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디지털 데일리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 주시면 김용민 본부장님께서 지원하여 우리의 입장을 대중들에게 잘 알리는 방향은 어떨까 한 번 고민해 보았습니다.”
유신은 국내 제일 포털을 운영하는 SH의 이점을 고려하여 대책을 세웠다.
“저도 박 사장님과 비슷한 아이디언데요. 한국대 경제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의 수가 종이 신문 구독자를 3년 이내에 따라잡는다고 합니다.”
“3년도 길게 본 거죠. 전 이르면 내년쯤이면 충분히 추월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박찬명의 의견에 수혁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스마트 폰이 출시되면 종이 신문을 읽는 사람의 수가 현격히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표님의 말씀처럼, 인터넷 신문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사이트를 운영할 권한이 있고요.”
“말씀 끊어서 죄송하지만, 우리에게 불리한 기사들은 메인 배너에서 내리고 유리한 기사들로 도배하자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수혁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정길을 바라봤다.
“사실…… 그렇습니다. 저쪽에서 치사하게 나오는데 우리라고 신사처럼 굴 필요가 있겠습니까?”
“상대에게 신사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지오닷컴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도가 많이 하락할 겁니다. 그리고 언론사에서는 먹잇감을 찾은 상어처럼 물어뜯기 시작할 거고요.”
“후…… 제가 마음이 급하다 보니, 생각이 짧았습니다.”
머쓱해진 정길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었다.
“아닙니다.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이외에 준비해 오신 의견이 더 있을까요?”
“대표님의 계획을 먼저 듣는 게 어떨까요?”
혜선은 미소를 지으며 수혁에게 말했다.
“제 생각도 중요하지만, 대표라는 직위로 인해 자칫 제 의견으로만 매몰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지금은 다 같이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그래도 대표님의 아이디어를 먼저 듣고 세부적인 계획을 짜는 게 훨씬 효율적일 거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감입니다.”
“그러는 편이 시간도 아끼고 훨씬 낫겠네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임원들은 저마다 긍정의 표시를 했다. 이는 그동안 수혁과 함께 일 하면서 쌓인 능력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저는 내일 오전까지는 상황을 좀 더 지켜봤으면 좋겠습니다. 기자들이 쓰는 거짓 기사들을 반박할 자료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러면, 내일 오후에 방송을 켤 것이라 예정하고 작업에 임하면 되겠습니까?”
용민은 수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기자회견 때와 같이 오후 2시에 녹화한 영상을 대중에게 공개합시다. 그전에 이혜선 사장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만평일보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을 비교 분석하는 방송을 하면 어떨까 하는데…….”
수혁은 무리한 부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음, 녹화 영상이 모두 송출되면 우리 직원에게 개인 방송을 맡기고 싶은 생각이시군요.”
혜선은 수혁의 의중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렇습니다. 기자라는 신분으로 얼굴을 노출하는 게 부담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는 것보단 훨씬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SH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안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잡음이 나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이야기하면 순순히 들어줄 겁니다.”
“타 언론사에서 나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미안하네요. 일이 잘 풀리면 추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이 있을 겁니다.”
“보상이라뇨. 기자의 본분은 진실을 파헤치고 이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주변의 압력에 의해 소신을 잃을 만한 사람이라면 애당초 채용하지 않았을 거고요.”
유통업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기억이 있는 수혁은 기자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혜선은 그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 인사는 일이 다 끝나면 받을게요. 방송을 위해 준비해 두신 거라도 있나요?”
방송 시작까지 채 하루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간 보도된 악의적인 기사들에 관한 요약본과 우리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이 회의가 끝나는 대로 바로 작업에 착수할게요.”
“그, 제가 주는 것들 외에도 자료들이 있으면 편할 대로 활용하셔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수혁은 기자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는데 이는 언론사보단 본인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일단 저의 계획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제 의견에서 보완할 점이나 수정할 점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 괜찮아 보이지만…… 대중들에게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평일보가 반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사안에 대해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는 한정길은 저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소를 제기해서 법적인 책임을 물거나 정정 보도를 요구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만평일보와 성동일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명예훼손으로 소를 제기해 승소한다 해도, 지금까지 나온 판례를 보면 소액의 보상만 간신히 받을 수 있을 뿐 큰 소득은 없을 겁니다. 정정 보도는 더더욱 기대할 수도 없고요.”
