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건물은 언제부터 쓸 수 있답니까?”
“정확한 시기는 김용민 본부장님이 아실 것 같습니다. 이번에 연락을 드릴 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박유신 사장은 지시 사안들을 수첩에 적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 이번에도 커팅식은 간단히 하실 겁니까?”
“흠…….”
보통 때라면 외부인사 없이 임직원들만 불러 간소하게 커팅식을 했을 수혁이지만, 판교에 세운 본사 건물은 그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전 원래 형식을 잘 따지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2월에 제품도 출시되고 주식도 상장되는 걸 고려하면, 대외적으로 크게 홍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러면 사장님께서 언론사들과 성남시의 유력자들에게 연락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수혁은 이전과 달리 커팅식을 성대하게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이전에 보니 강현제 대표님과 친분이 깊으신 것 같던데 한번 말씀을 드려 볼까요?”
“아닙니다. 그분이 오시면 주위의 이목은 끌겠지만, 우리 회사에 정치색이 입혀지기 때문에 득보단 실이 더 큽니다.”
“아, 그 점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그러면 성남시 공무원들과 의원들 위주로 연락해보겠습니다.”
수혁의 합리적인 의견에 유신은 금세 수긍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네, 대표님. 편안한 하루 되십쇼.”
유신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고 수혁은 업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료를 받으면 바로 발표 준비를 해야겠어.’
제품박람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회사가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기에 수혁은 당분간 프레젠테이션에 심혈을 기울이기로 했다.
* * *
2003년 2월 13일 목요일, 수혁은 이틀 후 있을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에 도착했다. 박찬명 사장은 대표와 함께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SH 강수혁 대표님 맞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수혁을 발견하곤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는 WG전자 대외협력팀장 김백준이라고 합니다. 현명길 회장님께서 대표님을 모셔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회장님은 이미 와 계신가요?”
“네, 현재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수혁은 백준을 따라 차로 이동했다. 아랍에미리트의 날씨는 2월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을 육박했다.
‘저곳이 우리가 머무를 호텔이구나.’
수혁이 머무를 숙소는 박람회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두바이에 있는 7성급 호텔 뒤지지 않는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선 어디 계십니까?”
“VIP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계실 겁니다.”
“라운지에 먼저 가 계시겠습니까?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어야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일단 로비로 가시죠.”
택시에서 내린 수혁은 백준을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카드를 받은 수혁은 백준과 인사를 나눈 뒤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 너무 좋은 곳으로 예약한 거 아니야?”
찬명은 업무 시간 외에는 수혁을 학교 후배로 대했기 때문에, 단둘이 되자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수혁은 호텔에서 가장 비싼 스위트룸을 예약했는데 집무실이 따로 있어 업무를 처리하고 발표 준비하기에 최적화된 방이었다.
“수혁아, 회장님 기다리시겠다.”
“네, 형. 거의 다 했어요.”
수혁은 책상 위에 한국에서 가져온 자료들과 노트북을 올려놓고 있었다.
“진짜 대단하다. 이것들을 다 볼 거야?”
찬명은 족히 수백 장은 돼 보이는 서류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저에게 할애된 시간이 30분인데 생각보다 엄청 긴 시간이더라고요. 아,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리허설을 할 건데 형이 좀 봐주셔야 될 것 같아요.”
“후, 오늘 밤은 너랑 근사하게 와인 한잔하면서 즐기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죄송해요. 술은 프레젠테이션 끝나고 뒤풀이 때 하는 거로 하시죠. 슬슬 나가 볼까요?”
“응, 알았어.”
짐을 모두 정리한 수혁과 찬명은 곧장 VIP 라운지로 향했다.
“허허, 드디어 오시네요.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호텔 24층에 있는 VIP 라운지, 수행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현명길 회장은 라운지에 입장하는 수혁을 보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그동안 통화만 했지, 마지막으로 얼굴을 뵌 게 1년도 훨씬 더 된 것 같습니다.”
수혁도 미소를 지으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전 잠시 대표님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네, 회장님.”
“대표님, 저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겠습니다.”
“경치 구경하면서 커피 한잔하세요.”
명길이 독대를 하기 위해 수행원들을 부르자 찬명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줬다.
“발표 당일에는 점심을 좀 일찍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정을 살펴보니 토요일 12시부터 6시까지 진행하더군요.”
테이블에 둘만 남자 수혁이 먼저 입을 뗐다.
“내일 중에 황정명 부회장도 온다고 하니까, 박찬명 사장까지 네 명이서 함께 식사라도 하시죠.”
“10시 40분쯤에 뵈면 적당하겠네요.”
“그렇게 빨리요?”
“일찍 가서 연습도 하고, 현장 분위기도 익혀 놓을까 해서요.”
