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폴, 입 좀 다물어 줄래? 사람들 수업 준비하는 거 안 보여?”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루나는 화가 난 얼굴로 제이슨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것도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너희가 한국인 운운하며 함부로 말하니까 그렇지.”
제이슨이 조롱 섞인 말투로 대꾸하자 루나는 씩씩거리며 맞받아쳤다.
“루나 난 괜찮으니까, 말 섞지 말자. 입학 날부터 큰 소리 내기 싫거든.”
“훗, 당연하지. 잘한 것도 없으니까 할 말도 없겠지.”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개 짖는 소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뿐이니까 착각하지 마라. 그리고 너랑 말해 봤자 주변 사람에게 민폐니까, 네 볼일이나 봐.”
수혁은 제이슨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당신,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중간에 앉은 백인 남성 하나가 수혁의 언행을 지적했다. 그는 세계적인 총기 회사인 빈센트사의 장남으로 이름은 찰리 빈센트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수혁은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찰리를 보며 말했다.
“찰리 빈센트? 우리랑 친분도 없는데, 굳이 왜 저러는 거지?”
“후후,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폴과 달리 제이슨은 뭔가를 아는 눈치였다.
“무슨 소문?”
“저 친구가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풋, 동양인 주제에 나대니까 못 참겠다는 건가?”
제이슨과 폴은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참견하는 게 아니라, 들어 보지도 못한 작은 나라에서 왔으면 나대지 말라는 이야기야.”
“넌 누구길래, 나한테 나대지 말라는 거지?”
찰리의 말에 수혁은 어이없어하며 반문했다.
“미국 최대의 총기 회사인 빈센트사라고 아는지 몰라?”
“그런데?”
제이슨은 찰리를 지원하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화가 안 통하겠군. 찰리, 촌놈이랑 이야기 그만하고 여기로 와서 우리랑 놀자고.”
“하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우리 회사를 알 턱이 없지.”
옆에 있던 폴이 같이 어울릴 것을 제안하자 찰리는 코웃음을 치며 저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동양의 작은 나라에 박람회에서도 깨지고 그랬나? 하여간 저런 놈들은 입만 살았다니까?”
“이 자식이?”
“잠깐만 나한테 맡겨 줘.”
수혁의 도발에 화가 난 제이슨은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려 했지만, 찰리는 손을 뻗으며 제지했다.
“이봐, 방금 뭐라고 했어?”
193cm에 달하는 키와 100kg에 육박하는 찰리는 수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으름장을 놓았다.
“수혁,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넘어가자.”
“뭘 어쩌려는 거지?”
수혁은 만류하는 루나를 외면하고 찰리와 마주 섰다.
“불만이 있다면 밖에서 해결을 하는 게 어때?”
찰리는 거대한 손으로 수혁의 어깨를 짓누르며 위협했다.
“네가 먼저 위해를 가한 거로 봐도 되겠지?”
“뭐? 윽, 으악!”
수혁은 어깨 위에 놓인 손을 잡더니 부서질 듯이 움켜쥐었다. 그러자 육중한 체구를 자랑하는 찰리는 제자리에서 비명을 질러 댔다.
“동기들 있으니까 소란 피우지 말고 그냥 가라.”
“헉, 헉…….”
말도 안 되는 악력에 넋을 잃은 찰리는 멍하니 있다가 제이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뭐 하는 거야?”
“곱상하게 생겨서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힘이 말도 안 되더라고.”
찰리는 손에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 수혁은 힘이 57에 육박했기 때문에 평균 남성의 4배에 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수혁아, 괜찮아?”
“그냥 가볍게 쥐었을 뿐인데, 엄살이 꽤 심하네?”
수혁은 토끼 눈이 된 루나를 보며 말했다.
“휴, 저렇게 막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저런 놈들은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야. 그만 수업 준비나 하자.”
“알겠어, 수혁아.”
* * *
루나와 수혁은 가방에서 프린트를 꺼냈다. MBA 교수들은 따로 전공 서적을 정하기보단 그날그날 자신이 만든 학습 자료를 사이트에 올려 자유롭게 다운받을 수 있게 했다.
‘벌써 마지막 수업이네.’
수업은 과목당 1시간 20분이 소요됐고, 하루에 3과목만 배정되어 있어서 체력적으로 크게 무리가 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미래학을 가르칠 제이미 샌더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샌더스 교수는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인 미래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쓴 덕에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
“제이미 샌더스면 그 사람이 맞는 거지?”
“세계적인 석학인데, 이름이 샌더스면 한 사람밖에 없잖아.”
이전 교수들도 만만치 않은 네임벨류를 갖고 있었지만, 제이미 샌더스만 한 인지도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손을 들고 하세요.”
학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자 샌더스 교수는 조용히 일갈했다.
