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예상대로 일송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군. 하지만 상관없어, 증거와 증언들이 확보된 이상 별수 없을 테니까.’
혜선과의 통화를 마친 수혁은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일송이라 해도, 지금처럼 확실한 물증 앞에서는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9월 중순의 어느 날.
“너 최근에 신문 본 적 있어? 크게 실리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우리 학교에서 큰 사건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
“아, 신문은 아니고 친구한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우리가 낸 학생회비가 재벌 집 아들 룸살롱 차리는 데 쓰였다던데?”
“뭐? 룸살롱? 재벌 집 아들이면 누굴까? 우리 학교에 아버지가 대기업 회장인 사람들이 제법 있지 않아?”
“소문에 의하면 일송 그룹 사람이라는데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어.”
한국대 학생들은 교내에서 벌어진 비리 사건에 대해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학교에서도 편파적인 판결을 내리기 어려울 거야.’
수혁은 캠퍼스 내에 형성된 반 학생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처장들과 학생회 사이에서 발생한 비리 사건의 진상 조사와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변호사님, 오셨습니까?”
“대표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박정철을 발견한 수혁은 악수를 건네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징계위원회는 어디서 열리나요?”
“30분 후에 대학본부에서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보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정철은 비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참고인으로 징계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시죠.”
“알겠습니다.”
한국대 캠퍼스는 꽤 넓었기 때문에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어제 검찰 측에서 저를 따로 부르더니 제안을 하더군요.”
“고발인 조사를 한 모양이네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가 보니 단순한 고발인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뭐 때문에 변호사님을 부른 겁니까?”
수혁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우리 사건을 맡은 담당 검사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학생회에 관련된 사건들은 증언과 증거가 명백히 존재하나 기소를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증거가 있는데 기소하기 쉽지 않다라…… 뭔가 수상한데요?”
“제가 볼 땐, 검찰 쪽에서 일송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는 듯했습니다. 이명학과 관련된 혐의점만 더 이상 파고들지 않으면 나머지 사안들은 확실히 처리해 주겠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 검사라는 작자가 그따위 이야기나 하다니…… 참 실망이네요. 전 당연히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혹시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수혁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물었다.
“일단은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린 뒤 김형석 변호사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김형석 변호사님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을까요?”
“김형석 대표 변호사님은 법조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계시는데 당시 저는 변호사님을 통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정철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들어 보니, 김형석 변호사님 선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서부지검에 아는 검사가 있어서 물어봤는데 일선에 일송재단 출신 검사들이 워낙 많아 이명학을 기소하기는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합니다.”
“휴, 현실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겠지요. 일송 법무팀과 연락은 해 보셨습니까?”
수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단 차선책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네, 이혜선 기자님과 관련된 사안들은 모두 저와 상의하자고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일송 법무팀장은 검찰총장 출신이고, 고문으로 있는 사람은 대법관을 했던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검찰에서 이명학을 건들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 보니 검사들 몇 명이 편을 들어주는 것보단 고위 관료 출신의 법조인들이 막후에서 일송을 지원해 주는 게 훨씬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정철은 순순히 수혁의 말을 인정했다.
“바로 그겁니다. 변호사님을 소환한 검사도 결국 장기 말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하…… 어쩔 수 없네요. 지금은 학교를 안정화시키는 게 목적이니, 법무팀장에게 전화해서 이명학을 기소하지 않는 데 동의한다고 전해 주세요.”
“어쩌면 그게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타협하지 않으면 우리가 애써 준비한 대책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의 수에 마냥 놀아날 생각은 없습니다. 법무팀장에게 이명학이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것에는 동의하나, 한국대에서 내릴 행정 징계까지 무마하지는 말라고 말씀해 주세요. 만약 이를 거부할 시에는 제가 가진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번 일을 그냥 덮지 않을 거라는 것도 전해 주시고요.”
비록 일송 그룹의 막강한 권력에 정면으로 부딪칠 만한 역량은 없었으나, 대형 포털 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이점과 정·재계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몇몇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명학과 일송 그룹에 생채기 정도는 낼 자신이 있었다.
“오늘 징계위원회가 마무리되는 대로 일송 측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합당한 처분이 내려질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준비를 철저히 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대화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어느새 대학본부에 도착한 수혁과 정철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 *
오후 3시에 열린 징계위원회는 저녁이 다 돼서야 끝이 났고, 이후 처벌 수위에 관한 논의가 밤늦게까지 이루어졌다.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진태의 원룸, 수혁은 간만에 찬식과 진태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혁아, 방금 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비리에 연루된 학생회 임원들은 제적 처리가 됐고 처장들은 파면하기로 결정했대.”
