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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10화 (210/316)

210화

성북동에 위치한 명학이 사는 고급 주택, 집 거실에는 아버지인 정찬을 비롯한 그의 식구들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내 살았던 데니까 적응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다음 달 내로 미국으로 넘어가라.”

“……학교에 입학하려면 내년 9월은 돼야 가능할 텐데, 한국에 좀 더 있어도 되지 않나요?”

명학은 시무룩한 얼굴로 정찬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돈 들여서 기껏 한국대에 넣어 줬더니 뒤에서 룸살롱이나 운영하다니, 너 같은 놈이 내 동생이라는 게 너무 수치스럽다.”

일송 그룹의 장손인 이명헌은 자신의 동생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나도 형처럼 제대로 지원받았으면 이 사달은 안 났어.”

“사업 하나 말아먹었으면 됐지, 네가 지원을 운운할 자격이나 되냐?”

”애당초 일송전자가 아닌 일송유통에서 근무했던 것부터 잘못된 거였다고. 하긴, 본인은 좋은 것만 누리고 살았으니까 내 심정은 모르겠지.”

명학은 이명헌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끝까지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구나? 넌 앞으로 일송과 관련된 모든 일에는 배제될 거다. 생활비 정도는 지급해 줄 수 있으나 뭘 하며 살지 미국에서 고민하도록 해라.”

“아버지!”

“이 자식이, 목소리 안 낮춰? 어디서 큰 소리야?”

벌떡 일어난 명학이 아버지에게 대들자, 명헌은 눈을 부릅뜨고 동생을 노려봤다.

“가만히 있거라. 뭐라고 하는지 들어 봐야겠다.”

정찬은 명헌을 제지했다.

“사업 말아먹고 룸살롱이나 운영한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형이나 누나에 비해서 저는 항상 뒷전이고, 이번 일만 해도 저를 보호해 줄 수 있었는데 그냥 방치하신 거잖아요.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한국대 측에 이야기만 잘해 주셨어도 잘릴 일은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총장이 마음먹고 널 자르려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냐? 일송에서 힘써 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유치장에 있어야 할 건데 뭐가 그리 당당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10월 중에 나갈 채비나 해라.”

명학이 열변을 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찬은 심드렁한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앞으로 일송전자는 쳐다보지 않고 삼촌 밑에서 일을 배우겠습니다. 나름 열심히 일한 덕에 직원들한테 인정도 받고 있다고요.”

“정수랑도 이야기 다 끝났다. 일송유통엔 더 이상 네 자리는 없으니까 미국에 가서 입학 준비나 열심히 해라. 난 할 일이 많아서 그만 일어나야겠다. 명헌아, 가자.”

“네, 방금 명경이한테 연락 왔는데 집에 거의 다 도착했대요.”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식이나 하자. 아주머니, 명학이 밥은 알아서 차려주세요.”

명학을 제외한 가족들은 겉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완전 망했다. 이게 다 강수혁 때문이야…….’

명학은 허탈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가족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 * *

“수혁아, 이쪽이야.”

“고생 많았어. 출연하는 연예인도 다 바뀌고 축제 프로그램의 퀄리티도 좋아져서 학생들이 엄청 만족해하는 것 같더라.”

축제날이 되었다. 찬식의 초대를 받은 수혁은 공연을 보기 위해 광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조금 전에 이경률 총장님 뵙고 왔는데, 너한테 별도로 감사장이 수여될 거라고 전해 주라더라.”

“그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수혁은 1억 상당의 현금을 비상위에 기부했고, 찬식과 진태는 그 돈으로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기획할 수 있었다.

“아니야, 우리 같은 학생들이나 한국대 입장에서는 네가 은인이나 다름없어.”

“총장님은 어떻게, 잘 지내신대?”

수혁은 찬식의 계속되는 칭찬에 화제를 바꿨다.

“총장님은 갑자기 왜?”

“학교 총책임자이신데 학생회와 처장들 사이에 비리가 크게 터졌잖아. 주변에서 책임을 지고 내려오라는 여론이 분명히 있을 거야.”

수혁은 학교를 위해 부담되는 결정을 내린 이경률 총장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처음엔 그동안 뭘 했냐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는데, 이명학 때문에 여론이 반전됐어.”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재벌 3세가 이명학인지 모를 텐데?”

그는 일송법무팀과 딜을 한 이후, 포털 내에 이명학에 관한 기사는 모두 내려갔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쉬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혁은 의아해했다.

“최근에 교육부에서 감찰이 왔었는데, 이경률 총장님이 재벌 그룹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고 일을 처리한 걸 두고 공무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나 봐.”

“그래?”

“그걸 두고 무모하다고 한 사람도 있었지만, 호평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모양이야.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정치권에서도 총장님을 주시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더라고.”

