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84화 (284/316)

284화

‘못 한 말이라도 있나 보네?’

수혁은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종료하려다 말고 유신을 쳐다봤다.

“네, 말씀하세요.”

“어제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요?”

“네, 대통령님께서 대표님과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며 시간이 될 때 연락을 주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미래 비전 연구소와 당분간 메일로만 소통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수혁은 영문 모를 상황에 생각이 깊어졌다.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대통령님께 따로 전화를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쇼.”

박유신 사장의 말을 끝으로 화상 회의는 종료되었다.

‘지금이 밤 9시니까 지금 전화를 드려도 크게 무리가 없겠어.’

뉴욕과 서울의 시차는 14시간으로 한국 시각은 오전 11시이기에 전화하기에는 괜찮은 시간대였다. 수혁은 탁상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집어 든 다음 김정협 대통령의 개인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정무를 보시느라 전화를 받으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바로 받으시는군요.”

“오전에 있던 국무 회의를 막 마치고 돌아오던 참이라 전화를 받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따로 논의 드릴 게 있어서 회사에 직원을 보내 청와대로 모시려고 했는데, 미국에 가신 걸 깜빡했지 뭡니까?”

김정협 대통령은 수혁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통화를 하면서 개인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박유신 사장으로부터 방금 보고를 받아서 연락이 조금 늦었습니다. 앞으로는 곧바로 전화를 드릴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겠습니다.”

“하하, 아니에요. 고작 하루 기다렸을 뿐인데,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부 인사는 이만하면 충분히 했으니, 이젠 본론을 말씀드려야겠네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수혁은 일국의 대통령이 개인에게 함부로 전화를 거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다소 긴장이 되었다.

“최근에 농림 수산 식품부 장관님으로부터 면담 요청이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었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에서 농업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 농업 국가로 지냈던 만큼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야이지요.”

“20세기 들어 생산량이 급증해서 그렇지 식량 문제는 인류에게 있어 영원한 숙제였지 않습니까?”

수혁은 김정협 대통령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나라마다 고유의 종자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요. 아무리 같은 채소라 해도 기후와 풍토에 따라서 그 맛과 생김이 다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도 국내산 종자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한 회사가 거액을 주고 모두 사들였지요.”

“흠, 하시려는 말씀이 방금 언급하신 그 회사랑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이야기가 점점 핵심으로 다가갈수록 정협이 어떤 말을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혹시, MK이노베이션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네, 세계적인 부자 가문인 모리가의 장남 제이슨 모리가 10대 후반에 설립한 회사로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MK이노베이션은 첨단 제품을 생산할 때 필요한 각종 특허권과 쌀과 채소 종자들 그리고 공격적인 인수 합병으로 엄청난 매출을 자랑하는 기업이지요.”

“역시, 케이턴 대학 동문이라서 잘 알고 계시네요.”

“대통령님 입에서 제이슨이 나왔다는 건 그렇게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군요.”

수혁은 어떤 일이든 제이슨이 결부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후, 지금 그자가 종자 이용의 대가로 받는 수수료를 대폭 올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수수료가 어느 정도 상승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처음에 50%를 이야기하던 걸 간신히 40%로 낮춘 상태입니다.”

질문에 답하는 정협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대한 손실액은 얼마나 됩니까?”

“다행히도 로열티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1년을 기준으로 150억 원을 추가로 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농림부 소속 의원들과 예산 지원을 검토하고 있으니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보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수혁이 150억에 달하는 돈을 선뜻 내주겠다고 말하자 대통령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볼 땐 제이슨과 저의 관계로 말미암아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 같아서 드리는 겁니다.”

“누구에 들은 이야기라도 있으신 겁니까?”

정협은 수혁이 국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한 것으로 착각했다.

“2월에 있던 국제 제품 박람회 때 처음 봤는데, 그때부터 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더군요. 사실, 오늘도 제이슨과 한바탕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뭐든 물어보세요.”

“만약 피해를 주고 싶으면 제 회사를 건들면 될 텐데, 굳이 대통령님의 심기까지 어지럽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수혁은 쓸데없이 일을 키우는 제이슨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흠, 대표님께서 스트레스를 받으실까 봐 이야기하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만약 말씀하기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이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 주시겠다는 분에게 숨길 게 뭐 있겠습니까? 1주일 전이었나? MK이노베이션 관계자가 종자 수입을 주관하는 회사에 연락을 넣은 적이 있습니다.”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연락을 취한 거겠지요.”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짐작이 간다는 투로 말했다.

