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편집장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꽤나 중요한 내용인가 봅니다. 한번 보도록 하죠.”
외출을 위해 입었던 외투를 다시 벗은 형욱은 정수와 함께 차분히 기다렸다.
“이틀 전부터 SH에듀케이션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개시했는데요. 이걸 보시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방 아시게 될 겁니다.”
민수는 컴퓨터를 조작하여 실시간 방송 사이트인 지오라이브에 접속했다.
“이것들은 뭡니까?”
“현재 지오라이브라고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사이트인데 SH에서 최근 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얄밉긴 하지만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인정해야겠군요.”
정수는 지오라이브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개개인이 방송한다는 컨셉인 것 같은데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요?”
“이걸 보시죠.”
형욱의 재촉에 민수는 사이트 가장 상단에 개설된 방송에 접속했다.
“디지털 데일리? 이런 언론사도 있었습니까?”
“나도 처음 들어 보는데? 보아하니 기자 같은데 품위 없이 개인 방송이나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정수의 물음에 형욱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사람이 기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잠시만 들어 보시죠.”
민수는 컴퓨터 볼륨을 키우며 말했다.
“……여길 보시면 주요 언론사들의 입장과 SH의 입장을 간단히 비교할 수 있는데요. 기사들을 먼저 살펴본 뒤 SH가 제작한 자료를 보면 이해하시기 편할 겁니다. 왜냐? SH에서 나온 정보들은 대부분 반박을 위한 것들이거든요.”
기자는 혜선이 미리 일러준 대로 방송 진행을 원활히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자기가 뭐라고 이따위 논평을 해.”
형욱과 정수는 기자의 방송을 보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놓고 편파적인 중계를 하고 있군.”
“방송 접속자 수가 3만 명이나 되잖아? 가만히 두면 우리한테 불리한 여론이 형성될 거야. 후, 형. 이놈들 이대로 두진 않을 거지?”
정수는 방송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우리가 여론인데 무슨 불리한 여론이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긴 하지만 개인의 일탈 행위일 뿐이야. 경거망동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보자.”
“당장 언론협회에 전화를 걸어서 방송을 중단시켜 줘. 중단이 어렵다면 회사 차원에서 항의를 하는 건 어떨까?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막아 달라는 명목으로 말이야.”
“정수야, SH 그룹에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우리가 말한다고 해서 말을 듣겠어? 그리고 아무리 협회라고 해도 사기업의 영리 행위는 막을 수 없어. 차라리 디지털 데일리에 압력을 넣는 건 가능하겠지.”
“그래, 형.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 보자고.”
“잠깐만 기다려 봐.”
논의를 마친 형욱은 핸드폰을 꺼내 대한언론인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만평일보의 장형욱 부사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형욱은 편집장과 정수가 보는 앞에서 일사천리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관계자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음, 기자가 개인 방송을 하는 행위에 대해 재재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어, 처리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그러네?”
“근거 규정이 없으면 협회장이랑 이사들이 즉석에서 만들면 되잖아. 차라리 이모부한테 직접 부탁드려 볼까?”
“아버지한테?”
정수는 만평일보의 사주인 장동주라면 언론인협회에서도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협회 이사들 중 상당수가 아버지 말을 듣긴 하지만 반대 세력도 존재해서 아버지가 개입하시면 일이 시끄러워질 거야.”
“설마 이모부께서 그런 놈들 하나 컨트롤하지 못할까?”
“그냥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않는 거로 하자. 가뜩이나 바쁘신데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장동주는 일송 그룹의 이경욱 회장 못지않게 자식을 엄하게 대했는데, 형욱은 자칫 아버지에게 무능한 자식처럼 비춰지는 것이 두려워 정수를 말리고 있는 거였다.
“보고드릴 사안을 모두 말씀드린 것 같은데…… 부사장님. 저는 이만 나가 볼까요?”
민수는 형욱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하세요.”
형욱은 정수와 편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터라 편집장을 집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정수야, 걱정하지 마라.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고 해도, 신문과 방송에서 불씨를 키워 주지 않으면 계속 관심 받는 건 어려워.”
“나도 강수혁이 결부된 일만 아니라면 이모부의 신세를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오늘 내로 기자들에게 대응 기사를 쓰라고 지시할게. 어차피 대중들이 알게 될 거, 우리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입도 뻥긋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형욱은 정수의 말을 끊고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알겠어, 일단 믿고 지켜볼게.”
“그래, 고맙다.”
정수는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를 쓰면 우리에게 더 불리한 거 아니야? 괜히 대중들의 관심만 키워서 역으로 공격당할 수도 있어.”
“개인 방송만 고려했을 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더 강력한 매체들이 있잖아. 저놈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대책을 세워 봤자 이 싸움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어.”
