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53화 (253/316)

253화

“대표님, 또 뵙는군요.”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수혁은 현명길 회장이 아는 체를 하자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청와대에서는 처음 뵙는군요. 앞으로 종종 보게 될 테니, 서로 잘 지냅시다.”

“네, 회장님.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경욱 회장은 박람회 이후로 수혁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송의 야심작인 스타일 폰은 전자 부문에서 동관상을 탔지만, Z1에 밀려 언론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재계를 이끌고 계신 분들이 친하게 지내시는 것 같아 보기가 좋습니다.”

“재계를 이끌다니요. 회장님들은 모르지만, 전 아직 멀었습니다.”

김정협 대통령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덕담을 건네자 수혁은 겸연쩍어했다.

“강수혁 대표님께서 이끄시는 SH가 대기업이 되는 건 시간문제지 않습니까? 최근에 상장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수혁은 대통령 옆에 앉아 있는 거대한 체구의 남성이 낯이 익었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일전에 과학 기술부 공모전 행사 때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정문호 의원님이시지 않습니까?”

“오, 위원장님을 아십니까?”

정협은 수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과학 기술위 위원장은 강현제 대표님 아니셨습니까?”

“대통령님께서 강현제 대표님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셔서 제가 위원장 자리로 가게 됐습니다.”

문호는 정협을 대신해서 설명했다. 자리에는 재경위 위원장도 와있었다. 재경위는 재정 경제부와 관련된 위원회로 2008년에 기획 재정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제가 사업 외적으로는 세상 소식에 어두워 미처 몰랐습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이해합니다. 조금 전에 이경욱 회장님께서 대표님을 눈여겨볼 차세대 CEO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더 크게 이바지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문호는 예전의 적대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일송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 왜 잘해 주나 궁금했는데, 이경욱 회장 때문에 그런 거였구나.’

수혁은 이제야 그의 변화가 이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흠, 항상 견제만 당하고 살아서 그런가. 조금 어색한데?’

수혁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정문호 의원뿐이 아니었다. 자리에는 비서실장을 포함한 여러 관료도 있었는데, 이들은 이경욱 회장보다는 현명길 회장이나 수혁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훗, 그동안 나한테 회장님 거리며 고개를 조아리던 놈들이 판세가 바뀌니 다른 사람에게 꼬리를 흔드는 꼴이 참 우습군. 화나지만 어쩌겠어? 이게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인걸…….’

이경욱 회장은 명길과 수혁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대통령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현명길 회장은 정협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많이 들어온 것 같던데, 기자 회견은 우리도 참석하는 겁니까?”

“멀리서 오신 분들에게 그런 부담을 안겨 드릴 수는 없지요. 사실, 이 모임도 새로 취임한 당내 간부들과 인사를 하다가 회장님들께서도 안면을 익히면 좋을 것 같아 급하게 만든 겁니다. 오찬은 저와 내빈들만 즐길 예정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정협 대통령은 편안한 식사를 위해 출입 기자들에 관한 업무는 대변인에게 모두 일임한 상태였다.

“대통령님,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빈분들도 오셨는데, 오래 머무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대통령님의 국정 운영에 지장이 가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오찬 시간이 임박하자 여당 정치인들은 눈치껏 자리를 떴다.

“대통령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김정협 대통령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에 있는 다른 문으로 향했고, 수혁을 비롯한 회장들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수석 요리사님께서 특별히 준비한 사골 칼국수와 불고기입니다. 차린 게 많지 않지만, 맛이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이 정도면 훌륭한 밥상이지요. 나이를 먹다 보니 음식이 잘 들어가지 않는 편인데, 메뉴가 부담스럽지 않아 참 좋습니다.”

“예전에는 칼국수를 많이 먹었는데, 최근 들어 통 먹지 못해 생각나던 참이었습니다.”

기업인들은 소박한 오찬 상에 어떤 불만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맛있게들 드세요. 양이 부족하면 또 만들어 드릴 수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시고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대통령이 손짓하며 식사할 것을 권하자 사람들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국제제품박람회는 국가의 경쟁력을 볼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제품 전시만 해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데, 수상 기업이 두 군데나 나온 것은 국가적인 경사입니다.”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회사가 이만큼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업이 국가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지만, 국민의 성원과 적절한 정책이 수반되지 않으면 성과를 만들기가 쉽지 않지요.”

