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저, 대표님. 굳이 말씀 안 해 주셔도 되지만, 혹시 어떤 대책을 구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찬명은 수혁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매번 훌륭한 해결책을 내놓는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물론입니다. 대책이 아직 완벽히 다듬어지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지, 여러분과 대화하던 동안 어느 정도 정리되어서 곧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무척 궁금했지만 먼저 말씀하시기 전까지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하하, 다들 생각들이 비슷하셨나 봅니다.”
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임원들도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기다렸다. 수혁은 마지막으로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SH커뮤니케이션에서 베타 서버를 열면 수많은 고객들이 접속할 겁니다. 저는 사람을 시켜 기자회견을 몰래 촬영하게 한 뒤, 네티즌들에게 공개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자칫 기자들이 눈치라도 채면 기자회견이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용민은 만평일보 기자들이 기자회견 영상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반발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기자회견이 종료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영상을 공개할 겁니다.”
“만약 언론사들의 항의가 들어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시킨 뒤 우리와는 상관없이 스트리밍이 이루어졌다고 발뺌하면 그만입니다. 게다가 인터넷 방송의 경우 관련 법안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법체계도 엉성하기 때문에 법적 대응을 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수혁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용민을 안심시켰다.
“베타 서버를 열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마, 국내에선 처음으로 실시간 방송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이 열린 것이기 때문에, 서버가 열려도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혹시 많은 방송들이 생성될 시에는 우리가 기획하고 있는 방송이 가장 메인에 뜰 수 있도록 조치하세요.”
방송을 위해서는 캠을 비롯한 여러 장비들이 필요했는데, 아직 개인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이 없으니 수혁은 이러한 도구들을 구비한 사람들도 적을 거라고 예상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추가로 전달할 사항이 생기면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릴 테니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해 주시길 바랍니다.”
늦은 밤까지 논의를 마친 수혁은 임원들을 둘러보며 마무리 발언을 했다.
“네, 시간도 늦었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회사로 돌아가 해야 할 것들을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유신을 비롯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각오를 다지며 회사를 빠져나갔다.
* * *
“쥐새끼 같은 놈이 무슨 심산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만평일보 부사장 장형욱은 10월 셋째 주 토요일에 수혁이 기자회견을 연다는 보고를 듣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징표가 아니겠습니까? 지네들이 아무리 배짱을 부려 봤자 언론사들이 달려드는데 가만히 있을 재간이 없는 게지요.”
만평일보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조민수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쓸 만한 기자들을 추려서 보내려고 하는데 부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뭔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대다수의 언론사가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때, 굳이 기자회견을 열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형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견을 물었다.
“공정위에서도 움직이고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니 발악하는 거라고 봅니다. 제가 당장 타 언론사 간부들과 논의해서 보도 방향을 설정하고 전략을 짜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사안은 우리 사돈댁에서도 주시하고 있으니 확실히 처리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쇼. 제아무리 독한 놈이라도 우리의 표적이 되면 다 나가떨어져 있게 돼 있습니다.”
민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편집장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든든합니다.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형욱이 자신을 신임하고 있음을 느낀 민수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 * *
광화문에 있는 한 카페, 수혁은 혜선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장님,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대표님께서 지원해 주신 덕분에 사무실도 구하고 언론사 등록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투데이 서울의 기자였던 이혜선은 학생회의 비리를 밝히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윗사람들에게 밉보였기 때문에 끝내 잘리고 말았다.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던 수혁은 사비를 털어 혜선이 인터넷 신문사를 세울 수 있게 도와주었고, 지금은 광화문에 작은 사무실을 두고 활동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사명은 무엇으로 정하셨습니까?”
“디지털 데일리로 정했습니다. 거창하게 짓기보단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군요. 앞으로 활동을 하실 때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도와드릴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수혁은 혜선이 자신의 일을 돕다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이 정도 배려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보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따로 있으신 것 같은데…….”
혜선은 수혁이 사람을 용건 없이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0월 19일 오후 2시, 종로에 있는 컨벤션 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만평일보랑 몇몇 언론사들이 엄청나게 공격하던데. 결국 대응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셨군요.”
“맞습니다. 회사 임원들과 나름대로 대책을 짜 봤는데…… 이번에도 사장님의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신세라뇨. 저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기자가 있는데 지난주부터 우리 회사에 출근하고 있어요. 원하시는 보도 방향과 전략을 보내 주시면 미리 주지시켜 놓겠습니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기꺼이 수혁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하지만 걱정입니다. 지오닷컴에서 우리 회사의 기사를 메인에 실어 준다 한들, 저들이 갖고 있는 인프라와 영향력을 능가하긴 어려울 거예요.”