형욱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불안해하는 정수를 달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일단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 보자.”
“후, 그래 형.”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정수는 힘없이 대답했다.
* * *
“생각보다 방송을 잘하시는데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는 거라 예상보다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더라고요. 어제 하루 종일 저랑 대본도 짜고 철저히 준비했는데,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수혁과 혜선은 SH커뮤니케이션 본사 대표실에서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사기업 오너가 기획한 방송이라 속으로 찜찜하셨을 겁니다.”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만평일보와 언론사들의 행태에 본인 일처럼 분노하고 있더라고요. 지난 기자회견 때 오갔던 대화와 기사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며 방송에 열심히 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수혁은 기자가 행여 거부감을 느낄까 걱정했지만 혜선의 말을 들으니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용민 본부장 말에 따르면 동시 접속자 수가 10만 명을 돌파했고 누적 접속자 수는 훨씬 많다고 합니다.”
“인터넷 방송이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갖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사실, 이전에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방법이라 의심했었는데 조금 민망하네요. 앞으로는 대표님이 내린 결정에 대해선 토 달지 않으려고요.”
그녀는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수혁의 혜안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하하, 예전에도 제 말을 잘 따라 주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10만이 넘는 네티즌이 접속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요?”
인터넷 개인 방송이 활성화된 수혁의 전생에서도 이 정도 수치를 기록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언론들이 자충수를 둔 거지요. 본인들이 대중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어 놨는데, 기자회견에 있던 기자가 개인 방송을 하면 누군들 안 궁금하겠습니까?”
“그러게요. 말씀을 듣고 보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네요. 언론인협회나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언론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군요.”
언론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혜선이었기에, 이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무척 궁금했다.
“당연히 끝까지 발뺌하겠죠. 없던 일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자들인데 개인 방송쯤 틀었다고 겁낼 사람들이 아닙니다.”
“포털 사이트를 포함한 각종 매체를 통해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기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에겐 박유신 사장님의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에 공감했다.
“처음 계획을 짤 때 나름 신중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허점이 있었습니다.”
수혁의 처음 계획대로 녹화 영상을 먼저 올리면 언론사에 타격을 주는 것은 가능했으나 치명상까지 입히기는 어려웠다. 그러자 유신은 순서를 바꿔 개인 방송을 통해 이슈를 더 키운 다음 언론에서 거짓 기사를 쏟아내면 그때 기자회견 영상을 공개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애당초 대표님께서 화두를 던졌기 때문에 사장님도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실 수 있었던 거예요. 어쨌든 지금까진 우리가 예측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으니까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좋습니다. 아, 그전에 사장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만약, 영상이 공개된 후에도 이들이…….”
수혁과 혜선은 만평일보를 예의주시하며 향후 대처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갔다.
* * *
“학원을 바꿀까 봐요. 아무리 선생이 훌륭하고 서비스가 좋아면 뭐 해요?”
“맞아요. SH 소속 학원들이 그렇게 악덕 기업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대치동에 있는 한 카페에 학부모들이 모여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저도 학원을 바꾸려고 아이랑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희 아이 말로는 언론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SH가 강사들을 빼돌리고 영세학원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이 다 거짓이라는 증거가 있다고만 들었어요.”
“그렇게 중요한 소식인데 왜 전 못 들어 봤죠?”
“지오라이브라고 인터넷 방송 사이트가 있는데, 학생들이 사이에서 인기가 좋더라고요. 아마 거기서 소식을 접했을 수도 있어요.”
학부모들은 인터넷보다는 뉴스와 신문에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개인 방송에서 나오는 정보를 아직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0대를 비롯한 젊은 층들 사이에서는 만평일보가 언론을 조작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터라 기성세대들의 인식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김 기자, 이거밖에 못 해? 제목부터 바꾸고 다시 써 와.”
“네, 편집장님.”
만평일보의 편집장 조민수는 직원들을 닦달하며 기사를 뽑아내고 있었다.
“잘 하고 계십니까?”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는 사무실에 들어오는 장형욱에게 꾸벅 인사했다.
“기사 방향은 잘 정했습니까?”
“방금까지 디지털 데일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 그쪽 사장이 강수혁 대표와 친분이 깊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 명단을 살펴 봤는데 디지털 데일리에서 온 기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이 됐고요.”
“약간만 손을 보면 나쁘지 않은 스토리가 될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들은 형욱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후후,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만 기다려 주십쇼. 내일 중으로 부사장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이 확실히 처리되면 승진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민수는 고개를 조아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편집장님 덕분에 동생 앞에서 면이 서겠습니다. 아무튼 수고하세요.”
형욱은 민수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집무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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