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래요?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논의가 잘 이루어져서 영업 지점이 늘어나게 되면 우리 입장에선 나쁠 게 없지요.”
“회장님. 좋은 소식을 드린 와중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게, 음…….”
유신은 말하기가 쉽지 않은지 한동안 입술을 꽉 깨문 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지금 말하기 곤란하시면 다음에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흠, 저……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마트 내 온라인 판매 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유신은 머릿속에서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엘마트에서 철수하는 것을 고려해야 된다는 말씀인건가요?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사업이 잘될 조짐이 보이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수혁은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지오쇼핑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대가로 수수료를 받고 있긴 하지만 매출 증대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의 대부분은 엘마트에서 가져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운송 직원들의 인건비를 우리가 대주고 있기 때문에 예상보다 수익이 많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광고비까지 지불한 것을 고려하면 이익이 크지 않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사이트 관리, 인건비, 광고비 등 여러 곳에서 지출이 발생하고 있고 현재 상승세라면 원금은 건질 수 있을 테지만, 소요되는 시간과 인력의 분산처럼 보이지 않는 비용까지 고려하면 수지가 맞는 사업인지 의문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유신은 수혁이 야심차게 기획한 프로젝트를 비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회사를 위해서는 직언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지점이 확대되고 매출이 오르면 수익이 더 생기지 않을까요?”
“지점이 늘어나면 그와 비례해서 인건비와 사이트 관리 비용도 더 늘어나게 될 겁니다.”
“하긴, 각 지점별로 재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사이트를 추가적으로 더 개설해야 될 수도 있겠군요.”
간만에 들은 희망적인 소식에 화색이 돌던 수혁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길게 본다면 회장님 말씀대로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프로젝트에 집중을 한다면 더 좋은 성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직 대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프로젝트를 언급하시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부분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하지만 엘마트와 계약을 맺은 이상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사업을 철회하기도 어려운 노릇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업은 신뢰가 생명이기 때문에 상호 간에 감정이 상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됩니다.”
“휴, 저도 그 점 때문에 회장님께 말씀드리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지오쇼핑은 유통업계에서는 신생회사에 불과하니 엘마트와 마찰이 생긴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될 테니까요.”
유신은 한숨을 쉬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엘마트가 거대 회사라서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준 고마운 기업이라서 더 신경을 써야 되는 겁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신의를 잃으면 회복하기 무척 어렵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네, 회장님.”
‘맞는 말씀이시긴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뭐라도 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유신도 수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회사를 생각하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의리나 정과 같은 감정에 매몰돼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건 되도록 지양해야 될 겁니다.”
“방금 하신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사안은…… 양 기업 간의 약속이 걸려 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결론을 내기보다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유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켜본다는 말이 고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보겠습니다.”
“지오닷컴 때와 달리 회사 상황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옆에서 보필을 잘 해 드려야 되는데 유통 쪽은 처음이라, 배우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니는 실정입니다.”
그는 수혁의 부담을 덜어 주지 못한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SH커뮤니케이션 때는 자신있는 분야라서 능동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릴 때가 적지 않았으나, 지오쇼핑에서는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사장님이 계신 덕분에 제가 안심하고 다른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겁니다. 업무야 시간이 지나면 능숙해지기 마련이지만,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쉽게 구할 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편이 아니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합심해서 위기를 극복해 보죠.”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격려를 받은 유신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엘마트 건은 이 정도면 된 거 같고, 추가로 보고할 사안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넵, 회장님.”
수혁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 챈 유신은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일이 좀 잘 풀리는가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난 기분이네. 엘마트와의 협력 사업은 계륵과도 같아. 계속하자니 영 내키지가 않고, 그만두자니 마음에 걸리니 말이야.’
수혁은 턱에 손을 괸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이병섭 회장님께 전화를 드려 봐야겠다.’
지금으로선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수혁은 병섭에게 전화를 걸어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알아보고자했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회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저야 뭐, 회사 운영하느라 정신이 없지요.”
“이런, 바쁘신데 괜히 전화를 드렸나 봅니다.”
“아닙니다. 마침 쉬는 시간이라 통화하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병섭은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방금 박 사장으로부터 지점이 확대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하, 광고를 넣은 시점부터 고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현재 검토 중에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그건 그렇고, 대표님께서 광고를 기획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냥 컨셉만 잡아 줬을 뿐, 기획이라고 말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수혁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실, 지오쇼핑과 함께 일을 하면서 반신반의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내부 반발을 무릅쓰고 감행했던 프로젝트라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거든요.”
병섭은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지오쇼핑과의 협업을 찬성했던 인물이었다.
“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겠죠.”
“시작은 제힘으로 가능했을지 몰라도,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온전히 대표님과 지오쇼핑의 역량 덕분이지요. 비록 오프라인 매출에 비하면 낮은 수치이긴 하나, 온라인 매출이 크게 는 덕분에 임원들 사이에서도 지오쇼핑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수혁은 기분이 좋았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김호철 지점장님 기억하시죠?”
“네, 일전에 매장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찾아뵙기로 한 것 같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요.”
“최근에 있었던 회의에서 김호철 점장의 공이 작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누구보다도 지오쇼핑과의 협업을 반대하던 사람이었는데, 대표님을 만난 후로는 적극적으로 옹호를 하더군요.”
“감사한 일입니다. 나중에 따로 연락이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수혁은 호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한 사람의 목소리라서 그런가 임원들의 반향이 작지 않았습니다.”
“이게 다 회장님의 일관된 믿음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거,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병섭은 뜻밖의 칭찬에 멋쩍은 반응을 보였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양 회사가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아, 그리고 사업 외적인 일이긴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현재 우리 회사는 일송유통의 알력으로 인해 협력사를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회장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수혁은 회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일송의 타겟이 된 이상 타 회사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겁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수혁은 긴장한 상태로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나는 건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일송을 능가하는 회사를 우군으로 만드는 겁니다.”
“국내에 일송보다 나은 회사가 있습니까?”
“그나마 WG와 현우그룹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을 합해야 간신히 일송과 대적할 수 있으니, 사실상 없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군요…… 다음은 무엇입니까?”
‘날 놀리시는 건가?’
수혁은 순간 이병섭 회장이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었지만, 뒷이야기를 마저 들어 보기로 했다.
“둘째는 일송유통의 평판을 훼손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겁니다. 일송의 힘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유통사들은 말없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오너들 중에는 자존심이 강한 분들도 제법 있으시거든요.”
“그 말은 즉 일송유통의 치부를 찾아서 여론을 흔들라는 말씀이시군요.”
병섭의 말은 일전에 평우가 해 준 조언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금방 이해가 되었다.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회사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저것 알아보시다 보면 뭔가 약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대표님 뒤에는 저와 정 회장님이 있으니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지점 확대의 경우에는 이번 달 안으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수혁을 안쓰럽게 여겼던 병섭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쉬셔야 하는데 통화가 길어졌군요.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건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용건을 마친 수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래, 어른들 말씀을 들어야겠어. 일단 일송유통에 관한 정보를 한번 다 찾아보자.’
수혁은 옷걸이에 걸어놓은 롱코트를 걸친 뒤 회사를 빠져나왔다.
‘거창한 걸 바라기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부터 차근차근 알아보자.’
수혁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거라도 모두 시도해 보기로 했다.
“회장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
“죄송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게 아니라면 보고는 월요일 날 듣겠습니다.”
볼일을 보고 사무실에 돌아온 수혁은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든 채 회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뭐 때문에 저러시지?”
홍보팀장은 쏜살같이 사라지는 수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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