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비록 우리가 녹화 영상 촬영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협회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개인 방송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넘어 언론의 역할까지 대신하려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도 일견 들었습니다.”
수혁은 차분한 어조로 임학규 협회장의 비위를 맞추는 데 집중했다.
“대표님께서 잘못한 게 뭐 있겠습니까? 그저 현실 권력 앞에선 누구나 몸을 사리는 법이지요. 하지만 마냥 SH가 모든 걸 짊어지는 형태로 마무리되지 않게 방안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협회장도 조금 전과 달리 공손한 말투로 수혁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아닙니다. 큰 용단을 내려 주셨는데, 이쪽에서도 성의를 보여야지요. 얼마 있지 않아 언론인들을 위한 모임이 열리는데 그곳에는 언론계의 원로들뿐만 아니라 언론사 사주들도 참석합니다. 만약 거기에서까지 대표님을 음해하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건 제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막아 보겠습니다.”
그는 언론과 기업 간의 분쟁으로까지 격화될 수 있는 사안이 수월하게 풀릴 듯이 보이자, 기꺼이 수혁을 돕겠다고 나섰다.
“협회와 언론인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고 계신 거로 아는데 괜히 저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허허, 그럼 뭘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이거 그냥 입 싹 닦고 선의만 받아가기에는 양심이 찔려서 말이지요.”
수혁의 배려에 학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질문했다.
“사실, 협회장님께 긴밀히 부탁드리고 싶었던 게 있긴 했습니다.”
“뭡니까? 말씀해 보세요.”
“이왕 성명서를 발표할 거라면 대중들이 모두 알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언론사는 물론 방송도 타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애써 사과를 드리고 회사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는 데 여건이 좋지 않네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사주들에게 연락을 돌려 참여할 수 있게 독려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참 의외입니다.”
수혁의 말이 끝나자, 그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하, 거창한 부탁이라도 할 거라고 예상하셨나 보네요.”
“그런 것도 있지만,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상황에는 보통 주눅이 들거나 기자들에 대해 혐오감을 갖기 마련인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나시려는 모습이 신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사업이 잘되려면 언론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수혁은 적당한 선에서 임학규의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 갔다.
“협회장님이 지원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신 덕분에 마음이 든든하네요.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시다시피 만평일보가 가진 영향력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장동주 대표께서 협회를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크흠. 장동주 대표는 저와 막역한 사이입니다. 제가 비록 장 대표의 조언을 가끔 듣기는 하나, 소신이 흔들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협회장의 권위를 약간 무시하는 발언을 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임학규의 언성이 높아졌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전 단지 내부에서 반발하는 자가 생길까 염려돼서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괜히 협회장님께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요.”
“대표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협회장 자리를 6년 동안 역임하면서 직원 관리는 잘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이사를 선정할 때 있어서 사주들의 의견을 받기도 했지만, 최종 승인은 언제나 제가 내렸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한언론인협회는 국가의 감독을 받지 않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협회장의 권한이 그만큼 막강했다. 따라서 임학규의 발언은 마냥 허세로 보기 힘들었다.
“그럼 금일부터 성명서 작성 작업에 바로 들어갈 예정인데, 과정 중에 협회로부터 압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제가 책임을 질 테니까 안심하고 진행하세요.”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작업이 끝나고 세부적인 일정이 잡히면 협회 측에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세부 일정은 우리와 함께 조율하는 거로 하죠. 예민한 시기에는 발 한 번도 조심히 떼야하는 법입니다.”
학규는 일방적인 일정 통보가 언론사의 반발을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용건을 마친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대표님, 성명서라니요,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을의 입장이라곤 하지만 너무 저자세로 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통화를 듣던 용민은 못마땅한지 볼멘소리를 내었다.
“일단은 저들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이득을 취해야지요.”
“그 말씀은 성명서를 발표하라는 요구를 의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거군요.”
수혁의 이야기를 들은 용민은 금세 표정이 풀렸다.
“당연하죠. 언론사들이 원하는 대로 휘둘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것보다 예전에 말씀드렸던 건 기억하십니까?”
“네, 지오라이브 베타 서버를 경우에 따라서는 닫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이 곧 올 것 같으니, 미리 대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지오라이브에서는 유의미한 수익이 창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리하는 데 큰 비용이 들진 않을 것 같습니다.”
용민은 지오라이브가 대박 날 조짐이 보여 서운한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이트를 무료로 개방해 놓았기에 정리하는 데 큰 부담은 없었다.
