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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34화 (234/316)

234화

“분명, 저에게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얻기 위해서 온 거겠지요. 참 씁쓸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순수한 인간관계는 점점 맺기 어려워지니까요.”

“일단, 김정우 회장의 손님이니 적당하게 대접해 주고 돌려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진량은 왕첸 이사장과 이용 집사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했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좀 전의 호의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군.’

질문을 받은 수혁은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타국의 손님이 단순히 친분을 쌓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겠지요. 상식적으로, 단순히 친구가 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까지 왔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하지만 이사장님께서는 대표님이 모종의 의도를 갖고 오셨다는 걸 다 알고 계시니 조용히 있다가 가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모종의 의도요?”

진량의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황당해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사장님께선 공과 사가 철저하신 분이십니다. 현재는 대표님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깊으나 한순간에 마음에 바뀌실 수 있기 때문에 염려돼서 드린 말씀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의 기분이 상한 것을 감지한 진량은 급하게 그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거나 혈육이 아닌 이상 조건 없는 관계를 맺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진량 씨는 이 상황에서 제가 친구나 사귀러 왔다는 거짓말을 하길 바라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이진량은 수혁의 말에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라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만약 이사장님께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흠,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대충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제 답변이 충분했다면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이군요.”

“네?”

수혁의 말에 진량은 당혹스러워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저도 진량 씨의 물음에 답했으니 공평하게 질문 하나 드린다는 건데요?”

“대표님께서 굳이 대답하시지 않으셨어도 계속 캐묻지는 않았을 겁니다.”

“전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질문에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방어적으로 나오시니 마음이 아프군요.”

수혁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많이 겪어 보진 않았지만, 기본적인 심성이 곧고 선하신 분이야. 미안하긴 하지만 조금 더 밀어붙여야겠어.’

“사실 불편하시다면 답변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사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몰입하는 모습이 보이셔서 궁금했던 것뿐입니다.”

“이사장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저를 보살펴 주신 것이 생각나 필요 이상으로 과민반응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진량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은혜를 입었으니 지켜드리고 싶었던 게지요. 하지만 여전히 답변이 충분하진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왕웨이 회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순간적으로 안색이 어두워졌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연이라도 있을까요?”

수혁은 행여나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해서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음…….”

“저는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진량 씨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여쭈었을 뿐입니다. 민감한 사안이라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송하지만 술을 한잔해도 되겠습니까?”

“아, 어디 있는지 말씀만 해주세요. 안 그래도 화장실을 가려고 했는데 나가는 김에 술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진량은 손님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만류하려고 했지만, 수혁은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

잠시 후, 수혁은 양손에 술과 안줏거리를 들고 돌아왔다.

“술과 간단한 안주 좀 가지고 왔습니다.”

“무심결에 한 말일 뿐인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이 답답할 땐 술 한 잔보다 좋은 것도 드물지요. 저도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땐 가끔 마시곤 한답니다. 자, 받으시죠.”

“고맙습니다.”

진량은 수혁이 술병을 들이대자 공손히 잔을 들어 받았다.

“부엌에서 일하는 분께 말씀을 드린 뒤 잠깐 정원을 구경했는데, 경치가 아주 끝내주더군요.”

“마침 대표님께서 운이 좋으셨습니다. 이곳의 풍경은 마을뿐만 아니라 베이징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인데, 특히 눈이 내리고 나면 아름다움이 배가되곤 하죠.”

“정말 그러네요. 이렇게 휘날리는 눈발을 보며 술을 한잔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습니다.”

수혁은 창밖을 보며 진량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깊은 대화는 피했는데 이는 대답을 강제하기보단 자발적으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 * *

‘슬슬 취기가 오르시는 것 같은데 적당할 때 한번 떠봐야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시다 보니,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수혁은 2시간 남짓 동안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며 진량의 경계심을 어느 정도 허물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후,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이런 날도 오네요.”

진량은 매일 왕첸을 수행하느라 오랜 기간 여흥을 즐길 틈을 갖지 못했는데, 수혁과 함께 있으면서 술을 마시게 되자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 수 있었다.

“배려라니요, 저야말로 해외 경험이 부족한 탓에 약간 긴장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진량 씨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마음이 참 편합니다.”

