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이른 아침, 회사에 일찍 출근한 수혁은 유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표님, 예상하신 대로 만평일보에서 우리를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뻔하죠.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대중들을 선동하는 겁니다. 디지털 데일리 측은 아직 연락이 없나요?”
수혁은 ‘신생 언론사와 SH 그룹의 수상한 결탁’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읽으며 물었다. 조민수 편집장은 SH의 자본으로 설립된 언론사가 기자회견 참석 명단에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기자가 갖춰야 할 소양에 상상력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정도껏 쓰면 심각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텐데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요.”
“그렇습니다. 기사의 내용을 보니 저희가 제공한 자료에 대한 반박은 없고 죄다 찌라시 같은 내용뿐입니다. 이혜선 사장님이 행여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수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유신의 말에 대답했다. 기사에는 혜선과 그의 관계를 왜곡되게 묘사하여, 대형 포털 회사가 특정 언론사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이런 일로 마음이 흔들릴 분으로는 안 보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대한언론인 협회에서 우리 회사와 언론사 간의 다툼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서신이 하나 왔습니다.”
“갑자기요?”
“제가 잠깐 내용을 살펴봤는데 우리 측의 주장이 억측일 시에는 언론사를 비방한 행위로 간주하고 묵과하지 않겠다더군요.”
“협회라는 데가 할 일도 없나 봅니다.”
유신의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언제쯤 영상을 공개할 생각이십니까? 대표님께 오기 전에 잠깐 티비를 봤는데 공중파고 케이블이고 간에 우리와 관련된 뉴스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데일리 기자에게 금일 오후 1시에 영상을 공개해 달라고 부탁하세요.”
“저…… 이혜선 사장님께서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보고 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흠, 비밀로 했을 때는 이유가 있겠지요. 마음이 편치 않으시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혁은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는 유신의 모습에 강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억지로 답변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아시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사장님과 영상 공개 사안을 두고 대화를 나누다가 대한언론인협회에서 기자님께 압력을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신은 회사를 위해 대신 나서준 기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데, 때마침 수혁이 그를 언급하자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떤 것을 근거로 압력을 넣는다는 거죠? 세상 어디에 기자의 개인 방송을 막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장님께 여쭤보니, 언론인 협회의 한 관계자가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 협박했다고 합니다. 비록 현재 관련 규정이 없지만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이사회를 열어 관련 규정을 신설한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오만불손한 자로군요. 협회가 뭐라고 개인의 자유 활동을 제한한다는 말입니까?”
수혁은 얼굴을 붉히며 불쾌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회귀하기 전에도 언론사 관계자들이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개인 방송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는데…… 언론사와 재벌이 힘을 합치니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야.’
그는 협회 규정을 새로 만들면서까지 본인들의 뜻을 관철하려는 만평일보와 일송에 혀를 내둘렀다.
“다행인 것은 기자님께서 워낙 의지가 굳건하다는 점입니다. 저들의 협박에 오히려 크게 분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돕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진실을 왜곡하려는 저들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후, 괜히 우리 일로 피해를 보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신은 한숨을 쉬며 기자에 대한 우려의 마음을 표현했다.
“기자님은 물론이고 디지털 데일리에 어떤 피해도 가지 않도록 조치할 테니 안심하세요.”
“생각보다 거센 공격에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나약해져 포기하는 것을 바랄 테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수혁과 유신은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지며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기자님께 관계자라는 사람으로부터 또 연락이 오면 녹음을 하라고 전해 주세요. 구체적인 방안은 제가 좀 더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영상이 공개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파장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임원들에게 지시 사안을 잘 전달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이들은 문제가 생길 법한 부분에 관해서 진지하게 논의를 이어 갔다.
* * *
“오늘 한 시에 또 방송이 있다는데?”
“나도 봤어. 점심 먹고 바로 접속해 보려고.”
“누구 말이 옳을까? 난 왠지 언론사들이 짜고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끝까지 보고 판단해야지.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돼.”
각종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탓에 기자의 개인 방송은 역설적으로 더 큰 화제가 되었고, 사람들은 방송을 보기 위해 사방에서 접속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수혁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동시 접속자 수가 30만 명을 넘었습니다.”
“본부장님, 서버가 다운될 일은 없겠죠?”
“네, 방송 공개에 맞춰 대대적으로 서버를 점검하고 트래픽을 확충해 두었습니다.”
용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질문에 답했다.
“회사 차원에서 방송이 최대한 노출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마세요. 어제는 예고편에 불과하고 오늘이 진짜니까요.”
수혁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방송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방송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디지털 데일리의 이도균 기자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어제 방송으로 인해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는데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영상을 하나 공개하려고 합니다.”
‘언론의 힘이란 게 정말 대단하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오후 1시가 되자 방송은 시작되었고, 수혁은 채팅창에 쏟아지는 수많은 비난 글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기자님이 영상을 트셨습니다.”
