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김용민 사장님께서는 SH소프트 설립에 성심껏 지원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계열사에 비해 출시될 앱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철저히 대비하여 프로젝트에 지장이 가지 않게 잘 살펴 주셨으면 좋겠네요.”
“대표님이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인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용민은 수혁이 이번 기회를 통해 회사를 한 단계 더 발돋움시키고 싶어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대표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긴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박찬명 사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근 대표님께서 플레티넘상 수상자로서 매스컴에 오르내리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곳이 많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현명길 회장님도 저랑 비슷한 처지일 겁니다.”
수혁은 며칠 전 한국대 총장으로부터 축하 편지도 받은 상태였기에 찬명의 보고에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경률 총장은 동문으로서 수혁의 활약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님이 활동하고 계신 협회들 외에 대학에서도 강의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WG의 현명길 회장님의 경우처럼 상을 주겠다는 곳은 많진 않지만, 사방에서 서로 뵙고 싶다며 제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난 아직 학생 신분인데,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조금 어색할 것 같은데? 아니야, 회사를 위해선 이것저것 가리면 안 돼. 최대한 시간을 쪼개서 참석해야겠어.’
보고를 들은 수혁은 바쁜 일정과 부담감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로 결정했다.
“요청이 들어온 기관별로 우선순위를 매겨 저에게 메일로 보내 주세요. 전부는 어렵지만, 꼭 가야 할 곳이 있으면 시간을 내 보려고 합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쇼. 이들도 대표님이 바쁜 사람인 걸 알기 때문에 서운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특별한 곳에서 오찬을 함께하자며 연락이 왔습니다.”
“특별한 곳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찬명이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말하자 수혁은 궁금증이 일었다.
“청와대 수석 보좌관이라는 자가 VIP께서 보고 싶어 하신다며 시간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는 대통령을 비공식적으로 VIP라 칭하기도 했다.
“오, 청와대에서도 우리 회사를 주목했나 보군요.”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연달아 희소식이 들리는 걸 보니 올 한해 좋은 일이 있을 모양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임원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연락이 청와대로부터 온 건 확실합니까? VIP께서 아무런 예고 없이 급하게 일정을 잡았을 리가 없을 텐데요?”
대통령이 주관하는 행사치곤 격식이 없다는 생각에 의심부터 들었다.
“확실하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제가 볼 땐 청와대에서 온 전화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아, 현명길 회장님도 함께 초대되었다고 하니 한번 물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흠, 회장님에게도 연락이 갔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겠군요.”
‘살다 보니 대통령을 만나는 날도 다 오네. 청와대에 가게 되면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될까? 참 궁금하네.’
수혁은 턱에 손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국제제품박람회가 워낙 큰 행사인데, 엄청난 성과를 거둔 상황이라 즉석에서 오찬 자리를 마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대통령의 초청을 무시하기 어려우니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식전엔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짧은 회견 자리가 있어 언론에 노출도 되고, 여러모로 나쁘지 않을 듯 보입니다.”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단지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정말 청와대에서 전화가 온 건지 의심스러웠을 뿐입니다.”
박유신 사장이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하자 수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럼, 3일 후에 예정된 지오쇼핑 회의는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 그리고 박찬명 사장님께서는 한정길 대표님께 SH커뮤니케이션의 포털 사업은 진행하지 않아도 되지만, 메신저 사업만큼은 확실히 챙겨야 한다고 전해 주세요.”
정길은 김정우 회장으로부터 투자금을 받고 법인 설립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의 직함은 기존의 사장이 아닌 일본 법인을 총괄하는 대표로 바뀌어 있었고, 이는 해외에 나가 고생하는 정길에게 주는 영전이었다.
“네, 안 그래도 어제 메신저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참이라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용민이 개발한 지오 챗은 이미 어플리케이션 형태로 개발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Z1의 출시에 맞춰 메신저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었다.
“어떤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한정길 사장님께서 일본은 독일과 더불어 세계에서 으뜸가는 제조업 강국이라 대한민국의 제품이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며 우려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찬명은 정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수혁에게 전달했다.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일송 전자와 WG가 가전제품과 휴대폰으로 세계 시장에서 인정을 받았음에도 일본 국민은 한국의 제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요.”
“일본에 세계적인 전자 회사들이 워낙 많아서 그럴 겁니다.”