“허허,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여 주시니, 있던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현명길 회장은 수혁의 열정에 감탄했다.
“혹시, 일송전자에 관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박람회에 참석한다는 것 외에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수혁은 명길의 입에서 일송이 언급되자 호기심이 들었다.
“박람회장은 각 분야에서 최상위 클래스로 분류되는 모든 기업들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봤는데, 국내의 컨벤션 홀보다 적어도 3배 이상은 커 보였습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웬만한 스포츠 구장보다 더 클 겁니다. 그리고 박람회가 열리는 1층은 섹션 별로 세트장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곳이 전자제품 섹션입니다.”
“아무래도 노트북, PC, 핸드폰, 가전제품 등 실생활과 밀접한 제품들이 많아서 그렇겠지요.”
명길의 말에 수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맞습니다. 가전제품만 해도 상품의 수가 꽤나 많습니다. 따라서, 기자들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경향이 있지요.”
“그 말씀은 제 프레젠테이션이 형편없으면 기자들이 자리를 뜰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요. 걱정하지 마십쇼. 어차피 이 박람회에서 Z1보다 더 혁신적인 제품은 찾기 어려울 테니까요.”
수혁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우리 상품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송에서 의도적으로 우리와 같은 시간대에 발표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네요.”
“일송에서요?”
“네, 이전부터 일송은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박람회가 있을 때면 온갖 수를 다 썼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견제가 들어온 적은 처음입니다.”
“흠, 아마 저 때문일 겁니다. 최근 들어 일송과 여러 일로 마찰이 많았거든요.”
수혁은 짐작이 간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시간에 발표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바로 뒤 시간대에 핵심 상품을 배정했습니다. 그것도 동일한 장소에서 말이죠.”
“이거 참 재미있게 됐군요. 말씀을 듣고 나니 철저히 대비해서 콧대를 눌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명길 회장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반해, 수혁은 무사태평이었다.
“이들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세요. 부끄럽지만 국제 박람회에서 10여 차례 맞붙는 동안 한 번도 나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WG는 어느 회사보다 획기적인 상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일송을 뛰어넘지 못한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확실히 젊은것들보단 현 회장께서 현실에 대해 잘 파악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 곁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은…… 이경욱 회장이잖아? 옆에 아들도 데려온 걸 보니, 이 호텔에서 묵을 생각인 것 같군.’
수혁은 일송전자의 이경욱 회장과 이정찬 부회장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강 대표님, 우리가 아무리 살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선배가 오셨으면 인사를 하는 게 예의지요.”
“대화에 몰두하다 보니 실례하게 됐습니다. 안녕하십니까, SH의 강수혁 대표입니다.”
이정찬 부회장이 냉소를 지으며 말하자,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이전에 협회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성장했군. 그땐 무서운 걸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았는데 말이야.”
“기업의 대표라면 개인의 감정보단 회사의 안위를 생각하며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번드르르하니 잘하는구먼, 근데 듣자 하니 우리 아들과 손주 녀석이 신세를 졌다면서?”
경욱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공격적이었다.
“죄송하지만 그 사안에 대해서는 회장님께 어떤 말씀도 드리기 어려울 듯싶습니다. 전 그저 서로 존중하며 지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 가족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안다면 이렇게 당당하기 어려울 텐데, 참 뻔뻔하군. 후, 마음 같아선 들이박고 싶지만, 회장님도 옆에 계시니 참자.’
수혁은 주변의 이목을 고려하여 경욱의 도발을 무시하기로 했다.
“존중?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다른 놈들은 모르지만 난 네놈의 뱀 같은 혀에 놀아날 생각 없으니 위선 떨지 말거라.”
“이 회장님, 대표님께서 나이가 어리시긴 하지만 어엿한 한 기업의 수장입니다. 최근 가족들이 구설수에 올라 스트레스가 심하신 건 알겠지만 말씀은 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명길은 이경욱 회장이 평소 거침없는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무례한 모습에, 점잖게 꾸짖었다.
“전 현 회장처럼 속내를 숨기고 가식 떠는 행위는 못 합니다.”
“후, 최소한의 예의를 가식이라고 생각하시는 걸 보니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네요.”
이경욱의 오만방자한 언행에, 명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회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것보다 부회장님, 아버님을 모시고 다른 데로 가 주세요. 저는 대표님과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현명길은 정찬의 인사에 차갑게 대꾸했다.
“여길 오기 전에 WG에 대해 알아봤는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들을 외면하려던 명길은 이정찬 부회장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웃는 낯으로 나에게 비수 같은 말을 여러 번 한 사람이야. 진짜 뱀은 내가 아니라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수혁은 온화한 인상에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정찬이 무슨 말을 할지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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