혜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심각한 얼굴로 내내 다른 이들의 대화를 듣던 유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묘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수혁은 평소에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유신이 능동적으로 나서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표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거짓 뉴스를 양산하는 언론에서 큰 실수를 범하길 기다렸다가 진실을 가진 우리가 반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얼른 말씀해 보세요.”
“대표님 방안을 살짝만 비튼 건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아이디어냐면…….”
유신은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열심히 설명했고,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진지한 자세로 경청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거라면 언론에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겠습니다.”
“언뜻 볼 땐 구성만 살짝 바꾼 거지만, 제가 내놓은 대책보다 훨씬 훌륭한 것 같습니다.”
수혁을 비롯한 임원들은 유신의 의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혜선 사장님 말씀처럼, 대표님의 생각을 먼저 듣고 나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더군요.”
“하하, 서로 머리를 맞댄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대책이 나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찬사에 유신은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공을 혜선에게 돌렸고 수혁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세부적인 계획이 모두 세워졌으니 다들 자리에 돌아가셔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 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김용민 본부장님의 역할이 작지 않으니 신경 좀 잘 써 주세요.”
“네, 대표님.”
회의를 마무리한 수혁은 혜선과 임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오쇼핑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간은 흘러 다음 날이 되었다. 만평일보를 포함한 몇몇 언론사들은 속보 형식으로 SH에 관한 기사를 엄청나게 쏟아냈고, 어젯밤 9시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큰 화제를 끌고 있었다.
“강남 유명학원 모 원장은 SH에듀케이션이 예전부터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주변 경쟁 학원을 전략적으로 견제했다며 경영상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학부모들 또한 한 회사에 모든 자원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를 학원에 집어넣기 위한 경쟁으로 스트레스가 극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신문과 뉴스에 실리는 내용들은 사실관계가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증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형, 이번에 큰 신세를 졌어. 내가 서운치 않게 챙겨 뒀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봐.”
“가족끼리 뭘 이런 걸 주고 그러냐? 아무튼 고맙다, 잘 쓸게.”
이정수는 만평일보의 부사장이자 사촌 형인 장형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봉투에 1억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과 고액의 수표 다발을 넣어 형욱에게 주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영민이가 올해 수능 친다고 했지?”
“한국대를 목표로 하고 있기는 한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한국대만 들어가면 삼촌이 차 사 줄 테니까 열심히 하라고 전해 줘.”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장영민은 형욱의 아들이자 만평일보의 장손으로, 머리가 똘똘해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후후, 영민이 녀석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겠는데?”
“가끔은 당근도 줘야 힘이 나는 법이라고. 것보다 SH에서는 아직 별다른 입장이 없지?”
“신문사고 방송이고 지들 편은 하나도 없는데 뭘 어쩌겠어? 강 대표 속이 아마 부글부글할 거다.”
“얌전히 당해 줄 놈이 아닌데 조용히 있는 게 조금 이상해. 형,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그놈 관련된 기사로 도배해 줘. 기왕 밟기로 마음먹은 거 확실하게 해야 돼.”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형욱과 달리 정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니까 출신도 미천한 놈이 벼락부자가 된 모양인데 걱정하지 마라. 대한민국 그 누가 우리 집안을 당해낼 수 있겠냐? 그건 그렇고, 점심 먹었어? 출출한데 밖에 나가서 식사나 할까?”
“형 말이 맞아. 내가 그놈한테 당한 뒤로 조금 과민했나 봐.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이들은 수혁을 두고 대화를 나누느라 점심때가 한참 지나도록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직원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급하게 들어왔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노크할 줄도 모르나?”
깜짝 놀란 형욱은 직원에게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그는 평소 궂은일을 모두 처리해 주는 남자에게 존대를 했지만, 짜증이 나자 자기도 모르게 하대를 하였다.
“죄, 죄송합니다. 급하게 보고드릴 게 있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남자는 형욱의 수족인 조민수 편집장이었는데 어찌나 다급했는지,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밥 먹고 오면 이야기하자고. 지금은 내 동생이랑 식사하러 가야 돼.”
“잠시만 형, 무슨 일이신가요?”
정수는 가슴 한편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휴, 말씀해 보세요. 뭐 때문에 이리 호들갑이십니까?”
궁금해하는 동생의 마음을 알아챈 형욱은 한숨을 쉬며 편집장에게 물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단 두 눈으로 직접 보시는 편이 이야기가 빠를 것 같습니다.”
“오래 걸립니까?”
“아닙니다. 컴퓨터만 켜면 바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형욱의 심기가 상했다는 것을 깨달은 조민수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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