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후, 기회는 한 번뿐이야. 긴장하지 말고 준비한 대로만 하자.’
수혁은 숨을 한 번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지오쇼핑을 론칭하기 전에 포털 사업을 하면서 미래를 주도할 트렌드가 무엇이 될지 엿볼 수 있었고, 여러 회장님과 대표님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으론 뭐가 있을까 고민해 봤습니다.”
‘젠장, 여기까지 와서 강의를 듣고 앉아 있다니. 엉뚱한 소리 하면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야겠어.’
‘핏덩이한테 충고나 들을 줄 알았으면 이정수 회장님처럼 나중에 올걸 그랬어.’
이정수와 한신해운의 김정욱 대표는 수혁의 프레젠테이션을 듣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각하고 있었고,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오너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꼬투리 잡을 게 있나 살펴보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로 세계 1,000대 기업에 진입한 회사들을 분석해 봤는데,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표를 보면 1,000대 기업에 들어온 신규 회사들은 IT회사이거나 기존의 상품, 서비스에 IT 기술을 접목한 회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혁은 매섭게 노려보는 이들의 눈빛은 무시하고 발표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리도 엘마트처럼 협조해 달라, 이 말입니까?”
앞줄에 앉은 장년의 남성이 한창 발표를 하는 수혁의 말을 끊고 볼멘소리를 내었다.
“저, 한 대표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건 이해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질의응답 시간에 나누도록 하죠.”
“협회장님, 따로 시간을 내기보단 선배님들의 질문에 즉각 즉각 답변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석호는 남자를 제지하려 했지만, 수혁은 오해를 풀기 위해 질문을 최대한 받고 싶어 했다.
“질의 시간을 생략해도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최대한 간략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 대표님 최근에 엘마트에 관한 뉴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뭐, 봤지요.”
남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마침 엘마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먼저 말씀을 꺼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병섭 회장님과 저는 엘마트 청량리 지점을 필두로 온라인 마트 서비스를 실시해 왔습니다.”
“그런데요?”
“이 지표를 보시면, 선배님을 포함한 회장님들의 오해가 다소 풀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자신이 직접 만든 도표를 스크린에 띄웠다.
“엘마트와 지오쇼핑은 청량리점에만 실시하던 온라인 마트 서비스를 서울에 있는 지점들로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달에 비해 30퍼센트 이상 매출이 상승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매출이 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납득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그래도 제법 유익한 주제여서 참고 들어주려 했는데, 지금까지 자랑밖에 못 들었습니다.”
“협회장님, 그냥 빨리 마무리하시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다른 회장님들의 마음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저…….”
일송과 관계되어 있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수혁을 지탄했고, 몇몇 대표들도 덩달아 들고일어나자 정석호는 크게 당황했다.
“선배님들이 저에 대한 불신이 많으신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더 들어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대표님과 지난 5월부터 함께해 왔습니다. 그리고 발표 준비 과정을 옆에서 자세히 지켜봤습니다. 강수혁 대표님은 단순히 해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그럴 게 아니라 회장님이 대신 말씀해 주세요. 강 대표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우리에겐 그저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니까요.”
병섭이 나서서 수혁을 옹호하자, 무리 중 하나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조금만 더 들어 보시면 왜 더 지켜보자고 했는지 알게 될 겁니다.”
“한번 들어 보죠.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데 저도 궁금하네요.”
“만약, 쓸데없는 말을 또 늘어놓는다면 저는 퇴장하겠습니다.”
‘후, 한시름 놨다. 그냥 바로 말해야겠다. 더 지체했다가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되겠어.’
병섭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은 수혁은 서론을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지금부터 최대한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온라인 마트가 대박까진 아니어도, 엘마트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모두 아셨을 겁니다. 저는 발표를 준비하며 선배님들이 뭣 때문에 지오쇼핑을 안 좋게 바라보시는지 나름 고민해 봤습니다.”
수혁은 말하면서 슬라이드를 빠르게 넘겼다.
“그래프를 보면 온라인 마트 서비스가 매출 증가에 크게 기여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주목할 건 이것뿐이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온라인 판매가 늘면 오프라인의 매출이 줄어들 거라고 예상하셨겠지만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소폭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터넷으로 물품을 주문하면 매장에 잘 안 오게 될 텐데 왜 저런 현상이 발생한 걸까요?”
오너들 중 하나가 처음으로 발표에 흥미를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온라인 마트를 초반에 도입했을 땐 고객들은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티비 광고와 각종 프로모션을 진행한 결과 온라인 매매를 활성화하는 데 성공했지요.”
수혁은 말을 하다가 목이 탔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 갔다.