“보아하니, 없는 모양이네요.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미래학이란 과목을 정식 과목으로 채택한 학교는 케이턴 대학뿐입니다. 사실 정통 경영학을 생각하는 분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경영을 하는 사람이라면 트렌드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익혀야 할 능력을 넘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교양일 것입니다. 그리고…….”
샌더스 교수는 본인이 만든 미래학의 중요성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지금까지 회사 경영에 미래학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 잠시 여러분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간단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오늘 수업은 제가 주는 질문을 토대로 토론이 이루어질 겁니다. 답변 내용과 토론 태도가 평가에 반영되니 신중하게 생각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제는 흠, 뭐가 좋을까요?”
샌더스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2003년, 이후에 펼쳐질 미래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해 보세요. 평가 기준은 애석하지만, 저의 주관이 될 겁니다. 애당초 정답이랄 게 없는 질문이니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발표 전에는 평가를 위해 본인의 성함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은 손을 들었고 샌더스는 중간에 앉은 여학생 한 명을 지목했다.
“안녕하세요, 미도스지 나츠하라고 합니다. 편하게 나츠하라고 불러 주세요.”
‘미도스지면 일본 최고의 전자 회사인 ROMY 집안의 딸인가 보네?’
나츠하의 성을 들은 수혁은 그녀가 어느 기업과 연관이 있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일본은 고령화 현상이 발생한 지 오래됐지만, 부모를 모시겠다고 자처하는 자식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수님이 쓰신 도래하는 미래를 살펴보면, 선진국일수록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일본의 경우가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요?”
샌더스 교수는 나츠하의 의견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 네. 1인 가구의 증가를 촉진시키는 요소로는 노인층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려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여가와 관련된 게임 산업이나 영화, 드라마와 같은 문화 콘텐츠 사업이 갈수록 호황을 맞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게임 산업은 어느 정도 인정하겠지만, 문화 콘텐츠 사업의 경우 1인 가구의 증가 외에도 소득 상승과 여가 시간의 증가와 같은 요소들도 있어서 완벽한 답변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뒤에 앉은, 네. 발표해 주세요.”
나츠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샌더스는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제이슨 모리입니다. 미래 일어날 현상으로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으로 1인 미디어의 출현과 친환경 에너지 산업의 발전을 들 수 있습니다. 현재, 선진국을 중심으로 석유, 석탄 에너지에서 나오는 온실가스에 대해 환경세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도 국가의 정책에 따를 수 없는 엄중한 현실을 고려하면 친환경 에너지 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이슨은 MK코퍼레이션의 현황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에 물 흐르듯이 말을 쏟아 낼 수 있었다.
“국가 정책이 아니더라도 이상 기후 현상과 심각한 환경 오염으로 인해 인류는 석유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보다 1인 미디어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쳇, 뭐가 이렇게 까칠해? 점수를 좋게 줄 것도 아니면서 뭐 하러 물어보는 거야?’
샌더스 교수의 냉정한 반응에 제이슨은 기분이 상했지만, 표정을 관리하고 답변을 이어 갔다.
“1인 미디어 사회의 도래는 인간의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표현 욕구와 인정 욕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크흠, 네.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 생존과 연관된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그리고 애정, 소속의 욕구가 채워지면 상위 단계의 욕구가 발현되기 시작합니다.”
제이슨은 샌더스의 첨언에 순간 당황했지만, 자연스럽게 설명을 재개했다.
“4단계인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정 그리고 표현 욕구와 큰 관계성을 가집니다. 교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소득이 증대하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상위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의 수는 늘어날 텐데, 욕구 실현을 가장 원활히 해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수단이 1인 미디어라고 봅니다.”
“이미 몇몇 국가에서는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 서비스가 개시됐으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다음은 저기 장발의 남성분 발표해 주세요.”
‘원하는 답변이 도대체 뭐야? 일본인 여자도 그렇고 틀린 대답을 한 사람은 없는데, 왜 저러는 거지?’
‘어차피 학위랑 인맥만 쌓으면 돼서 좋은 점수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누가 샌더스 교수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네?’
학생들은 제이슨의 답변에도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이는 샌더스를 보며 발표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채점 기준을 명확히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래에 펼쳐질 현상들에 대해 논하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두고 학생들이 고민하고 있지만, 무엇을 근거로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이슨은 채점이 교수 재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괜한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채점 기준이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주관이라고요.”
“교수님의 주관은 존중하지만, 그렇게 되면 학생들이 답변을 내놓기가 곤란하지 않습니까?”
‘쯧쯧, 자존심이 강한 게 아니라 그냥 미련한 거였나?’
수혁은 샌더스 교수에게 항변하는 제이슨을 보며 혀를 찼다. 서양이 아무리 토론 문화가 발달하고 수직적인 관계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해도 교수 재량을 침해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위였기 때문이다.
“본인 입으로 추상적인 주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당초 답이 없는 사안이니 완벽한 답변에 집착하지 마세요. 토론 형식이기에 질문이나 반론은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월권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샌더스는 제이슨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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