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한국대학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들이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문 대학의 경우 1911년에 지어진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지요.”
“저도 안내판을 통해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률 총장의 말을 경청했다.
“유구한 역사가 깃든 건물들은 고풍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보수를 정기적으로 자주 해 줘야 합니다.”
“한 번 보수를 할 때 확실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겉에 벽돌을 덧대기는 했지만, 처음 지을 때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손상이 금방 가는 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재를 바꾸고 싶지만, 문화재청에서 매년 점검을 해서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고요.”
이경률 총장은 학교를 운영하며 발생하는 애로 사항을 털어놨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면도 적지 않게 영향을 줄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오가면 건물이 더 빨리 낡을 테니까요. 하지만 교수실과 강의동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차라리 종합 강의동을 크게 짓는 게 어떻습니까? 한국대는 부지가 넓어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은 관리인을 두어 기념관이나 박물관처럼 운영을 하는 거죠.”
“안 그래도 임직원들과 진지하게 논의를 해 봤는데, 국가에서 제공하는 예산만으로는 종합 강의동을 짓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최근에 연구 설비를 모두 교체하는 바람에 목돈을 사용했거든요.”
‘총장님께서 날 부르신 목적을 알겠다.’
수혁은 경률이 지원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말씀을 들어 보니 도움이 필요한 듯 보이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대표님께서 해주실 수 있는 일이야 정말 많지요. 모교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손을 벌려야 하는 입장이라 조심스러웠던 이경률 총장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차피 학교에 기부할 거 통 크게 하자.’
수혁은 학교를 지원해 주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상태였다.
“동문이라면 학교 일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 외에도 몇몇 분들이 사비를 출연해 주시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종합 강의동을 짓게 되면 많은 학생에게 혜택이 돌아가니 보람 있는 일이 될 겁니다.”
“강의 건물을 짓는 것 외에 돈 들어가는 곳이 또 있나요?”
“흠, 우리 학교가 국립대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적지 않아 장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긴 합니다만…….”
수혁이 당장 급한 강의동 사업보다 다른 쪽에 관심이 있다고 느낀 이경률 총장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장학 프로그램을 지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직 논의 단계라 세부적인 계획을 짜지 못한 상황입니다. 직원들과 세부 논의를 모두 마치면 대표님께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아무리 부자라도 선뜻 거액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이번 기회에 그동안 미뤄 놨던 장학 프로그램이라도 시작해 보자.’
이경률 총장은 본인의 의도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매우 아쉬웠지만, 장학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아, 이런. 잠시 전화를 좀 받고 와도 되겠습니까?”
“바로 옆에 방이 있으니 편하게 받으시죠.”
“네, 잠깐만 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수혁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경률이 가리킨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플이 다 좋긴 한데,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게 단점이란 말이야.’
그는 눈앞에 켜진 퀘스트 창을 확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였다.
<히든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내용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이전에 박람회 퀘스트가 완료가 안 된 거로 아는데, 또 히든 퀘스트라고?’
마지막으로 수행했던 퀘스트는 박람회 발표를 잘 마무리하고, 아담 힐즈와 친분을 맺는 것이었다. 수혁은 프레젠테이션은 성공리에 마쳤지만, 아담과 연락처만 주고받았을 뿐.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했었다.
<박람회 퀘스트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성공했기 때문에 스탯 보상이 주어진 바 있습니다.>
질문을 받은 어플은 도움말 기능을 실행시켰다.
‘언제?’
<박람회가 끝난 시점에 사용자의 매력이 1 향상 되었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해 줘야지.’
<퀘스트가 완료된 것은 아니어서 어플이 작동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참네. 가만히 보면 허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니까?’
수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창을 쳐다봤다.
‘퀘스트 내용 확인할게.’
<알겠습니다.>
수혁의 생각을 읽은 어플은 도움말 창을 끄고, 퀘스트 창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한국대의 숨은 인재들을 찾아 회사 직원으로 채용하시길 바랍니다.>
‘일단 수락할게. 근데 조금 황당하네? 나야 퀘스트도 깨고, 직원도 고용해서 좋지만. 이 미션을 나에게 준 이유가 뭐지?’
<이경률 총장과의 대화를 통해 사업에 도움이 되는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흠, 아까 무슨 대화를 나눴더라?’
