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중국문화연구재단의 왕첸 이사장님이라고 계시는데, 그분으로부터 SH의 중국 진출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왕첸이라면 중국의 현 주석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 아닙니까?”
수혁의 이야기에 한정길 사장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사장님을 아십니까?”
“왕첸 이사장이 제가 아는 사람이 맞다면 몇 년 전까지 정치국 상무위원을 했었을 겁니다.”
“상무위원이면 직위가 꽤 높은 거 아닙니까?”
“상무위원을 했다는 것은 그냥 높은 정도가 아니라 수천만에 달하는 공산당 인원 중에 일곱 손가락 안에 드는 서열에 위치했다는 뜻입니다. 대표님께선 워낙 예전이라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매스컴에도 제법 소개가 되었던 분이십니다.”
정길은 두말할 것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무위원이 그 정도로 높은 직위인 줄은 몰랐습니다. 어쨌든 우리 회사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대표님께서 인복이 있으신 거지요.”
“여러분들을 만난 걸 보면 인복이 제법 있는 것 같긴 하네요.”
“하하, 저희야말로 대표님을 만난 게 행운이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혁의 덕담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현재 중국 시장은 일본에 비해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5년 안에 10배 이상 커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중국의 경제 규모가 곧 일본을 추월한다는 뜻입니까?”
박유신 사장은 수혁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여겼다.
2003년 당시 일본의 GDP는 미국에 이어 2위였고, 중국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일본을 추월하는 것은 기본이고, 미국의 아성을 위협할 유일한 국가가 될 겁니다. GDP라든지 주요 경제 통계 면에서는 미국을 따라잡기 어렵겠지만, 구매력만큼은 세계 최고가 될 겁니다.”
“구매력은 곧 소비와 연결되는 것이니, 한마디로 말해서 마켓 파워만큼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시네요.”
“1인당 소득은 선진국에 비해 낮지만,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거지요. 아무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중국은 일본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수익이 날 수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중국에 파견 나갈 임원은 신중하게 뽑아야겠군요.”
“신중할 게 뭐 있습니까? 기존 임직원들 중에서 중국 사정에 밝은 분들을 뽑으면 될 문제이지요.”
유신은 나름대로 수혁의 마음을 헤아리는 발언을 했지만, 정작 그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무슨 생각이신 거지?’
옆에서 듣던 박찬명 사장은 의아해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총괄로 한정길 사장님이 가시는데, 중국은 조금 소홀히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법인을 총괄하실 분은 이미 내정되어 있습니다. 단지 이번에 취임할 분에게 SH의 경영시스템을 알려 주고, 국내 법인과의 원활한 소통을 도와줄 인력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벌써 내정을 완료하셨다니 우리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어떤 분인지 무척 궁금하군요.”
임원들은 수혁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차분히 기다렸다.
“중국 법인을 총괄해 주실 분은 왕첸 이사장님의 둘째 아들인 왕진량 씨입니다. 그리고 전 왕씨 집안에 45퍼센트의 지분을 제공하기로 했고요.”
“아, 그렇군요......”
“…….”
수혁의 발언을 들은 임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침묵만 지켰다. ANA에서 중국 진출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대주기로 한 상황에서 너무나 큰 양보를 한 대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흠,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다들 이렇게 조용히 있으시니 조금 민망하네요.”
“대표님, 중국은 여타 나라들과 달리 당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국가입니다.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 따라 기업이 흥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허물어지기도 하는 그런 곳이죠. 사장님께서 어련히 적합한 인물에게 총괄 자리를 맡겼겠지만 리스크가 크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임원들이 모두 조용히 있자, 박찬명 사장이 총대를 메고 수혁에게 직언을 했다.
“신임 주석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치 환경이 쉽게 변하겠습니까? 그리고 왕씨 집안 분들은 절대 배반을 하실 분들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뵙고 판단한 거니 믿어보세요.”
“저도 대표님께서 신임하신 분들을 함부로 매도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기업 운영의 전권을 왕진량 씨에게 맡긴 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본 진출 전략과 똑같은 맥락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지인들에게 자국의 자본이 많이 투여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서 거부감을 없애는 겁니다. 현재 중국엔 온라인 학습 서비스를 실시하는 회사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만약 우리가 시장 선점에 성공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경쟁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기겠지요.”
수혁의 반문에 찬명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비슷한 품질의 서비스라면 당연히 자국의 것을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언론이나 관료들도 한국보단 중국 기업에 더 호의적일 거고요.”
“어떤 취지로 말씀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소모적인 대화는 그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 제 말씀이 떠오를 때가 있을 겁니다.”
