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45화 (245/316)

245화

‘뭐야? 왜 이렇게 썰렁해?’

각 룸 뒤편에는 이전 발표자가 사용할 수 있는 프레스 룸이 있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자들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던 이정찬 부회장은 마음을 가다듬고 기자들을 보러 온 상태였다.

“이 전무님, 3분 후면 회견이 시작되는데 왜 기자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죠? 설마 WG의 신제품을 구경하러들 간 겁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룸에 있던 기자들까지 몰려들어서 우리만 이런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현성 전무는 정찬이 또 돌변할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 그걸 위안이라고 합니까? 현재 기자들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조금 전에 살피고 왔을 땐 7명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젠장, 이게 뭡니까 진짜? 기자들에게 연락은 돌리셨습니까?”

이정찬 부회장은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현성을 다그쳤다.

“이미 만평일보랑 국내 언론사들에 연락을 해 놔서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도리가 없다니요. 우리가 이제까지 자기들에게 해 준 게 얼만데?”

일송은 도움을 받는 대가로 만평일보와 주요 언론사들에게 광고를 몰아주고 있었다.

“사실 프레스 룸에 앉아 있는 기자들 중 대부분 국내 기자들이라 언론사에서는 성의를 보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흠…… 안 되겠군요. 우리도 이러지 말고 강수혁 대표가 있는 곳으로 갑시다.”

“네? 그럼 대담 자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밖에 보면 모르십니까? 국내 기자들이야 어차피 우리 편인데, 뭐 하러 앉혀놓고 힘을 들입니까? 가서 얼마나 대단한 상품을 만들었는지 제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현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당해했지만 정찬은 막무가내로 일정을 취소하려 했다.

“적어도 기자들에게 말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 이 전무가 알아서 해야죠. 먼저 가 볼 테니 뒷수습 끝나면 바로 이쪽으로 오세요.”

이정찬 부회장은 말을 던지곤 수혁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쓰레기 같은 새끼, 남들 앞에서는 점잖은 척 교양있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꼴이라니 쯧쯧.”

정찬이 방을 나간 것을 확인한 이현성 전무는 혀를 차며 프레스 룸으로 향했다.

* * *

“기자님들이 많이 오신 관계로, 30분으로 예정된 대담 시간이 1시간으로 연장되었음을 알립니다. 인력이 부족한 관계로 사회자는 따로 두지 않고 대표님께서 진행을 맡아주실 예정이니 서로 배려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센터 직원은 수혁이 있는 프레스 룸에 모인 엄청난 인파를 발견하고, 방으로 들어와 시간이 조정됐음을 알려줬다.

“대표님, 시작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직원에게 고개를 숙인 뒤 마이크가 부착된 테이블에 착석했다.

“먼저 Z1에 성원을 보내주신 기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질의응답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앞에 계신 기자님, 먼저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손을 뻗어 맨 앞에 앉은 여성에게 발언권을 부여했다.

“안녕하십니까? NTC의 세라 기자입니다. 조금 전 C룸에서 인상적인 발표 잘 들었습니다. 친절히 설명해주신 덕분에 모두 이해가 됐지만, Z1의 운영체계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나 MC소프트의 소프트웨어와 상당히 유사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에 대한 대표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NTC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문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수혁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대중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기자님께서 물어봐 주시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PC에 설치된 MC소프트의 운영체계와 저희가 개발한 자이로스가 비슷해 보인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뭐야? 저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그냥 적당히 얼버무려도 될 질문에 너무 솔직하게 나오는데?’

기자들은 세라의 의견을 순순히 인정하는 수혁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애당초 핸드폰에 들어갈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 대중들이 손쉽게 적응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저는 대책을 고민하던 중, MC소프트가 개발한 핌즈가 가장 익숙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수혁은 이야기를 하며 미리 준비한 PPT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저희 개발팀이 연구한 결과 Z1을 처음 접한 고객이 기기에 적응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즉, 바탕화면에 폴더가 깔려있고, 실행 파일을 클릭함으로써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방식과 유사하기에 편리성을 갖추게 된 거지요.”

“자이로스가 PC의 운영체계와 비슷하고 이는 대중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점은 공감합니다. 하지만 저작권 문제에 대한 해명은 여전히 되지 않고 있습니다.”

세라는 차분한 어조로 질문을 계속했다.

“이걸 보시면 그 궁금증이 풀리실 겁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웹브라우저는 MC소프트사가 개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하다고 언급할 수 있는 웹브라우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혁은 M사의 프로그램과 경쟁사에서 개발한 웹브라우저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PPT 화면을 통해 보여 주었다.

“즉, 약간의 유사성 정도로 자이로스가 저작권에 저촉된다는 견해는 조금 무리라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최근에 저작권 및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JK로펌에 문의를 한 결과, 제품 간의 유의미한 차이점이 적지 않게 발견됐기 때문에 소송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그는 설명과 동시에, 미국의 대형 로펌인 JK에서 받은 서신을 화면에 띄웠다.