“애써 만든 걸 없앤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제 말을 따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전 먼저 사무실로 가 보겠습니다.”
“굳이 지오쇼핑 사옥으로 가지 마시고 대표실에서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제 물건들이 다 그쪽에 있어서요.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가볍게 맥주나 한잔하죠.”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용민을 바라봤다.
“훗, 좋습니다. 저도 그럼 폐쇄 날짜를 잡고 고객들에게 어떻게 공지할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대화를 마친 이들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어느덧 10월이 지나 11월이 되었다. 시내 곳곳에 심어진 가로수들은 점점 단풍이 들어갔고, 사람들은 청량한 가을 공기를 마시기 위해 연인 혹은 가족들과 활발히 거리를 돌아다녔다.
‘벌써 11월이다. 올 한해는 어떻게 지나갔을지 모를 정도로 사건의 연속이었어.’
수혁은 성명서 발표를 위해 대한언론인 협회에서 정해 준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대표님, 잠시 후면 도착입니다.”
이날도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찬명이 수행을 자처하고 나섰다.
“저곳이 협회장님이 말한 호텔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수혁과 찬명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밀레니엄 호텔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표님, 여기서 계속 기다릴까요, 아니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로비 앞으로 차를 댈까요?”
주차를 마친 운전기사는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에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계세요. 성명서 발표 후 기자들과 간단히 대담만 할 예정이라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네, 대표님.”
“우리는 이만 들어가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차에서 내린 수혁은 찬명과 함께 호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명서를 발표하는 자리라기보단, 지난 기자회견 자리와 더 유사한 것 같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규모가 훨씬 크다는 점이겠지요?”
호텔 지하로 내려온 수혁과 찬명은 취재하러 온 수많은 기자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협회장에겐 조금 미안한걸? 내가 준비한 성명서를 듣게 되면 적지 않게 실망할 테니까 말이야.’
수혁은 무대 위에 마련된 단상과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기자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송국 기자들도 온 걸 보면, 방송에도 나갈 건가 봅니다. 솔직히 국민들 사이에서 화제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이슈가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찬명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수혁에게 다가왔다.
“강수혁 대표님 맞으시죠?”
“아, 협회장님이시군요.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는 통화로만 인사를 드려 아쉬웠는데 이렇게 얼굴을 뵙게 돼서 기분이 좋습니다.”
수혁은 임학규 협회장에게 꾸벅 인사한 뒤 덕담을 건넸다.
“허허, 처음 뵙는 건데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목소리가 딱 협회장님이시더라고요. 저, 그리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명서 발표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왕 지원해 주기로 한 거 화끈하게 해 줘야지요.”
임학규는 수혁과의 통화 이후 여러 언론사에 연락을 돌렸고, 호텔 지하 홀까지 대관했다. 물론 호텔 지하를 대관한 비용은 SH에서 보전해 주기로 했지만, 지난 기자회견 때보다 훨씬 큰 규모의 취재진을 부를 수 있었던 건 협회장의 조력 덕분이었다.
“성명발표 후 기자님들과 대담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별문제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론사들에 대표님께서 사과 성명을 낼 거라고 알려 주니, 다들 흔쾌히 참석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협회장이 사과 성명을 운운하자 수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SH스터디의 박찬명 사장입니다.”
“안 그래도 옆에 계신 분이 누군지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반갑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찬명이 정중히 인사하자 협회장은 악수를 청하며 화답했다.
“협회장님, 방금 살펴보니 방송국에서도 사람이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맞습니다. 공중파 방송의 경우에는 9시 밤 뉴스에 짤막하게 나갈 예정이지만 몇몇 케이블 채널에서는 실시간으로 중계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실시간 중계라는 말에 수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청률로 따지면 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케이블 채널이라 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청률을 떠나서 중계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저희에겐 차고 넘칩니다.”
임학규는 손을 저으며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수혁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나 국회의원, 혹은 유명 연예인의 기자회견 때도 실시간 중계가 거의 없는 것을 고려하면 수혁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대표님, 발표까지 20분 남았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본의 아니게 방해한 꼴이 됐군요. 발표가 마무리되면 그때 잠깐 보는 거로 하지요.”
찬명의 보고를 들은 학규는 자리를 비켜 주려 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협회장님을 뵈니 긴장도 풀리고 좋았습니다.”
“말씀이라도 감사하네요.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협회장은 무대 맨 앞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수혁은 찬명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판은 만들어졌으니, 나만 잘하면 돼.’
대기실에 도착한 수혁은 정성껏 작성한 성명서를 읽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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