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전 세계 기자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겠네요.”
“유수의 평가기관 관계자들이 별점을 매기는 자리이기도 해서, 그 중요성은 여러 번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지요.”
황정명 부회장은 수혁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했다.
“기사를 보니, 매년 2월에 개최되는 국제제품박람회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고 쓰여 있네요.”
수혁은 어느새 컴퓨터를 틀어 박람회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심사위원들과 기자들이 가장 매력 있고 혁신적인 제품을 뽑는데, 1등으로 선정되면 엄청난 화제를 끌 수 있을 겁니다.”
“오, 일종의 경연대회 같은 거군요.”
“네. 전자 부문, 모터 부문 등 다양한 부문에서 최고의 제품을 뽑는데, 이들 중에서 한 해를 대표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제품을 따로 또 선정합니다.”
“쉽게 말해서 전시회에 나오는 모든 제품들 중에서 최고라는 이야기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매년 엄청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수상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역대 수상 제품들을 보니 핸드폰은 처음 출시됐을 때를 제외하고는 수상한 기록이 없군요. 가전제품 쪽도 거의 전멸이고요.”
수혁은 대화를 나누며 관련 자료들을 탐색 중이었다.
“아무래도 반도체라든가 제약 산업 등과 같은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제품들이 인기를 끌었지요. MC소프트가 개발한 PC 전용 소프트웨어가 이례적으로 수상한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제품이 유리한 건 사실입니다.”
황정명 부회장은 선호 제품의 특징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부회장님, 혹시 프레젠테이션을 맡을 사람은 구하셨습니까? 괜찮다면 제가 무대에 서서 발표를 하고 싶은데요.”
“흠, WG와 SH가 합작해서 만든 상품이긴 하지만, 핸드폰 자체는 엄연히 WG의 이름을 달고 나오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이번 기회를 잘 살려 양사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수혁은 난색을 표하는 정명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했다.
“대표님의 진심을 감안하더라도 바로 답변을 드리기는 조금 곤란하네요. 회장님께서 내정한 발표자가 이미 있거든요.”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거절당한 수혁은 아쉬움이 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현명길 회장님께서는 원래 본인이 직접 하고 싶어 했으나, 연세가 있으신 관계로 제품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획실장을 발표자로 내정했습니다.”
“기획실장이면 제품에 대해 잘 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부회장님, 뭔가 잊으신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요?”
황정명 부회장은 의아하다는 듯한 투로 반문했다.
“애당초 스마트 폰에 관한 기획안을 만든 사람은 접니다. 심지어 작동 방식과 기기의 디자인까지 전부 제가 고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번 발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WG는 일송을 넘어 명실상부한 국내 1위 기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한 번뿐인 기회라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수혁은 시제품으로 나온 스마트 폰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사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장본인으로 그 누구보다 기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대표님의 말씀엔 하자가 없긴 하군요.”
“찜찜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아직도 저의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정명이 마지못해 수긍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수혁은 빈정이 상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회사를 생각하는 부회장님의 충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때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마트 폰을 만드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가서 직접 생산하지 않았던 거지, 시간을 여유 있게 잡았으면 자체 생산도 불가능은 아니었습니다.”
“…….”
수혁은 현재 SH의 자본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제 말에 크게 하자가 없는 모양이군요. 부회장님.”
“네, 대표님.”
“저도 이런저런 걸 따지고 싶진 않으니,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발표할 수 있게 힘을 실어 주십쇼. 이 기회,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후, 회장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황정명 부회장도 수혁이 기여한 바가 작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거듭되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믿고 맡겨 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힘없이 대답하는 정명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긴밀한 동업자 관계라고 하지만 WG의 이름으로 나오는 신제품을 타사 대표가 공개한다고 하면 누구나 기분이 나쁠 거야. 조금 찔리긴 해도 결과로 보여 주면 되는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전화상에선 다소 강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된 행동이었다.
‘현명길 회장님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시려나? 잘 풀려야 할 텐데…… 어? 갑자기 뭐지?’
상념에 잠겨 있던 수혁은 눈앞에 화면이 뜬 것을 발견했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한동안 잠잠했던 어플이 갑자기 작동하자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확인 버튼을 눌렀다.
