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MBA는 통상적으로 2년 과정인데, 케이턴 대학은 1년만 진행하니까 너에게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아, 그리고 뉴욕에 내가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원한다면 소개를 시켜 주마.”
길명준 교수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케이턴 대학에 가는 것은 고민을 조금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총장님과 교수님한테는 죄송하지만, 선뜻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수혁은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딱히 기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흠. 선택은 너의 자유긴 하지만,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보성이가 갔어야 할 곳을 제가 대신 간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요. 그리고 현명길 회장님께서 아들보다 손자인 보성이를 후계자로 점찍은 걸 보면 케이턴 대학에 가서도 동문에 먹칠할 일은 없을 것 같고요.”
“현명길 회장님의 안목이면 보성이라는 친구가 뛰어난 인재라는 건 분명하겠지. 게다가 WG와 SH의 관계를 생각하면 네 입장에서 큰 부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명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심정을 헤아려 줬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는 무슨, 사람이라면 응당 들 수 있는 마음인데.”
“총장님과 교수님께서 힘써 주셨는데, 이런 답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교수님. 안 그래도 졸업 관련해서 질문드릴 게 있었는데요.”
수혁은 자신을 지지해 준 지인들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유가 그게 전부라면 케이턴 대학에는 네가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네?”
상황이 정리됐다고 판단하여 대화 화제를 바꾸려던 수혁은 명준의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총장님과 내가 널 지지했다지만, 교직원들의 반대 속에서 널 뽑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어. 나와 총장님이 제아무리 잔뼈가 굵다지만, 처장들과 다른 학장들을 모두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거든.”
“그럼, 보성이에서 저로 바뀐 이유가 정확히 뭡니까?”
수혁은 명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 이 이야기는 발설하면 안 되는데, 네 고집이 워낙 강하니 어쩔 수 없구나. 현보성 학생은 본인과 널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는 것을 대연 선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설마…….”
“짐작했겠지만, 현보성 학생이 네가 케이턴 대학에 가는 게 맞다며 기회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내가 듣기로 총장님께서 마음에 걸려 현명길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네가 가는 것을 흔쾌히 찬성했다는구나.”
“…….”
명준의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절친한 지인들이 자신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제가 따로 보성이한테 연락해서 결정을 철회하라고 설득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이 갈무리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건 몰라도 상대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오히려 예의가 아니야. 그리고 보성이 그 친구보단 SH그룹을 창립하고 학교 성적도 더 우수한 자네가 가는 게 순리에도 맞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단지 보성이 때문은 아닙니다.”
“케이턴 대학에 다니면 회사 경영에 차질이 생길까 그런 거냐?”
“……네 맞습니다.”
수혁은 자신이 할 말을 길명준 교수가 먼저 꺼내자 어떻게 대꾸할지 난감해졌다.
“케이턴에 가면 직원들을 대동해서 원격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야.”
“SH는 신생회사인 데다 지금은 무척 중요한 시기라 자리를 비우는 건 조금 어려울 듯 보입니다. 대학원에 갈 의향은 있지만, 가더라도 국내 대학을 가려고 했지 외국 쪽은 진즉에 포기한 상황이라서요.”
“그럴 줄 알고, 이렇게 따로 보자고 한 거야. 원래는 현명길 회장님과 이야기가 끝난 후 바로 선발생으로 위촉하여 대학원 심사에 넣으려고 했지만, 내가 네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며 총장님을 말렸다.”
명준은 수혁이 오너로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를 하는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 부분은 회사와 네 직원이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에 내 더 이상 참견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 회사가 더 멀리 나아가려면 케이턴 대학교는 무조건 가는 게 옳아.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려 줬으면 좋겠다.”
‘간섭 안 하시겠다면서, 사실상 가기를 종용하고 계시잖아? 후, 어떻게 하지? 장기적으로 보면 무조건 가는 게 많지만, 관리해야 할 사업이 한두 개가 아닌데…….’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고민에 빠져 있던 수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말이냐? 다음 주가 마감 기간이라 빨리 답변을 해 줬으면 하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알겠다. 난 학장실에서 기다릴 테니,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거기로 와.”
“시간이 지체되지 않게 최대한 빨리 결정하겠습니다.”
“밤늦게까지 있을 예정이니까, 천천히 결정해도 돼.”
“네, 교수님.”
할 말을 마친 명준은 학장실로 떠났고, 수혁은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앱을 관리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면 지금보다 회사를 2배 이상 키울 수 있어. 미국 시장과 유럽 시장을 염두에 두면 케이턴 대학에 가는 게 맞지만, 그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수혁은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신중하게 선택을 내리려고 했다.
‘하. 북미와 유럽 시장을 개척하려면 가서 현지 사정도 좀 익히고, 인맥을 넓힐 필요가 있어. 아니야, 굳이 꼭 인맥이 필요하나? 일송도 북미와 유럽에서 성공한 걸 보면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1시간이 지났지만, 수혁은 갈지 안 갈지를 두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 갑자기 어플이 왜……?’