“하하, 만 리 밖에서 온 손님과 이런 자리를 갖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조금 이따 이사장님을 뵙게 되면 진량 씨가 잘 챙겨 주셨다고 꼭 전해야겠습니다.”

수혁은 은근슬쩍 왕첸에 대한 언급을 하며 그의 반응을 살펴봤다.

“음, 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고맙죠.”

“이런…… 제가 실언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진량의 시무룩한 얼굴을 본 수혁은 손을 저으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후, 그게 아니라…… 제 나이가 벌써 34인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웅크리고 지내야 하는지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이사장님을 수행하느라 꿈을 펼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하긴, 아버님인 이용 집사님도 계시니 눈치가 보이시겠습니다.”

수혁은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른 진량의 속을 한번 떠봤다.

“세간엔 집사님이 저희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진짜 아버지는 왕첸 이사장님이고, 그분의 아들인 왕웨이는 배다른 형제입니다.”

보통 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진량이었지만, 술자리가 무르익어 마음이 풀어졌고 잔뜩 취한 상태여서 속내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특별한 관계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부자지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는 5살 때까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왔습니다. 어머니는 누구의 아이인지 숨긴 채 시골에서 힘들게 절 키우시다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아갔지요…….”

고삐가 풀린 이진량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내력을 쭉 읊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아버지와 형 뒤에서 그림자처럼 살았구나…….’

수혁은 그동안 쌓인 서러움을 토해내는 진량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왕첸은 두 명 이상의 자녀를 둘 수 없다는 당의 규정을 고려해 아들을 이용 집사의 자식으로 호적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겐 매달 위로금을 보내준다는 조건과 1년에 한 번 진량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조건으로 모자 사이를 갈라놓았다.

“당 간부들 중 둘 이상의 자녀를 낳은 사람들이 제법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당의 초창기 멤버들이나 해당하는 이야기지, 아버지 세대 때만 해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제어하기 위한 규제가 상당히 강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평소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깨끗한 이미지를 자랑하는 아버지 입장에서 저의 존재를 공개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고요.”

진량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같은 아들인데 누구는 잘나가는 CEO고 누구는 거짓 신분으로 조용히 살아야 하다니....... 기가 막히는 사연입니다.”

“형은 매사 저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수시로 챙겨 주고 아껴 줬기 때문에 질투심이 생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 안에서 울화가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수혁의 말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오늘 이렇게 된 거 술이나 마시면서 답답한 마음을 모두 털도록 하죠.”

“네, 좋습니다. 제가 술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이후에도 한 시간가량 술을 마시며 진량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왕씨 집안의 비밀을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같은 자식인데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참 딱한 사람이야…….’

비록 처음 본 사이이지만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진량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만 여기서 쉬고 계세요.”

“아닙니다. 가서 아버지를 도와드려야 하는데…….”

진량은 장시간의 음주로 인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수혁은 이런 그를 침대로 옮겨 휴식을 취하게 했다.

“이사장님께는 제가 알아서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마음 편히 주무세요.”

“…….”

* * *

‘완전히 골아떨어졌군. 이제 슬슬 나가 볼까?’

수혁은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40분, 이용은 연회 준비를 위해 일찍 온 마을 사람들과 연회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테이블은 이쪽에 옮기시고 공연을 할 인원들은 저쪽 방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러두었습니다. 아, 맞다. 어르신, 손님이 앉을 자리는 어디로 하면 좋을까요? 마을 사람들이야 아무 데나 앉으면 되지만 이사장님께서 손수 초대하신 귀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사장님 바로 옆으로 배석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민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준비에 몰두했다.

“집사님, 안녕하십니까?”

“조금 더 쉬셔도 되는데 벌써 나오셨습니까?”

수혁은 이용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진량이와 약주를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술과 안주가 어찌나 맛있는지 시간 가는 것도 잊을 정도였습니다.”

“진량이도 아마 무척 즐거웠을 겁니다. 업무 성격상 본인보다 어른들을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대표님처럼 젊은 사람과 술 한잔하는 것은 오랜만이었을 겁니다.

이용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진량 씨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진량이는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게…….”

수혁은 순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23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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