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인간이면 다들 이익을 좇는 법인데……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속내가 어떤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야, 우리가 없을 땐 공손한 척하더니 바로 본색이 나오네?”
정수의 옆에 서 있던 김정욱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제 본심을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다른 분들에게 해명은 해야겠네요. 저는 사이트를 제작해 주거나 직원을 파견해서 수수료를 챙기는 행위를 일절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빠르면 11월, 늦어도 올해 안까지 엘마트에서도 철수하기로 결정되었으니 진위 여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수혁은 정욱을 무시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강 대표님이 하신 선택이 본인을 위한 건지, 정말 우리를 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맞아요, 오늘 대표님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 대표님을 잘못 판단한 것 같아요.”
수혁이 온라인 마트로 이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자 오너들 중 몇몇이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 사람을 판단하려면 당장 눈앞의 감언이설보단 그동안 해 왔던 행동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친한 지인 중에 학원 업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강 대표의 회사가 모든 시장을 독점했다고 하더라고요. 저야 해운사업을 해서 큰 지장은 없지만, 다른 회장님들과 대표님들이 피해를 보실까 봐 염려가 됩니다.”
“우리 회사가 사교육 시장을 석권한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SH에듀케이션 덕분에 3,000억 원에 불과했던 시장 규모가 10배 이상 팽창했습니다. 즉, 업계 순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원 원장들의 수입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정욱이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지만 수혁은 노련하게 방어했다.
“강 대표, 아주 달변가이십니다. 말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겠어요. 하지만 제 눈에는 온라인 판매를 통해 오프라인 시장을 위축시키고 혼자서 유통시장을 독식하려다가 주변의 평판이 신경 쓰이자 갑자기 행동을 바꾼 거로밖에 안 보입니다.”
“끝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군요. 그럼 제가 역으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상생을 강조하시는 이정수 회장님께선 유통업체를 위해 뭘 하셨습니까?”
“허허, 일송은 선대 때부터 대한민국의 경제 토대를 갈고 닦고 유통협회를 설립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회사입니다. 남에게 충고를 하기 전에 본인의 역량을 더 키우셔야 될 것 같습니다.”
정수는 여유로운 태도로 수혁의 말을 받아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일송의 이름으로 해명하는 모습이 이명학 상무랑 매우 유사하군요. 참 부럽습니다. 뭐든 쉽게 쉽게 대답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함부로 합니까? 회장님께서 해명할 게 뭐 있다고 그딴 소리를 하는 거지?”
대화를 듣던 정욱이 인상을 찌그리며 쏘아붙였다.
“김정욱 대표님도 그렇고, 회의실에 들어온 이후 내내 저에게 인신공격을 하지 않았습니까?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하지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이지요.”
“방금 ‘해명’이란 단어를 썼는데, 되는대로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닙니다. 나름 규모 있는 기업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참 경솔하군요. 이봐요, 선배가 쓴소리를 하면 듣기 힘들어도 달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모습은 보기 흉한 법입니다.”
정수는 가르치는듯한 말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죠. 최근 국토부 공무원과 만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 거로 아는데, 맞습니까?”
“그거야 경제 잡지나 신문 인터뷰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습니까?”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이니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주요 도시에 있는 터미널을 기반으로 백화점을 설립하신다는 계획을 보면서 절로 감탄사가 나오더군요.”
수혁은 조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정수를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만 말하세요. 제가 이젠 대화하는 법도 알려 드려야 합니까?”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본인의 언행이 모순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시네요.”
“이봐, 강 대표. 어른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무리 자네가 기분이 나쁘다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김정욱 대표님, 선배님들 계신 데서 언성 높이지 마십시오. 무례한 건 오히려 대표님이십니다. 전 지금 회장님과 대화 중이니 볼일이 있으면 다 끝나고 보도록 하죠.”
“아니 이게…….”
“대표님, 고정하세요. 저 친구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정수는 흥분하여 얼굴이 벌게진 정욱을 달래 주었다.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건가?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열거해 놓고 의기양양해하는 꼴이 우습다는 생각은 안드나?”
“상생을 강조하신 분의 행보로는 믿어지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8월쯤에 만평일보 경제면에 특집기사가 실리셨는데, 그때 언급하셨던 경영철학은 기억하십니까?”
“음, 물론 기억하고는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개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검열까지 받아야 하나?”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던 정수는 조금 당황했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 정도에서 그치면 말도 안 하죠. 인터뷰를 보니 일송의 자본을 등에 업고 주요 도시마다 백화점을 세우고, 고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국내 곳곳에 마트를 론칭하려고 하시던데…… 저한테 해 줬던 말씀과 너무 달라서 놀랐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내가 사업상의 결정을 내릴 때 자네의 눈치를 봐야 하나?”