머리를 감싸 쥐고 갈등하던 그때, 어플이 활성화되어 화면이 켜졌다.
<사용자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 있어 자동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수혁의 생각을 읽은 어플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게 있어?’
<네, 사용자는 일전에 운 스탯을 향상시킨 덕분에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기능을 획득한 바가 있습니다.>
“아, 맞다!”
도움말의 설명을 읽은 수혁은 혼잣말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실행해 줘.’
<케이턴 대학 MBA 과정에 진학하는 게 사업상 좋을지 안 좋을지로 선택지를 구성하겠습니다.>
‘응, 알겠어. 빨리빨리.’
일전에 선택 기능을 활용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본 수혁은 도움말을 다그쳤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어 선택 기능이 실행되었음을 알렸고, 곧이어 작업 진척도가 표시 되었다.
<완료까지 30% 남았습니다. 29%, 28%…….>
‘후.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겠지만, 웬만해서는 안 갔으면 좋겠다.’
수혁은 외국에 가지 않아도 회사를 키울 방안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에 기왕이면 한국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작업은 끝이 났고 화면에는 결과가 떴다.
‘좋아. 이제 교수님한테 말씀만 드리면 되겠어.’
선택을 대신 내려 준 어플은 자동으로 종료됐고, 수혁은 길명준 교수를 보기 위해 학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오래 고민했구먼.”
업무를 보고 있던 명준은 학장실로 들어오는 수혁을 발견하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퇴근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 그럼, 어떤 선택을 했는지 궁금한데. 이야기를 들어 볼까?”
길명준 교수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수혁이 앉아 있는 소파로 향했다.
“케이턴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래. 미래를 생각하면 미국을 가는 게 여러모로 나쁘지 않아.”
“총장님과 교수님께서 절 위해 애써 주셨는데, 외면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주 찾아오지 않은 제자임에도 힘 써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총장님의 심정이야 알 도리가 없지만, 난 자네가 정말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추천했던 거야.”
수혁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자 명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것보다 보성 군한테 끝까지 양보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네?”
“훗, 교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하하, 조크야 조크. 잠시만 기다려 봐.”
명준은 기분이 좋은지 호쾌하게 웃으며 다시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서랍을 연 뒤 서류를 한 장 꺼낸 후, 소파에 앉았다.
“후회하지 않는 거지?”
“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라 번복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여기다 사인하시게.”
“알겠습니다.”
수혁은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낸 다음 학생 추천 동의서에 사인했다.
“인적 사항은 학교에 올라간 정보를 참고해서 미리 기입을 해 뒀다.”
“절 보내려고 이미 작정하셨었네요?”
“케이턴 대학은 다른 전공은 몰라도 경영학만큼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라고 여겨지는 곳이야. 그런데 이 기회를 경영대 학생이 아니라 타과 학생이 가져가는 건 용납이 안 되더군. 휴, 자네가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동료 교수들한테 면목이 없을 뻔했어.”
길명준 교수는 수혁이 사인을 마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케이턴 MBA 과정은 경영학도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모두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었다.
“하긴, 다른 분야도 아니고 경영 대학원 진학을 다른 과에 빼앗기는 건 아쉽긴 합니다.”
“말도 마라. 현보성 학생에서 너로 바꾸려고, 날 포함한 경영대 교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지 모른다.”
지난 3년 동안 다른 과에 밀리는 바람에 경영학과 교수들은 예민해진 상태였다.
“가만히 보니까 절 위해서가 아니라 과를 위해서 절 설득하신 것 같은데요?”
수혁은 명준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크흠. 서로가 좋으면 됐지, 뭘 그런 걸 따지나? 저녁 시간도 다 돼 가는데,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하지.”
“네, 교수님. 아, 괜찮으시면 제 차로 이동하시죠. 근방에 자주 가는 곳이 있거든요.”
“대기업 대표는 어디서 술을 마시나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어. 자, 가지.”
“하하, 알겠습니다.”
길명준 교수는 퇴근까지 30분이 남았지만 개의치 않았고, 수혁은 그의 농담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날 밤, 수혁은 지도 교수를 모시고 강남의 고급 술집에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 * *
시간은 흘러 7월이 되었다. 한국대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마친 수혁은 판교 본사에서 그룹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표님, 임원들이 모두 도착한 것 같습니다.”
박찬명 사장은 수혁에게 다가가 귀띔했다.
“그래요? 그럼 시작하시죠.”
“2003년 상반기 결산 그룹 회의가 곧 개시될 예정이니 임원 여러분들은 모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시를 받은 찬명이 회의 개시를 알리자 부산스럽던 회의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2003년이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한 임직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회의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수혁의 모두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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