어플은 이제껏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던진 적이 없었기에 대화를 복기하며 단서를 찾으려 노력했다.
‘설마, 장학 사업을 통해 사람들과 접촉하라는 건가? 인재들을 찾는 거야 가능하겠지만, 채용으로 이어지려면 단순한 장학 프로그램으론 안 될 것 같은데?’
어플의 의도를 캐치 한 수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 이 정도 조건이면 총장님도 받아들이실 거야.’
생각을 정리한 수혁은 다시 총장실로 돌아갔다.
“금방 끝나셨네요?”
“네. 그냥 간단한 안부 전화여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바로 끊었습니다.”
“그냥 편하게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대표님과 대화하기 위해 오후 일정을 비워 둔 참이라 여유가 있었거든요.”
“아닙니다. 총장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하하, 가 계시는 동안 차를 만들어 놨습니다. 향이 좋으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률은 수혁의 말이 듣기 좋았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총장님, 종합 강의동 건설 명목으로 기부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돌아가시는 길에 학교 계좌번호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건물을 짓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적어도 200억 이상은 들지 않겠습니까?”
한국대는 적어도 7층 이상의 규모로 건물을 세울 계획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고층 빌딩을 지으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했지만, 부지를 따로 매입하지 않아도 돼서 예상보다는 적은 금액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2주일만 시간을 주시면 200억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 큰 금액을 대표님 혼자 충당하시겠다고요?”
수혁의 답변을 들은 경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대 동문에는 이경욱 회장을 비롯하여 자산가들이 많았지만, 100억 이상을 출연한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그가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돈을 융통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으니 약속 기한 내에 납금이 안 돼도 조금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만약 안심이 안 되시면 이 자리에서 증여 계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책상에 간단한 기부 협약서가 있으니 거기에 서명만 해 주시면 됩니다. 강수혁 대표님께 도움을 바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배포가 크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부터 학교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외에도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수혁은 품속에서 김유리 이사장의 연락처를 꺼냈다.
“회사에서 재단도 운영하고 계셨군요.”
“국민에게 받은 게 있으면 돌려드리는 것도 있어야지요. 아, 그리고 장학 프로그램에 대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경률 총장은 진중한 자세로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내친김에 장학 프로그램을 SH에서 전담하고 싶은데, 총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크흠, 대표님께서 그리해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시는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기부금만으로도 충분하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혁이 파격적인 발언을 연달아 하자 경률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강의 건물과 장학 프로그램 모두 SH에서 비용을 대는 편이 저로선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표님께서 학교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리 깊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경률은 고개를 숙이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값지게만 쓰인다면 더한 건들 못하겠습니까?”
“강수혁 대표님의 인품을 보니 SH의 성공이 이해가 됩니다.”
“아직 성공이라고 말할 수준이 아닌데, 부끄럽습니다.”
수혁은 평소대로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는 대로 따로 직원을 불러 장학 프로그램 건을 조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총장은 수혁의 행동에 크게 감화된 상태라 그가 어떤 제안을 해도 받아들일 태세였다.
“어떻게 처리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프로그램을 전담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수혁은 아직 답변을 듣지 않은 상태라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SH가 주도하는 장학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달라고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특정 기업과 유착한다는 시선이 있지 않겠습니까?”
수혁은 확언을 받기 위해 이경률 총장의 속을 떠봤다.
“학교를 위해 큰 결정을 해 주신 분께 적절한 성의를 보이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리스크야 제가 감수하면 되니, 뒷말이 나오지 않게 조심만 해 주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장학 프로그램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화가 잘 풀린 것 같으니, 회사로 돌아가면 기획안부터 짜야겠다.’
확답을 들은 수혁은 벌써부터 계획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알아서 잘하실 텐데,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모님께서 참석만 하신다면 시상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가 배정될 수 있게 신경을 써 보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이 베풀어 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감사하다는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수혁과 이경률 총장은 이후 근황과 관련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화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 * *
강남에 위치한 지오쇼핑 사무실. 수혁은 프로그램 기획안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장학금 대상자를 취약 계층으로 한정하면 안 돼. 중산층 이상 되는 학생 중에서도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있을지도 몰라. 하, 그런데 장학금을 주는 것만으로 SH그룹에 온다는 보장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혁은 장학 프로그램과 인재 영입을 연결하는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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