가에 돌입하자 조용히 있던 수혁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재즈의 디테일한 역사와 복잡다단한 식사 및 주류 매너를 술술 풀어내며 큰 활약을 보여 최우수 평가자라는 타이틀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식사하시는 데 스트레스를 줄 것 같아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저는 여러분들이 수업 내용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쭉 지켜본 결과 수혁 군의 식사 매너와 재즈에 대한 조예가 다른 학생들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잘 활용했을 뿐입니다.”

수혁은 겸손한 반응을 보였지만, 실상은 제이슨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대화의 방식에서 변화를 감지한 수혁은 침묵을 지키던 이전과 달리 적극적인 어필에 나섰다.

‘뭐든 공부를 해 두면 이렇게 써먹을 일이 있다니까?’

지능 스탯 향상을 위해 교과 과정과 관련된 서적들을 독파한 수혁은 해박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기에 제이슨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한 번만 제대로 걸려 봐라. 다시는 나대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지난 수업을 떠올리던 제이슨은 현실로 돌아와 루나와 대화를 나누는 수혁을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이봐, 제이슨. 내가 미안하다니까?”

“크흠, 앞으로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생각에 빠져 있던 제이슨은 폴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오케이, 지금부터 강수혁 이야기는 안 할게. 그것보다 크루즈 선을 쭉 살펴봤는데, 보통 배가 아니야.”

“쳇,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이것 좀 보라고. 이제까지 많은 배를 타 봤지만, 이 정도 퀄리티를 가진 배는 드물다니까? MBA에 와서 실망한 적이 많았는데, 이 수업만큼은 딱 내 스타일인 것 같아.”

제이슨의 기분이 풀어진 것을 확인한 폴은 고급 자재로 지어진 갑판을 가리키며 말을 쏟아 냈다.

“수업을 위해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여러분들의 등록금으로 내고 있으니 마음껏 즐기셔도 됩니다. 자, 이제 수업을 시작할 거니까 다들 모여 주세요.”

“아, 네.”

셀레나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폴은 멋쩍어하며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지할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원래 6시에 예정되어 있던 식사가 40분가량 연기되었습니다. 쉐프님께서 준비한 향신료가 생각보다 질이 안 좋아서 메뉴를 수정하시기로 하셨답니다.”

“그럼, 30분 동안 여기서 또 기다려야 되는 거야?”

“아직 말씀이 안 끝나셨으니까 조금만 더 들어 보자.”

수혁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루나를 달랬다.

“식사까지 시간이 남아서 짧게나마 수업을 진행해 볼까 합니다. 급하게 편성된 수업인 만큼 평가는 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셀레나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클래식을 가르쳐 주기로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막간을 이용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볼까 하는데, 혹시 대략적으로라도 설명해 주실 분이 계실까요?”

“클래식은 단어 그대로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고전이라 하면 세월이 지나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후손들에 의해 발전되거나 재발견 될 수 있는 깊이를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에 유행했던 화성법을 알아야 하는데…….”

제이슨은 셀레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클래식에 관한 지식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작곡 방식의 변천과 유행하던 패턴을 언급하며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클래식을 공부하신 적이 있나요?”

“네, 부모님께서 클래식 음악을 워낙 좋아하셔서 관련 지식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부모님을 두셨군요. 클래식의 역사와 이론을 훌륭히 말씀해 주셨네요.”

셀레나 교수는 제이슨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네 독무대가 될 일이 없을 거다. 난 네놈과 달리 태생 자체가 다르다 이 말이야.’

칭찬에 고무된 제이슨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수혁을 바라봤다.

“네, 말씀하세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나올 수가 없는데, 무슨 배짱이지?’

수혁은 제이슨의 뜨거운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제이슨이 클래식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배경 지식을 상세히 설명해 줬기 때문에 저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클래식이라고 하면 엘레강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호기심에 CD를 사서 듣거나 연주회에 가기도 하지만, 음악에 공감하며 감명을 받은 청중들과 달리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맞습니다. 제이슨처럼 클래식을 오랫동안 접했거나 악기를 다뤘던 사람들은 음악의 깊이를 금방 느낄 수 있지만, 상당한 수의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계속해 보세요.”

‘저런 허접한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야? 이거 어째 샌더스 교수 때랑 비슷한 상황 같은데?’

셀레나 교수가 수혁의 발표에 관심을 드러내자 제이슨은 가슴 한켠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28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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