“그럼 왜 뒤에서 지오쇼핑을 모함하셨습니까?”
“모함이라니? 말이 거칠구먼.”
정수는 수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청을 떨었다.
“상생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만 살려는 독단적인 기업이라고 계속 폄하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오해가 어느 정도 풀어진 것 같은데, 사과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업계 평판이 좋지 않아 변심한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사과를 하겠나? 그래, 자네가 좋은 의도로 모임에 참석한 건 인정하겠네.”
정수는 수혁의 말이 계속될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감을 인지하고 한발 물러섰다.
“들어 보니 이명학 상무가 회장님들과 대표님들에게 지오쇼핑을 경계하라며 선동하고 다닌 건데 회장님께선 뭘 믿고 우리에게 악담을 퍼부으셨습니까?”
“악담이라니? 내가 몇 번을 말하나? 지금은 몰라도 당시에는 일리 있는 말이었다니까?!”
정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잘됐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겠어.’
수혁은 이성을 잃은 정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고로 어떤 사실이나 의견을 전달할 때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메신저가 어떤 사람인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봐, 아직 말 안 끝났…….”
“이명학 상무는 저랑 대학 동문인데 최근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습니다. 제적당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학생들이 낸 회비로 룸살롱을 차렸고, 학생회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송유통에 취업시켜 줄 것처럼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이 적발되었습니다.”
수혁은 정수의 말을 무시하고, 청중들에게 명학이 저지른 비리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요즘 통 보이지 않아 궁금했던 참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충격입니다. 저와 개인적으로 연락했을 땐 예의도 바르고 믿음직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회의실 안은 어느새 명학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강수혁 대표의 말이 거짓은 아니나, 이명학 상무는 더 이상 일송유통 소속도 아니고 우리 집안에서도 축출된 녀석입니다. 강 대표는 지금 여러분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딱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이명학은 지오쇼핑을 흠집 내기 위해 회사 기밀자료를 빼돌린 적도 있는 놈입니다. 더는 범법자의 말에 놀아나지 마시길 바랍니다.”
궁지에 몰린 정수는 다급하게 호소했으나, 그때마다 수혁은 의혹을 증폭시킬 수 있는 말을 던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대표님, 방금 하신 말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명학 상무가 그런 일을 벌였다면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까?”
“그건 일송의 힘이 언론까지 미쳤기 때문입니다. 궁금한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이명학 상무의 비위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 남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며 질문하자 수혁은 자신감 넘치게 답변을 했다.
“명학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걸세. 계속 지껄이면 그룹 차원에서 소송을 검토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마음대로 하세요. 소송이 무서웠으면 애당초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수혁은 정수의 살기 어린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뭐, 기분이 상하셨으면 이명학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대신 선배님들께 일송유통이 어떻게 국토부 공무원을 구슬려서 전국 대도시의 모든 터미널에 백화점 건축 허가를 받았는지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휴, 너 따위 놈한테 내가 왜 일일이 설명해야 하지? 김 대표님, 그만 가시죠.”
곤란한 질문을 받은 정수는 정욱을 데리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회장님. 경영에 간섭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답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사실 저도 뉴스를 보고 궁금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몇몇 회장님들은 일송과 같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지방에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서울이야 백화점이 하나 더 들어서도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고객 숫자가 많지 않은 지방에서는 무척 큰일입니다.”
“백화점 외에도 전국에 마트를 건립하실 거라고 그러셨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몇몇 오너들은 용기를 내어 정수에게 질문했다.
“허허, 강 대표도 모자라 여러분들까지 왜 이러십니까?”
“이만하면 본인의 언행이 모순된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 끝까지 뻔뻔하시네요.”
“회장님, 이러지 마시고 저희랑 나가시죠.”
“그렇습니다. 더 있어 봤자 큰 소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수혁이 승기를 잡자, 일송을 지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정수에게 다가와 조언했다.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습니다. 협회가 언제부터 저런 애송이한테 휘둘렸는지…… 쯧쯧.”
“저놈들이랑 말 섞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가시죠, 회장님.”
석호는 혀를 차며 사람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정욱을 비롯한 추종자들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흐흠, 참 당황스럽군요.”
“그러게요. 이정수 회장님이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은 분통이 터졌지만, 일송의 힘이 두려워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참 유감이네요. 타인에게는 추상같고 본인에겐 저리 너그러우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자, 아직 총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석호는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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