“처음에는 정부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연결을 시켜 달라 했답니다. 해당 회사는 국내 농업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업무를 처리하고 있기에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지요. 대표는 고심 끝에 농촌 진흥청장의 연락처를 줬고, 얼마 있지 않아 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 청장님이 장관님께 보고를 올렸고, 결국 대통령님도 사안에 대해 알게 되셨겠네요.”

“맞습니다. 청장에겐 자세한 사안을 이야기하지 않고, 수수료 논의를 위해 장관급 이상의 인사와 협상을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용의 요지를 보니, 미래 비전 연구소 고문직을 박탈하면 수수료를 소폭 할인하겠지만, 응하지 않을 시에는 인상하겠다며 협박을 하더군요.”

아무리 거대 기업이라고 하지만, 일개 기업이 정부를 상대로 딜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김정협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혹시, 녹취록을 따로 뜨셨습니까?”

“네. 비록 비공식적인 대화였긴 하지만, 녹음 파일과 녹취록을 모두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다.”

“증거들이 확보되었으니, WTO에 제소하거나 법원에 고소하심이 옳다고 사료 됩니다. 저들이 가격 책정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부를 흔들려는 목적이 있다면 우리에게 명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WTO는 국제 무역 기구의 약자로 국가 간 불공정 무역이 적발될 시 이를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WTO에 제소하는 경우는 통상적으로 국가가 해외 기업에 부당 행위를 했을 때 이루어지지, 반대의 경우는 케이스 자체가 매우 드물다고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MK이노베이션 뒤에 미국 정부가 있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종자에 대해서 독점적 지위 남용을 근거로 국내 법원에 제소할 수는 있지만, 저들로서는 벌금만 내고 철수하면 그만이라 난감한 상황입니다.”

“독점적 지위의 남용은 국제 사회에서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사안입니다. 되든 안 되든 WTO에 해당 사안을 고발하고, 타국 지도자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마저도 MK이노베이션의 뒤를 봐주는 정치인들과 후원자들 때문에 녹록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WTO의 수장도 미국의 지원 아래 선출된 사람인 걸 고려하면, 문제를 제기했다가 오히려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정협은 수혁의 제안이 합리적이긴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토로했다.

“흠, 대통령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현재로서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따로 대책을 마련해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연구소 고문직을 역임하는 게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쇼. 바로 사직서를 제출할 용의가 있으니까요.”

“국무 위원들로부터 권고사직 이야기가 수차례 나왔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MK그룹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국정 운영에 간섭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대통령은 뚜렷한 방도가 없어 가만히 있는 거지, 제이슨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 때문에 괜히 곤욕을 치르시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조속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 든든합니다. 만약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면 말씀만 하세요. 저놈들의 콧대만 누를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니까요.”

수혁이 문제 극복의 의지를 보이자 정협은 그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의에 맞서시는 건데,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지요. 아, 맞다. 대표님, 최근에 현명길 회장님과 연락하신 적이 있습니까?”

“유학 준비를 하느라 근 2달 동안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설마, WG에도 문제가 생긴 건가?’

“음, 시간이 되시면 회장님께 한번 전화를 드려 보세요. 이틀 전에 연구소 일로 잠깐 뵌 적이 있는데, 고심이 깊어 보였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수혁은 제이슨이 WG에도 술수를 부렸음을 직감했다.

“저는 다음 일정 때문에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추가로 논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으면 문자로 보내 주세요. 업무가 끝나면 틈틈이 확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건강 유의하시고 국정 운영이 원활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마무리 인사를 나눈 수혁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제이슨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군. 우선 회사와 지인들을 중심으로 MK에서 수작을 부렸는지 알아봐야겠어.’

수혁은 현명길 회장뿐만 아니라 MK그룹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회사들을 모두 점검하기로 했다.

“박유신 사장님, 접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SH계열사의 주식 시장에서의 추이를 알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차트를 보긴 했는데, 매수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서요.”

수혁은 조금 전의 통화와 달리 핵심이 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빠르게 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음은 최필재 사장님께 전화해 봐야겠다.’

유신과 통화를 마친 수혁은 곧바로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 28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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