“온라인 마트 서비스가 활성화되자 엘마트의 인지도는 올라갔고, 이에 따라 고객의 유입이 증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프라인을 선호하는 구매자와 온라인을 선호하는 구매자는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기 때문에 온라인 판매 시장이 확대된다고 해서 타 유통업체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고요.”
“이전에 말로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데이터를 토대로 말씀을 하시니까 전보다 이해가 잘 됩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비록 오해가 조금 풀렸다곤 하지만 아직까진 해명하시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우리에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선배님들께서 저에게 상생의 가치를 강조하셔서 제 나름대로 준비해 온 것이 있습니다.”
수혁은 상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컴퓨터를 조작하여 온라인 판매 서비스의 대략적인 개요가 적힌 화면을 띄웠다.
“흠, 이건…….”
“우리도 엘마트처럼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사람들은 스크린에 띄워진 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 보여 드리는 건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이고, 상세한 건 다른 파일로 한 번 더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온라인 마트 서비스를 실시할 때 필요한 노하우와 기획안이 들어 있는 파일을 원하시는 선배님들께 드리고자 합니다.”
“설마 공짜는 아니겠죠? 아무리 아이디어를 지오쇼핑이 제공했다지만 엘마트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데, 그냥 주진 않을 거 아닙니까? 대표님의 뜻이 그렇다 해도, 이병섭 회장님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발표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혁을 쳐다봤다.
“허락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애당초 대표님의 제안으로 시범적으로 운영하다가 운 좋게 성공했을 뿐인데 말이죠. 처음에 대표님께서 영업 노하우를 공유하자고 했을 땐 반대를 했던 건 사실입니다. 지오쇼핑에서 이제야 막 유의미한 수익을 내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병섭은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나 여기 계신 회장님과 대표님들이 갖고 계신 오해를 풀고 다 같이 잘돼야 하지 않겠냐며 배포 있는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현재 강 대표님께서 공유하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 회사에서 시행되고 있는 서비스와 유사합니다. 비록 대표님이 마음에 안 들어도 호의를 왜곡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흠, 강 대표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런 안배를 해 놓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병섭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몇몇 회원들은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득을 챙겨 준다니까 금세 눈빛들이 변하는군. 하긴 사업 노하우는 특허로 낼 수 있을 정도로 귀중한 건데 이걸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니 군침이 돌겠지.’
수혁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온라인 마트 서비스는 대형 마트가 아닌 곳에서도 적용할 수 있어서 선배님들이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판매를 촉진시킬 수 있는 전략도 적어 놨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속이 좁았습니다. 강 대표가 이렇게까지 우리를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기획안을 주신다면 엘마트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영업 방식에 관한 청사진이 있으면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약할 수 있기에, 이들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들 한심하군요. 미끼 하나 던져 줬다고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리 쉽게 변합니까?”
밖에서 발표를 엿듣고 있던 정욱이 문을 벌컥 열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업무가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컨벤션센터에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던 정수는 능청을 떨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정수 회장님, 김정욱 대표님.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현재 저는 엘마트와 합작하여 운영하던 온라인…….”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시기가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오해를 풀려면 첫 모임 때 공개를 하셨어야지, 왜 이제 와서 호들갑입니까?”
정욱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수혁의 말허리를 잘랐다.
‘흥분하지 말자. 저놈 페이스에 휘말렸다가는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질 수도 있어.’
수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함을 유지했다.
“보아 하니 다른 대표님들에게 사업 아이템을 무상으로 주려는 모양인데…… 저의가 의심스럽군요.”
“혹시 어떤 점이 의심스럽다는 겁니까?”
정수의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엘마트에 사이트를 제공해 주고 노하우를 제공해 준 대가로 소정의 수수료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강 대표에게 신세를 지면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지오쇼핑이 사이트를 제작해 주든 다른 분들이 수수료를 내고 상품을 올리든 그건 회장님께서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라고 봅니다.”
석호는 이례적으로 정수에게 쓴소리를 했다. 모임에 늦은 것도 모자라 노골적으로 꼬투리 잡는 그의 모습이 얄미웠던 것이다.
“협회장이라고 권한을 너무 남용하시는구먼. 이거 어디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네.”
“회장님 말씀은, 제가 은혜를 베푸는 척하면서 더 큰 이득을 보려는 속셈이란 말씀이신 겁니까?”
“잘 알아듣는군요.”
수혁은 석호와 정수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제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게 꼭 설명해야 할 일인가? 사람이면 모름지기 이익을 좇는 법인데, 자네처럼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면 의심할 수밖에 없지.”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안 되겠네.’
수혁은 되는 데로 말을 쏟아내는 정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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