“저도 들었어요. 여당에서 재벌에 굴하지 않은 소신 있는 사람이라며 호평하고 있다네요. 임기가 얼마 안 남으셨는데 총장직을 그만두셔도 사회 활동에는 문제없으실 것 같아요.”

어느새 옆에 다가온 진태가 대화를 지켜보다가 첨언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다들 축제 기획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간도 다 됐는데 공연장으로 가시죠.”

“너 말고 유리도 불렀어. 맨 앞자리니까 둘이 같이 앉아서 보면 될 거야.”

“고마워, 찬식아.”

이런저런 일에 지쳐 있던 수혁은 간만에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이날 그는 유리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고 친구들과 함께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생회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운과 매력이 각각 2씩 향상되었습니다.>

‘아, 맞다.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이었지?’

수혁은 아이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는 눈앞에 화면이 뜨기 전까지 히든 퀘스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축제였는데……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오랜만에 축제다운 축제를 경험한 학생들도 행복해하는 얼굴로 축제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수혁은 퀘스트를 떠나 큰 보람을 느꼈다.

‘쉴 만큼 쉬었으니까 다시 일에 집중하자. 일단 발표 자료를 정비하고 해외 진출 준비도 차근차근 해야 해.’

밤 11시가 넘은 시각, 수혁은 집에 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 * *

9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유통업체 오너들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종로에 있는 컨벤션센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협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빨리 오셨네요.”

이른 시각에 도착한 석호는 수행비서와 함께 로비에 서 있다가 우연히 병섭을 만났다.

“저, 회장님. 방금 식순을 살펴봤는데…… 강수혁 대표님께서 유통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더군요.”

“대표님이 금일 모임에서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싶다고 해서 기회를 드렸습니다.”

“대표님이라면 분명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회원들이 협회장님의 결정을 일방적이고 독단적이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병섭은 우려 섞인 투로 말했다.

“이런저런 걸 다 신경 쓰면 진행이 더뎌지는 법이지요. 자, 들어가시죠. 문이 열린 것 같습니다.”

“네, 회장님.”

건물 직원은 예정된 시간이 되자 협회 모임이 있을 회의실 출입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하, 반갑습니다.”

“인천에 백화점을 하나 오픈하셨던데 잘되길 빌겠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은 하나둘 회의실에 도착했고,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인맥 관리에 전념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석호에게 오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이것저것 따지기 시작했다.

“협회장님, 웬일로 임시 총회를 여셨나 했는데 강 대표를 연단에 세우기 위한 건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무리 아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저희와 상의도 없이 이러실 수 있습니까?”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 주셔서 항상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렇게 특정 인물을 지원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단지 불필요한 오해를 풀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뿐입니다. 만약 대표님의 발표가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석호는 기업 오너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크흠, 협회장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더 드릴 말은 없습니다. 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죠.”

“참고로 이정수 회장님은 강 대표의 발표가 끝나면 들어오신답니다.”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석호는 이정수가 몽니를 부린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 걸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의실에 들어온 수혁은 석호와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

“흐흠, 전 자리로 가 보겠습니다.”

“저도 이만.”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은 수혁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차갑게 돌아섰다.

“회장님,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지신 것 같아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허허, 개의치 마세요.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발표 준비는 잘하셨습니까?”

석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혁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이병섭 회장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수월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수혁은 병섭으로부터 온라인 마트가 엘마트에 미친 긍정적 영향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들을 토대로 손쉽게 발표 내용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 회장님과 잘 지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좋은 발표가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되는군요. 자, 이만 자리에 앉을까요? 회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회의 시간이 임박한 걸 확인한 수혁은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급작스럽게 열린 임시 총회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주신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대한유통협회 임시 총회를 개시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착석한 것을 확인한 석호가 총회 개시를 선언했다.

“먼저 일선에서 고생하는 유통업계 종사자들이 보내 준 건의안들을 함께 검토한 뒤 강수혁 대표님의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발표가 끝나면, 바로 옆 식당에 오찬 자리를 마련했으니 다들 회포는 거기서 풀면 될 겁니다.”

회의 진행 순서를 간략하게 설명한 석호는 협회 사이트에 올라온 다양한 고충들을 회원들에게 공유했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곧 내 차례네. 슬슬 준비해야겠다.’

30분간의 열띤 논의는 끝이 났고, 드디어 수혁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미리 써놓은 원고를 다시 한번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음으로 강수혁 대표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경험이 미천한 제가 선배님들 앞에서 발표를 하려니 긴장되네요. 발표 중간중간에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면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의실 한쪽에 설치된 단상에 선 수혁은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했다.

‘풋, 오버하고 있네.’

‘그렇게 시건방을 떨더니 이제 와서 잘 보이려 해? 어림없지?’

수혁이 성의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일송의 눈치를 보는 몇몇 오너들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 21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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