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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54화 (254/316)

254화

“그런 사연이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걸 고려하면 대표님의 겸손한 인품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경욱 회장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일전에 천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어록을 남기지 않으셨습니까?”

정협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경욱 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쭙잖은 말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MC소프트의 스티브 콜 회장이나 파인즈의 헤런 웨이즈 회장을 보며 우리나라에는 그런 인물이 없을까 안타까워한 적이 있는데, 강수혁 대표님을 보니 그 마음이 싹 가시는 듯합니다.”

경욱은 대통령의 질문에 찬양 일색인 대답을 내놓았다.

‘말하는 것과 달리 표정은 좋지 않은데? 하긴, 하찮게 여겼던 사람을 치켜세우자니 마음이 불편하겠지.’

수혁은 눈은 웃고 있지만, 입은 앙다물어진 경욱을 보며 생각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놈이었어. 스마트폰이 강수혁 대표의 아이디어였다니……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는 말이 틀리지 않구나. 언제부턴가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며 상대를 가볍게 여겼던 세월이 부끄럽군.’

이경욱 회장은 수혁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안이함을 자책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국내에는 적수가 없었던 일송은 굴지의 대기업들조차 한 수 접어 주던 엄청난 기업이었기에 그의 태도가 마냥 부적절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제가 봐도 강수혁 대표님께서는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여타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듯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이런 분을 SH에서만 독점하는 건 국가적인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수혁은 대통령이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박명철 대통령 때부터 정부는 기업과 연계한 미래 비전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직속 기구로 재경부 산하의 여타 기관들보다 훨씬 영향력이 강한 곳이지요.”

‘기어코 올 게 왔구나. 강수혁 대표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곤 생각했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할 줄이야…….’

미래 비전 연구소는 관료들과 기업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정책을 만드는 곳이었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 만큼 국회에 입법이 될 확률이 높았는데, 연구소장으로 역임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이경욱 회장이었다.

“왠지 미래 비전 연구소로 들어오시라고 말씀을 하실 것 같군요.”

“하하, 그렇습니다. 대표님께서 부담을 느끼실 것 같아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먼저 말씀을 꺼내 주시니 이야기하기 한결 편해졌습니다.”

“미래 비전 연구소가 제시한 정책들은 국무 회의에서도 많이 논의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강수혁 대표님께서 연구소에 가신다면 국가 장기 비전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실 겁니다.”

현명길 회장은 친분이 깊은 수혁이 연구소에 들어가면 WG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 들자 대통령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연구소에서 제가 맡을 역할은 무엇입니까?”

“제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피지 못했는데, 조만간 연구소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사실 전 대표님께서 미래 비전 연구소의 운영을 전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현재 소장을 맡고 계시는 이경욱 회장님께서는 고문 자리를 드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정협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소장 교체 건은 취임 개시 전부터 고려했던 사안이었다. 그는 연구소에서 나온 정책 중 상당수가 일송을 위한 것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국가 발전이 수반되는 정책이라면 이득을 취한 것을 크게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타 회사와의 상생이나 민생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회사만 생각한 이경욱 회장은 연구소장 감은 절대 아니야.’

그는 경욱을 따로 불러 호되게 질책하고 싶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영향력을 자랑하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

강수혁 대표의 사례를 봤을 때 괜히 맞붙었다간 피곤해 질 수 있으니 최대한 점잖게 하자.’

정협은 원래 불의를 보면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성격을 가졌으나 언론이 SH그룹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며 신중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직을 내려 놀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점점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꼈거든요.”

“겉으로 뵀을 땐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데, 많이 피로하신 모양입니다. 편히 쉬시면서 고문으로서 조언을 해 주시면 깊게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그간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공은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수혁 대표님이면 소장직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적임자이지 않습니까?”

이경욱 회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속은 천불이 나고 있었다.

‘따로 서신을 보내든가 둘이 있을 때 말해도 될 것을 굳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공개하다니,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만만히 보는 건가? 제아무리 일국의 통치자라지만, 날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자존심이 구겨진 경욱의 입가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내 자원을 총동원해서 복수를 하고 싶지만, 임기 초라 함부로 건드렸다간 역풍을 맞게 될 거야.’

경욱은 수혁을 압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해 정권을 흔들고 싶었지만, 이제 막 취임한 통치자를 건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건 알았기에 꾹 참고 넘기기로 했다.