“본부장님은 펀 갤러리를 비롯한 지오닷컴 커뮤니티에 기자회견과 관련된 글들이 올라오면 쓸 만한 걸 골라서 메인에 올려 주세요.”
“넵, 대표님.”
지시를 받은 용민은 모니터링을 하러 자리를 떴다.
‘본격적인 승부는 지금부터야. 이정수, 네놈 뜻대로 흘러갈 일은 없을 거다.’
수혁은 입을 꽉 다문 채 차분히 상황을 지켜봤다.
* * *
“하, 잘 처리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왜 이렇게 일 처리를 미숙하게 하는 거야? 어쩐지 불안하다 했어. 믿었던 내가 한심하다, 한심해.”
정수는 형욱을 향해 거친 말을 쏟아냈다. 이도균 기자가 영상을 튼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들 사이에서 만평일보가 거짓 기사를 썼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고 그 탓에 급하게 만남이 이루어졌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애당초 SH는 우리랑 상관도 없는 회사였어. 가족이라고 기껏 나서 줬더니 그따위 소리나 해?”
“하…… 일단 알겠어.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니까 진정하고 대책을 세워 보자. 후속 기사로 생각해 둔 건 있어?”
“야, 우리가 거짓말했다는 영상이 퍼지고 있는데 무슨 후속 기사 타령이야? 네놈 말 들었다가 우리 회사가 피해 보게 생겼는데 넌 왜 이렇게 뻔뻔하냐?”
이미 기분이 상한 형욱은 정수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정수는 적반하장 식으로 대꾸했다./
“말은 바로 하자. 부탁을 한 건 맞지만, 일은 형이 알아서 진행한 거잖아.”
“끝까지 그딴 식으로 말한다 이거지? 안 그래도 조금 이따 이번 건으로 아버지 뵈러 가야 되는데, 네놈이 부탁한 거라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참 궁금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우리끼리 이러지 말자.”
협박 아닌 협박에 정수는 마지못해 사과했다.
“앞으로 말조심해. 아무튼, 협회 내 윤리위원회를 열어서 새로운 규정을 만들려고 시도해 봤는데, 그렇게 하려면 원로분들을 설득해야 해서 아버지의 힘이 필요해.”
“흠, 내가 이모부한테 말씀드려 볼까?”
“내가 아는 사람이 디지털 데일리 기자하고 접촉하고 있다니까 반응을 먼저 기다려 보자. 아버지를 만나는 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형욱이 말하는 자는 어젯밤에 기자에게 연락을 건 협회 관계자를 말하는 거였다.
“그럼 당장은 어떻게 대응할 거야? 지금이야 우리가 방송국을 틀어막고 있다지만, 여론이 거세지면 뉴스에 나올 수도 있어.”
“우선은 조금 지켜보자. 불리할 땐 가만히 있으면서 대중들이 잊기를 기다려야 해. 다행히도 각 공중파 국장들이 우리 아버지의 친우들이라 만평일보에 부정적인 뉴스들이 보도되지 않는 거야.”
“답답하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나만큼 답답하겠냐? 난 이 일로 아버지께 혼나게 생겼는데.”
정수와 형욱은 수혁의 반격에 제대로 된 방안은 찾지 못한 채 그저 머리만 끙끙 싸맬 뿐이었다.
* * *
“반갑습니다. SH 그룹의 대표 강수혁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도균 기자입니다.”
녹화 영상이 모두 나간 뒤에도 도균은 한동안 시청자들과 소통하며 상황 설명 및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고, 방송이 끝날 때쯤이 되자 수혁은 그를 격려하기 위해 디지털 데일리 사무실로 찾아온 상황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신 것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사장님의 지시를 받았을 땐 의아했던 적도 있었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우리나라의 언론이 얼마나 썩어빠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끝까지 맡겨 주십쇼.”
도균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박유신 사장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아, 안 그래도 오늘 오전에 대표님의 말씀 잘 전달받았습니다.”
“또 전화가 오진 않았던가요?”
수혁은 협회 직원이 또 접촉을 시도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녹화 영상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화가 계속 오더라고요. 처음 두세 번은 무시했지만 대표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대표님의 말씀처럼 녹음을 켜 놓고 받았습니다.”
기자회견 영상은 1시간 30분 정도의 분량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전화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빨리 영상을 내리라며 애걸복걸하더군요. 협박도 했다가 회유도 했다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쯧쯧.”
도균은 혀를 차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저, 그러면…….”
“녹음이 잘됐는지 궁금하신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자와 나눈 모든 대화를 제 메일에 보내 두었습니다.”
수혁의 마음을 읽은 도균은 그의 궁금증을 단숨에 해소시켜 주었다.
“괜찮으시다면 녹음 내용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장시간의 방송으로 오랫동안 앉아 있던 도균은 화장실에 다녀온 뒤 파일을 다운받고 곧바로 실행했다.
‘이도균 기자라고 했나?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인데?’
진지한 자세로 녹음을 듣던 수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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