“기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따로 있습니다.”
“언론사가 기사를 써 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나요?”
예상 밖의 이야기에 혜선은 눈을 크게 뜨고 수혁을 바라봤다.
“우리는 디지털 데일리 소속 기자님이 계실 곳을 따로 마련해 드릴 예정입니다.”
“……다른 기자들하고 함께 있는 게 아니군요.”
“네, 주변 기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영상 촬영을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로 인해 디지털 데일리가 만평일보에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수혁은 영상 촬영 및 업로드를 혜선의 회사에 맡길 예정이었지만, 또다시 큰 짐을 지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영상을 촬영하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방송사에 보낸다고 해도 일송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서 뉴스에 나오기 어려울 거예요.”
“제가 문자로 링크를 하나 보내 드리면 그곳에 영상을 올려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기자회견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보내 드릴 테니 기자님이 잘 숙지할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단순한 영상 촬영이라면 직원이나 다른 사람을 써도 되는데 왜 우리를 선택하신 겁니까?”
혜선은 수혁의 의중이 궁금하여 물었다.
“촬영이 끝나면 네티즌들에게 공개가 될 건데, 영상 중간중간에 설명하시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미를 끌지 못하면 사람들이 보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왕이면 현장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자님이 하는 게 적합하다고 판단했고요.”
그는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은 본인도 모르게 편파적인 중계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말씀은 보도에 관해서는 지침이나 전략 같은 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저는 대중들이 진실을 알기를 원하지 거짓을 양산할 계획은 없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상은 정확히 언제 공개할 건가요?”
“빠르면 당일 저녁이나 늦으면 이튿날이 될 수도 있겠죠. 사장님, 저희가 나눴던 대화는 어디까지나 비밀이니까 보안에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걱정 마세요. 회견장에 출석할 기자 외에는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디지털 데일리는 일단 출석 명단에서 뺄 예정이니,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만 주세요.”
“네, 혹시 제가 더 알아야 할 사안이 있으면 지금 모두 말씀해 주세요.”
혜선은 아예 메모장을 꺼내 수혁의 말을 받아 적었고, 수혁은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부적인 내용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지금부턴 나만 잘하면 된다. 회견이 있기 전까지 철저히 준비해야겠어.’
용건을 마치고 카페를 나온 수혁은 기자회견에 대비하기 위해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간은 흘러 10월 19일이 되었다. 종로 한가운데에 있는 세명컨벤션 센터 앞은 수많은 기자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소속을 확인할 수 있게 사원증을 제시해 주시고, 질서 있게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SH그룹 직원은 기자회견이 열릴 홀 입구에 서서 기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차피 답이 정해진 게임인데 무슨 생각인 걸까?”
“강수혁 대표를 말하는 거야?”
만평일보에서 나온 배석현 기자와 성동일보의 박종구 기자는 배정된 자리에 착석한 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대학동문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럼 누굴 말하는 거겠어? 우리 편집장님이랑 너희 회사랑 이야기 다 끝난 거 같던데?”
석현은 서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말했다.
“하긴, 국내에서 가장 큰 신문사 둘이 합심해서 작업하는데 뾰족한 수가 있겠어?”
종구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일송과 척을 졌을 때부터 이미 게임은 끝난 거지. 아마 다른 언론사들도 호의적인 기사는 쓰지 못할 거야.”
“그러게, 한편으론 좀 불쌍하다. 괜히 밉보여서 공든 탑이 무너지게 생겼으니 말이야.”
세팅을 마친 이들은 거만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수혁을 기다렸다.
‘보아하니 기자회견이 녹화된다는 건 상상도 못 하는 것 같네. 긴장하지 말자. 계획대로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수혁은 무대 뒤 대기실에서 자료를 읽으며 긴장을 다스렸다.
“5분 뒤에 기자회견이 시작됩니다. 기자님들은 대화를 멈추시고 지정된 자리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회견은 앞서 공고한 대로 대표님의 모두발언 후 질의응답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니, 준비해 오신 질문들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찬명은 기자들에게 사전 공지를 하기 시작했다.
“저, 질문의 횟수는 정해져 있습니까?”
둘째 줄에 앉은 기자 하나가 손을 들고 발언했다.
“기자 한 분당 배정된 질문 숫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원활한 소통을 위해 배려 있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후후, 바보 같은 놈. 이렇게 되면 일이 훨씬 쉬워지겠어.’
찬명의 답변을 들은 배석현 기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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