“자, 그럼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셋째 줄 맨 끝에 앉은 기자님, 질문해 주세요.”

세라가 납득해하는 표정을 짓자, 수혁은 다른 기자에게 질문 기회를 주었다.

“ARP사의 나흐얀 기자입니다. Z1을 원활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신 인프라를 손봐야 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대비책은 있으십니까?”

ARP는 중동지역 최대 신문사로,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구독자 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흐얀 기자님 말씀대로 Z1을 사용하려면 각 나라에 무선 인터넷망이 깔려야 합니다. 얼핏 봤을 땐 이 작업에 많은 비용이 들 것 같지만, 예상보다 적은 예산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말씀은 비용에 대한 계산이 끝나셨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무선통신망 사업은 선진국에서도 소수의 지역에서만 시범적으로 시행되었기에, 전국 규모의 사업 비용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에 나흐얀은 의아해했다.

“무선 인터넷 기술은 1990년대 중후반에 이미 공개되었습니다. 단지,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사업화되지 않은 것뿐이지요. 하지만 SH와 WG는 Z1 출시에 앞서 대한민국 정부와 무선통신망 인프라 사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참고로 아이디어 공모는 함께했지만, 사업은 WG에서 주관하기로 했고요.”

수혁은 나흐얀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대한민국에 무선 인터넷망을 까는 데 1년이 안 걸린단 말입니까?”

“사업을 WG와 정부가 주관했기에 정확한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광케이블 설치 작업이나 통신망 연결 작업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서도 무선 인터넷 환경을 조성하는데 별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무선 인터넷 보급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서 정한 규격을 따르면 되기에 사람들의 생각처럼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WG는 2GHz를 사용하는 3G가 아닌 2.3GHz의 주파수를 사용하는 4G에 관해서도 이미 파악해 두었지만, 수혁의 조언으로 발표를 늦추기로 했다.

‘3G가 보편화됐을 때쯤 4G를 발표하면 우리나라는 국제표준을 리드하는 국가가 될 수 있어.’

수혁은 어플을 통해 4G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지만, 통신사업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조건 없이 현명길 회장한테 알려 주었다.

“대답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 이제 다른 질문을 받겠습니다. 아, 네. 말씀하세요.”

수혁은 이후에도 다양한 국적의 기자들로부터 질문세례를 받았고, 그때마다 적절한 답변을 제공했다.

‘아까 나흐얀 기자 때 아랍어를 능통하게 구사해서 설마 했는데……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는 거야?’

‘일상 회화를 넘어 전문적인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 같아.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대단한데?’

기자들은 수혁이 아랍어, 영어, 인도어, 불어 등 다양한 외국어를 현지인 못지않게 구사하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아주 신이 났구만.’

이정찬 부회장은 프레스 룸 구석에서 수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아버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일송그룹의 회장, 이경욱이었다. 그는 WG의 신제품이 센터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비서의 보고를 듣고 급하게 프레스 룸으로 온 것이었다.

“A룸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 있어?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너답지 않구나.”

경욱은 평소 정찬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에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내 사람들 만나러 돌아다녔으면서 왜 나한테 이러시는 거야.’

정찬은 자신을 엄하게 바라보는 경욱에게 반항심이 들었지만 표정을 관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쟁사의 제품이 어떤지 보러 왔습니다.”

“그건 사람을 시키면 될 일이잖아. 넌 애당초 강 대표처럼 기자들과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길 기웃거리고 있는 거냐?”

이경욱 회장은 기분이 언짢았는지 언성을 높였다.

“기자들이 전부 Z1을 보러 가는 바람에 발표가 전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신제품들이 남아 있는데, 벌써 손을 놓은 건 아니겠지?”

“지금 바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됐다. 일단 왔으니까 강수혁 대표가 뭐라 하는지 듣고 가라.”

정찬은 아버지의 심기가 상할까 두려워 방을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혼쭐을 내려 했지만 들어 보니 만사를 제치고 올 만해. 후, 내가 이들을 너무 우습게 본 건가?’

이경욱 회장은 정찬에게 말을 걸기 전부터 프레스 룸에서 오가는 대화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이 부회장 Z1에 대한 대응책은 마련하셨습니까?”

“현재 직원들에게 관련 자료를 구하라고 지시를 내려뒀습니다. 우선 제품에 관한 파악을 마친 뒤 구체적인 대책을 세울 생각입니다.”

이경욱 회장은 대화 초기엔 집에서 대하는 것처럼 말을 걸었지만, 회사 일을 논의할 때는 자식이더라도 보통의 임직원들처럼 대하는 편이었다.

“관련 자료야, WG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북이 있지 않습니까?”

“가이드북에 Z1의 사양과 사용법이 나와 있긴 하지만 적절한 대응을 위해선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찬은 시큰둥한 아버지의 반응에 빈정이 상했지만, 꾹 참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 24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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