옆에서 듣던 김용민 사장은 말을 보탰다.
“그러나, Z1 정도의 제품이라면 까다로운 일본 국민도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뀔 겁니다.”
수혁은 처음 마음을 여는 것이 어렵지 한 번 성공하면 이후에는 수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과거로 오기 전에도 일본 국민은 일송을 세계적 기업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어. 사람들의 생각만큼 어렵진 않을 거야.’
스마트폰은 21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 불리는 획기적인 상품이었기 때문에 수혁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도 대표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Z1은 기존의 전자 기기들과 궤를 달리하는 제품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예측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지요. 한정길 사장님께 Z1과 별도로 메신저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메신저라는 게 꼭 Z1에만 탑재돼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주변 임원들도 수혁의 의견에 동조하며 낙관적인 예상을 내놓았지만, 그는 사업엔 100%란 없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회사가 점점 번창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씁쓸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수혁은 최필재 사장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궁금하여 물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우리의 처지가 마치 남의 집 잔치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비록 대표님께서 모임에 초청을 받긴 했지만, 어찌 됐든 현명길 회장님께서 메인이지 않습니까?”
필재는 개발팀장으로 재직하며 WG전자 관계자들과 협업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수혁이 Z1 개발에 관한 아이디어를 모두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수혁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기에 알면서도 함구하며 지냈던 것이다.
“같이 협업하는 사이에 누가 더 잘나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WG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
수혁이 점잖게 타이르자 필재는 민망한지 입을 꽉 다물었다.
“저도 SH가 특정 기업의 들러리가 되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당장은 WG가 국내 1위 기업으로 등극하겠지만, 제가 바라보는 곳은 국내가 아니라 세계입니다.”
“세간에 들리는 말에 제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대표님을 도와 SH가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SH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간혹 질투가 심한 몇몇이 SH가 WG의 위세를 등에 업고 설친다며 비난했고, 필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수혁의 시선이 국내를 넘어 세계로 향해 있는 것을 보자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게 다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셔서 그러신 거지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그룹 안건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죠.”
할 말을 마친 수혁은 남은 시간을 임원들이 가져온 안건을 검토하며 보냈다.
* * *
회의로부터 3일이 지났다. 수혁은 대통령을 뵙기 위해 오랜만에 명품 슈트를 꺼내 입었다.
‘김정협 대통령에 대해선 나름 잘 아는 편이니 대화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야.’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그가 쓴 자서전과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기에 비위를 맞추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표님, 여기서부턴 걸어가셔야 하니 내리시죠.”
“고생하셨습니다.”
비서관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혁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청와대 경호팀은 보안상의 이유로 내빈을 픽업하기 위한 차량을 따로 준비했다.
“청와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전 비서관은 수혁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가와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른 내빈들은 모두 도착하셨습니까?”
“네, 현명길 회장님과 이경욱 회장님 모두 10분 전에 도착하여 대통령님을 뵙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봅니다.”
“회장님들께서 예정된 시각보다 일찍 도착하신 거지 대표님이 늦으신 건 아닙니다. 대통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일단 이동하실까요?”
“네, 가시죠.”
수혁은 비서관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 정상들이 지내는 곳에 비하면 많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막상 와 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은 곳이잖아?’
청와대 내부는 그의 예상과 달리 넓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시기 전에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이분은 대통령께서 특별히 초청한 분입니다. 그냥 통과시켜 주세요.”
복도 중앙에는 경호를 위한 보안 기기가 있었고, 그 옆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비서관님은 신원이 보증되는 분이시지만, 이분은 절차상 검문을 해야 합니다.”
“경호실장님께 말씀 못 들었습니까?”
“네?”
“특별 초청된 내빈은 검문 과정을 생략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숙지를 못 하고 계십니까?”
의전 비서관은 엄한 얼굴로 경호원들을 꾸짖었다.
‘청와대에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위엄 있어 보이네?’
수혁은 비서관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들어가시죠.”
매서운 질책에 경호원은 잘못을 바로 인정한 뒤, 수혁과 비서관을 통과시켰다. 이후, 3분가량 말없이 복도를 걸은 수혁은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강수혁 대표를 모시고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비서관의 말에 직원은 문을 열고 들어가 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얼마 있지 않아 돌아온 직원은 문 안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드디어 대통령을 뵙는구나.’
수혁은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정협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영의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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