“저…… 대통령님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회사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라 소장직은 맡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거라면 우리가 최대한 배려하겠습니다. 원래 공무원은 겸업이 금지되지만, 연구소는 정부와 기업이 연계해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대표님의 경영 활동을 최대한 배려하는 형태로 운영될 겁니다. 이경욱 회장님께서도 기업을 운영하시면서 소장직을 훌륭히 소화하신 것을 생각하면 대표님에게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수혁은 하루빨리 회사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기에 제안을 사양했지만, 정협은 수혁을 꼭 영입하고 싶었다. 그는 시장을 독식함에도 소비자 친화적인 SH에 대한 호감도 있었지만, 일송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은 패기와 정신력을 높게 사고 있었다.

‘대통령님께서 거듭 부탁하시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협의 간청에 수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연구 소장 말고 이경욱 회장님처럼 고문을 맡는 건 어떻겠습니까? 대신 저희 회사에서 제 뜻을 잘 이해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파견하여 연구소 업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음……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특수직을 하나 만들겠으니 그 역할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통상 고문이라하면 옆에서 조언을 해 주거나 간접적인 도움만 줄 수 있을 뿐, 이름뿐인 직책인 경우가 많았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한 정책 수립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아. 그럼, 연구소장직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후, 이경욱 회장님께서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신다고 하셔서 다른 분을 찾아봐야 하긴 하는데,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협은 수혁이 소장직을 거절한 것에 대해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며 한숨을 쉬었다.

‘쳇, 내가 그만두길 바란 주제에 누굴 약 올리나? 아무리 대통령이라지만 너무하는군.’

경욱은 또다시 본인이 언급되자 처음으로 얼굴이 굳어지며 평정심을 잃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조금 전에 자신이 꺼낸 이야기였기에 반발하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혹시, 제가 한 분 추천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은 분이라도 계십니까?”

“이 자리에 계신 현명길 회장님께서 연구소장으로 적격이신 것 같은데, 대통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혁은 명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강수혁 대표님으로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현명길 회장님을 깜빡했네요.”

“회장님은 이경욱 회장님 못지않게 재계에 명망이 높으시고, 그 인품을 흠모하는 후배 기업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연륜이 부족한 제가 소장이 되는 것보단 현명길 회장님이 하시는 게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협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수혁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명길을 추천했다.

“허허. 강수혁 대표님이야 절 좋게 봐 주시지만, 다른 분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봐도 현명길 회장님께서 소장직을 맡는 게 이치에 맞을 듯합니다. 강수혁 대표님께서 소장직을 수락하는 것이 최선이긴 하나, 만약 차선이 있다면 현명길 회장님보다 적합하신 분은 없어 보입니다.”

만남 내내 발언에 주의하던 이경욱 회장은 현명길 회장을 추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훗, 나보다는 현명길 회장님께서 소장직을 맡는 편이 본인의 자존심이 덜 상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수혁은 살짝 격앙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말하는 경욱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가 잘 이루어진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실장님, 조금 있다가 정무수석 좀 들어오라고 하세요.”

정협은 자신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비서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시간은 언제가 편하십니까?”

“길게 끌 거 뭐 있습니까? 회장님들과 대표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개편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정리하시는 게 서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뒤 정무수석을 부르기 위해 방을 빠져나갔다.

“정무수석님이 곧 오실 테니, 연구소 운영에 도움이 될 만한 사안들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취임한 상황은 아니지만, 성심껏 고민해 보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국가 운영에 보탬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혁과 명길은 공손히 대답했다. 반면에 경욱은 소태 씹은 표정을 지으며 차만 들이키고 있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할 말이 뭐 있겠어? 후, 그냥 둘만 데리고 이야기하면 될 거 왜 나까지 이 일에 결부시키는지 모르겠네.’

대통령이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한 이경욱 회장은 이 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정무수석님이 오셨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대통령님, 부르셨습니까?”

금테 안경을 낀 중년의 남성이 대통령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미래 비전 연구소 관련해서 긴급회의를 하려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앉으셔서 차 한잔하세요.”

“네, 대통령님.”

정무수석이 앉자 연구소 운영과 개편에 관한 회의가 개시됐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으며 열띤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수혁은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늦은 시각까지 청와대에 머물렀다.

바빴던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었다. 수혁은 새로 완공된 SH그룹 본사 건물을 구경하기 위해 판교에 도착해 있었다.

‘드디어, 우리 회사에도 제대로 된 본사가 생겼구나.’

수혁은 판교에 세워진 본사 건물을 쳐다보며 감상에 잠겨 있었다.

- 25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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