“고생 많았습니다. 수혁 씨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찬식과 진태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것보다, 이명학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실, 일을 진행하면서 일송에서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았었거든요.”
수혁은 징계위원회에 이경률 총장이 개입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어제 이명학을 두고 위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었나 봐. 비리를 주도한 자냐, 아니면 단순 가담자냐를 두고 마라톤 회의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징계위원들 중에서도 일송의 간자들이 있었나 보네.”
수혁의 낯빛은 금세 어두워졌다.
“괜찮아, 수혁아. 아는 분한테 들은 이야긴데, 총장님께서 이명학에 대한 징계를 강력하게 밀어붙이셨나 봐. 학생회 임원들 못지않은 비리를 저지른 이명학을 옹호하는 위원들이 있었는데 회의 내내 질타하셨대. 그 결과 이명학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제적하기로 결정됐고.”
“휴, 정말 다행이다.”
찬식의 이야기를 들은 수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 징계로 현우 학생회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한 달 안에 학생회 선거를 다시 실시할 예정인데, 당장 축제가 코앞이라 총장님께서 우리에게 전권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잘됐네요. 이제야 학생들이 제대로 된 축제를 즐길 수 있겠어요.”
진태의 말에 수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총장님께서 비상위의 활동을 좋게 평가해 주신 덕분에, 축제까지만 임시로 권한을 주신 거야.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이놈들이 학생회비를 많이 빼돌려서 축제를 제대로 열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 한국대라는 이름 덕택에 연예인 섭외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은데…… 막상 돈을 줄 여유는 없는 거지.”
찬식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돈 걱정은 말고, 유명 연예인도 부르고 축제 계획을 잘 짜 보는 건 어때?”
“설마…… 네가 돈을 내주겠다는 거야?”
“응, 어쩌면 나한테는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축제인데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그래. 비상위 사람들이랑 회의해서 연예인 섭외부터 축제 프로그램까지 한번 제대로 기획해 봤으면 좋겠어. 나중에 예산안만 나한테 보내 주면 계좌로 돈은 송금해 줄게.”
“감사합니다. 수혁 씨.”
감동을 받은 진태는 고개를 숙이며 수혁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지 마세요. 진태씨 덕분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건데, 제가 더 감사하지요.”
수혁은 손을 저으며 민망해하였다.
“원래 다 같이 회식이나 하려고 했는데, 당장 계획부터 짜 봐야겠다.”
“그래. 나도 그동안 밀린 업무를 빨리 처리해야 해서 회식할 여유는 안 될 것 같아.”
“그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는 거로 하고 다음에 회포를 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사건이 잘 마무리된 걸 확인한 수혁은 잠시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오랜만에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강남에 있는 지오쇼핑 사옥, 수혁은 사무실에 오자마자 유신을 호출했다.
“온라인 마트 지점 확대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급하게 불렀습니다. 혹시 보고를 바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궁금하실 것 같아 자료를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유신은 손에 들고 있는 문서들을 수혁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회장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청량리점의 성공을 기점으로 서울 내의 모든 엘마트에 온라인 마트를 도입한 지오쇼핑은 수수료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운영 지점이 늘어나는 것에 맞춰 지오닷컴과 지오쇼핑 홈페이지에 대대적인 홍보를 했는데, 고객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춰 티비 광고를 추가로 실을 생각도 해 봤지만, 조만간 사업에서 철수하게 될 것을 고려하여 중단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 손에서 떠나갈 것, 더 미련 가져서 뭐 하겠습니까? 엘마트에서 입수한 매출 현황표를 보니 온라인 마트 서비스를 개시한 이후 매출이 30퍼센트 가까이 늘었군요.”
수혁은 서류를 읽으며 말했다.
“네, 관계자 말로는 초반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내부 직원들도 이제는 우리 회사의 역량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온라인 마트의 도입이 양 회사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보고서를 작성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총무팀에 이야기해서 바로 작성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신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요즘 회사에 잘 못 나왔는데, 회사에 별일은 없었습니까?”
“큰 이슈는 없었습니다. SH에듀케이션에서 9월 말경에 과목별로 참고서를 출판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해당 상품들은 10월 초경에 사이트에 올릴 예정이며…….”
유신은 수혁이 놓쳤던 주요 안건들을 한참 동안 설명한 뒤 회장실을 나갔다.
‘보고서를 받으면 바로 발표 자료를 만들어야겠어. 이번 기회에 업계 내의 부정적인 여론을 싹 반전시켜야 돼.’
수혁은 9월 말에 있는 대한 유통 협회 모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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