수혁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찬명을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박찬명 사장은 수혁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곧장 사과했다.
“아닙니다. 사업상의 중요한 결정은 여러분들과 충분히 논의한 뒤에 진행하는 것이 정석이나, 현지에서 급작스럽게 이야기가 오간 것이라 그럴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쯤 했으면 해명도 된 것 같으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시죠.”
수혁은 개의치 않고 회의를 계속 이어 갔다. 그는 계열사별로 중요한 사안들을 보고 받은 뒤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등 그룹 업무를 빠르게 처리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논의를 마친 수혁은 회의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대표님 말씀을 들어보니 어쩌면 2월 한 달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품 출시까지 한 달가량 남은 만큼 저희도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진 이 날, 임원들은 저마다의 각오를 밝혔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들은 극비 사안이니 모두들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출시 전까지는 팀장님과 저 외에는 다른 직원들이 스마트 폰에 대해서 알지 못하도록 함구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나온 이야기들이 절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김용민 본부장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자, 다른 임원들도 덩달아 호응했다.
“감사합니다. 각자 맡은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해 주시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겁니다. 자, 회의도 끝났는데 식당에 가서 점심이라도 드시죠.”
“괜찮은 중식당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5분 정도 거리이니 차를 놓고 걸어가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회사 의전을 도맡고 있는 박찬명 사장은 으레 그랬듯이 식당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일어들 나시죠.”
수혁이 몸을 일으켜 겉옷을 챙겨 입자 주변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잠시 후 근처 중식당에 도착한 일행들은 점심을 먹고 각자의 일터로 떠났다.
* * *
1월 말 어느 일요일, 수혁은 간만에 서초동 아파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학년 1학기면 졸업 요건을 모두 채우는데…… 군대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학교에 다닐 때는 입대 시기를 미룰 수 있으나 졸업을 한 뒤에 적절한 사유가 없으면 연기가 불가하기 때문에 수혁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년에 그리스에서 올림픽이 있는데 메달이라도 노려볼까? 어차피 사격이나 양궁은 도구 이용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금메달은 떼 놓은 당상이잖아?’
아이디어가 생각난 수혁은 컴퓨터를 켠 뒤 국가대표를 뽑기 위한 전국대회 일정과 병역 특례 조항에 대해 살펴봤다.
‘휴, 그냥 포기하자. 괜히 귀찮기만 하겠어. 그리고 나 때문에 올림픽만 바라보고 있었을 선수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되기도 하고.’
조항을 읽은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껐다. 스포츠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병역 혜택을 받게 되면 군대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체육 요원이 됐는데, 그리되면 해당 요원은 병무청장이 정한 분야에 의무적으로 34개월 동안 복무해야 했다.
한창 군대에 관한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응?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시지?’
밤은 깊어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WG전자의 황정명 부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 부회장님.”
“대표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좋은 일이라도 있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명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스마트 폰 개발이 완료되고 출시만 남은 상황이라 임원들과 수시로 만나 철저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무 생각 없이 연락을 드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늦은 줄도 몰랐네요.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정명은 급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으셔서 연락을 하셨겠지요.”
“맞습니다. 작년 8월에 정부에서 무선 인터넷 사업을 허가해 줬는데, 출시 전까지 인프라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사업이 성공하려면 국내 시장으론 부족한데 다른 나라들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수혁은 스마트 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환경이 구축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무선 인터넷망을 구축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선진국에서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 다행입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빛을 발하기 어려우니까요.”
이전부터 인프라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수혁이었기에, 황정명 부회장의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좋은 소식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아랍에미리트에 있는 아부다비센터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세계 경제포럼이나 국제 규모의 박람회가 개최되는 장소로 알고 있습니다.”
수혁은 경제 잡지에서 아부다비센터가 여러 차례 거론됐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랍에미리트는 일곱 개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부다비는 유일한 산유국으로 경제면에선 두바이보다 기여하는 바가 훨씬 컸다.
“맞습니다. 그리고 매년 초에는 전 세계의 기업들이 신제품을 발표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 말씀은……?”
“WG와 SH가 공동 개발한 스마트 폰이 아부다비센터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국내에서 발표하는 것보다 메리트가 훨씬 큰 모양인가 보군요?”
수혁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정명의 목소리를 듣고 추측했다.
“혁신적인 제품에 목말라하는 전 세계의 기자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라 파급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됩니다. 게다가 몇몇 방송사들은 생중계를 하기 때문에 고객들의 이목을 금방 사로잡을 수도 있고요.”
“부회장님께서 왜 그렇게 기뻐하시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예상보다 큰 무대에서 제품이 공개된다는 것을 깨달은 수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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