<2월에 있을 발표를 잘 마무리하고, 회사 비전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인물과 연을 맺으십시오.>
‘지금 세운 비전도 충분해 보이는데 또 다른 목표를 세우라는 이야기인가?’
수혁은 스마트 폰을 기반으로 한 여러 가지 사업을 계획 중이었기 때문에 문구의 내용이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수혁의 마음을 읽은 어플이 도움말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본 프로그램은 국제제품박람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 귀인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퀘스트는 기업 운영에 도움을 주는 것이기에 스텟 보상은 따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수행할 시에 사용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어떤 비전인지를 떠나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해당되는 인물과 인연을 맺는 즉시 따로 알람이 뜰 예정이라 퀘스트 진행을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이거 참 편리한 기능이군. 알겠어, 수락할게.’
어플의 말을 들어 손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혁은 큰 고민 없이 확인 버튼을 눌렀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이만 자자.’
밤이 깊어 시계는 어느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혁은 어플을 종료한 뒤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1월이 지나고, 2월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SH도 해외시장에 홍보도 하고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어련히 잘하시겠지요. 바쁘실 텐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혁은 지오쇼핑 사무실에서 현명길 회장과 전화를 하다 막 끊은 참이었다.
‘확실히 배포가 크신 분이시군. 나중에 뵙게 되면 잘 챙겨 드려야겠어.’
현명길 회장은 고심 끝에, 수혁에게 발표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SH가 공을 가로챈다며 주변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는 제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수혁이라는 설명에 공감하며 모두를 설득시켰다.
“들어오세요.”
수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박유신 사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네, 아부다비 센터에서 Z1에 대한 설명을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Z1이면…… 설마 이번에 WG에서 출시하는 핸드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야기를 들은 유신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습니다. 내부에서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현 회장님이 통 큰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
“몇 년 동안 공들인 핵심 상품이 처음 공개되는 자리라 언론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셨네요.”
현명길 회장의 행동에 감명을 받은 유신은 크게 감탄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Z1을 소개하는 자리에 우리 SH를 언급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아냈습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훗, 이젠 우리 SH도 국내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신의 놀란 반응을 본 수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면 나중에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박람회에 우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따로 소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신세 진 것을 따지자면 WG는 제 앞에서 할 말이 많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던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이미 접수 기간이 끝난 터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 임직원 중에 이런 박람회가 있는지 알고 계신 분이 없지 않습니까?”
“일송이나 WG는 수십 년 전부터 해외 수출을 활발히 한 덕에 정보가 많지만 우리는 그에 비해 경험이 많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수혁이 회사 내에 국제적인 교류 모임에 관해 잘 아는 직원이 없다는 걸 지적하자, 유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국제무대에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됐으니 이걸로 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니까요.”
고민에 빠져 있던 유신은 수혁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님, 김용민 본부장님이나 최필재 팀장님께 연락을 넣어서, 내일 중으로 스마트 폰과 소프트웨어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저에게 보내 달라고 하세요.”
“소프트웨어야 우리 회사가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스마트 폰은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최필재 팀장님께서 수시로 WG전자 임직원들과 접촉을 했던 거로 압니다. 그 과정 중에 공유된 내용이 적지 않을 테니 한번 알아보세요.”
수혁은 필재가 소프트웨어가 기기 내에서 원활히 작동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WG 관계자들과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요?”
“판교에 짓고 있는 그룹 본사가 3월 중에 완공될 것 같다고 합니다.”
원래는 SH커뮤니케이션 본사로 활용하기로 했던 건물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그룹의 여건을 고려해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자회사들은 입주할 수 있게 조치해 놓았다. 이 외에도 세미나실, 그룹 회의실 등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구비하여 그룹 본사로 쓰기에 손색이 없었다.
“며칠 전에 판교로 가서 살펴봤는데, 주변 회사 건물들에 비해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가장 화려해 보였습니다.”
“본사는 회사의 얼굴인데 당연히 다른 회사들보다 멋져야지요. 그나저나 첫 삽을 뜬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된 본사 없이 임대하거나 매입한 건물을 썼던 수혁은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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