“그렇습니다. 일송과 WG는 역대 정부의 기업 발전 정책의 큰 수혜를 받았습니다. 회사의 이익만 생각하기에는 받은 것이 적지 않아서 순전히 우리 힘만으로 수상을 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현명길 회장과 이경욱 회장은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두 회장님도 대단하시지만, 강수혁 대표님의 이력도 만만치가 않더군요. 2000년엔 설립된 SH그룹은 초기엔 작은 교육 회사에 불과했지만, 3년 만에 매출 규모가 수조 원에 달하는 견실한 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최근엔 일본과 중국 시장에도 진출했다는데, 어떻습니까?”

“ANA의 김정우 회장님의 도움 덕에 해외 법인 설립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4월부터는 영업이 개시될 예정이며, 시장 규모가 큰 만큼 적지 않은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수혁은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차분히 대답했다.

“박명철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소프트 파워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Z1에 들어가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SH와 같은 기업이 많이 나와야 우리나라가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철은 2003년 초까지 대통령을 지냈던 인물로 IMF를 수습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세웠는데, 그중 가장 강조했던 게 벤처 기업의 활성화와 소프트 파워의 제고였다. 소프트 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 제재로 표현되는 하드 파워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한 국가가 정보 과학, 문화, 예술 분야에서 얼마나 강한 경쟁력을 가졌는지 보여 주는 지표였다.

“대통령님께서 고등학교 시절, 샌더스 교수가 쓴 ‘새로운 흐름.’이라는 책에 큰 감명을 받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책을 보면 미래에는 기존 전화기를 뛰어넘는 통신 수단의 발명과 정보화 시대의 도래로 인해 세계가 하나가 될 거라고 역설했습니다. 저는 우리 기업인들이 대한민국을 ‘트렌드를 주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72년에 출간된 새로운 흐름은 옛 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 새로운 흐름이었는데, 다시 읽어도 참고할 사항이 무척 많았습니다.”

김정협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애정 하는 책이 언급되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샌더스 교수가 최근 ‘부의 이동’이라는 책을 저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유가 없어 읽지 못했지만, IT 기술이 발전되고 세계화가 진행됨으로써 기존의 자산가들 외에 신흥 자산가들이 많이 출현할 거라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보셨습니다. 우리나라는 국민과 기업이 노력해 준 덕분에 후진국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시대에는 자본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파악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선 이미 책을 읽으셨나 보군요?”

수혁은 김정협 대통령이 ‘부의 이동’에서 영감을 받은 국가 정책을 여럿 만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좋지 않은데? 대통령께서 강 대표에게 너무 과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이러다가 SH에 호감이라도 가지면 우리는 WG뿐만 아니라 SH에도 따라잡힐 수 있어.’

이경욱 회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지켜봤지만, 속내는 복잡했다. 김정협 대통령은 이제 막 임기를 시작했기에 그가 어떤 정책을 세우냐에 따라 기업의 미래가 많이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새 정부가 출범된 이래로 21세기에 맞는 국가 비전을 세우기 위해 논의를 활발히 하고 있는데,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부의 이동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역시,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우연이 아니었네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미래 트렌드에 대한 깊은 통찰은 필수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들이 말씀을 아끼시는 것뿐이지 제 머릿속에 있는 것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수혁은 대통령의 칭찬에도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반응했다.

“대통령님, 사실 Z1의 개발에 강수혁 대표님의 공이 작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현명길 회장은 수혁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고 입을 뗐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Z1은 WG전자에서 단독으로 개발한 상품이지 않습니까?”

수혁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정협은 명길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세간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WG가 출시한 스마트 폰은 강수혁 대표님의 상품 기획안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정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습니다. 다음 주에 출시될 Z1의 디자인과 작동 방식은 모두 강수혁 대표님의 아이디어입니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현명길 회장님은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분이야.’

수혁은 자신을 띄워 주기 위해 애쓰는 명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스마트 폰에 들어가는 부품 조달과 전반적인 개발 과정은 전적으로 WG전자가 담당했지만, 대표님께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시지 않았다면 세상에 Z1이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Z1에 들어간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대표님이 또 달리 보이는군요.”

김정협 대통령은 끝을 알 수 없는 수혁의 역량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획기적인 아이디어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공염불일 뿐입니다. Z1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회장님과 WG전자의 공입니다. 칭찬을 들어 기쁘지만, 평가가 너무 후한 것 같아 조금 쑥스럽네요.”

“평가가 후하다니요. 우리 WG는 대표님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명길과 수혁은 덕담을 나누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김정협 대통령은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 25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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