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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180화 (180/316)

180화

“공연은 잘 보셨나요? 다음으로 오찬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30분 남짓했던 축하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식사를 위해 근처 건물로 이동했다. 원래는 고급 뷔페에서 오찬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청사 식당에서 간단히 하기로 했다.

“대표님과 부회장님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수혁과 정명은 식당 안쪽에 있는 칸막이가 있는 식탁 쪽으로 안내되었다.

‘그냥 일반 식탁에서 먹어도 되는데…… 괜히 불편하네.’

원형 식탁으로 자리를 배정받은 수혁은 주변에 장관을 비롯한 여러 의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수혁 대표님, 보내 주신 무선 인터넷 사업안 아주 잘 읽었습니다. 어제 입상한 회사들의 기획안을 모두 검토했는데 SH와 WG에서 만든 게 단연 돋보였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장관님.”

“감사합니다.”

수혁과 정명은 박경수 장관의 칭찬에 겸손하게 반응했다.

“저는 이정찬 부회장님의 아이디어가 정말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IT 강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에 가장 어울리는 비전을 제시해 주셨어요.”

그때, 뒤에서 일송을 지원했던 문호는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열고 나섰다.

“저도 동감합니다.”

“공동 수상을 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있었죠.”

과학기술부에 속한 몇몇 의원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저보다는 회사 직원들이 고생했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정찬은 미소를 지으며 이들의 칭찬에 화답했다.

“일송에서 내놓은 기획안도 잘 봤습니다. 인터넷망을 보완하고 확대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확보해 IT 강국의 이미지를 유지하자는 방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경수는 본인이 수혁을 언급하자마자 주변에서 정찬을 치켜세우는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덕담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가 갖추고 있는 장점을 더욱 살리는 방안이 참 실리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관의 옆자리에 배석한 과학기술부 차관도 덩달아 정찬을 띄워 줬다.

‘일송이 뭐라고 다들 아부나 하고 앉아 있는 거야? 참 한심하군.’

박경수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의 교수 출신으로 대통령에 의해 특별 발탁된 인물이었다. 그는 장관직을 역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관계에 인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찬을 찬동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 자. 일단 식사들 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음식이 식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의원들과 관료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던 현제는 흐름을 끊었다.

‘훗, 위원장께서 우리가 거슬린 모양이군.’

당 대표 겸 위원장의 지위를 가진 현제의 말에 토를 달진 않았지만, 문호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보며 고소를 짓고 있었다.

“부회장님. 제가 기획안의 내용을 정확히는 알지 못해서 뭐라 평가하긴 그렇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굉장히 혁신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정찬은 정명에게 말을 건넸다.

“이 모든 건 강수혁 대표님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저희가 옆에서 도와드렸긴 했지만 주된 작업은 SH 측에서 도맡아 했습니다.”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지분이 적지 않다곤 하지만 통신, 인터넷 사업을 하고 있는 WG의 도움이 없었다면 사업성을 갖춘 기획안을 만들기 어려웠을 겁니다.”

수혁은 정명이 공을 자신에게 돌리자 손을 저으며 겸허한 모습을 보였다.

“하하, 양 회사가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 일송도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함께 잘해 봅시다.”

‘뭐야? 이명학이랑 다르게 되게 신사적이네?’

수혁은 정찬을 보며 명학과는 완전 딴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정찬은 수혁을 본인과 같은 급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명에게 말을 건넨 것이었다.

“맞습니다. 기업들 간에 꼭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내 시장을 넘어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동료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겁니다.”

현제는 오너들 간에 훈훈한 이야기가 오가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희 쪽이 내놓은 기획안은 사실 단순합니다. 전국에 깔린 통신망을 정비하고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이 골자거든요. 반면에 WG와 SH는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WIFI 기술을 활용하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에서 개발된 이 기술에서 IT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현재 무선망의 데이터 전송 속도는 유선 인터넷에 비하면 많이 느리지만, 매년 발전하는 기술의 속도를 봤을 때 충분히 일상생활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명은 수혁을 대신해서 정찬과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용화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실현될 수만 있다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실용화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이야기를 듣던 박경수 장관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현재 무선 인터넷 통신망 사업은 무주공산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발을 선점하면 앞서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실생활에서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는 수요가 많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오호, 이런 식으로 공격할 줄은 몰랐는데?’

시종일관 매너 있는 모습을 보여 줬던 정찬이었지만, 지금은 은근히 SH의 기획안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하긴, 인터넷을 무선으로 사용할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집이나 회사에서는 다들 유선 인터넷을 쓰는데.”

“맞아요. 혹시 다른 곳을 가더라도 랜선을 챙겨 가면 되는데 국민들이 이용이나 할까요? 통신망을 구축하려면 거액의 비용이 들 텐데 이거 괜히 혈세만 낭비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건수를 잡은 문호와 몇몇 의원들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흠, 기획안에 무선 인터넷에 관한 예측·수요 자료가 있어서 사업성을 갖춘 줄 알았는데 여러분들 말씀을 들어 보니 가볍게 여길 사안은 아닌듯합니다.”

경수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정찬이 집어내자 고민에 빠졌다. 대상에 선정된 기획안은 정부에서 광범위하게 지원해 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시상식이 끝난 마당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외람된 줄은 알지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양쪽에서 내놓은 기획안은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예산이 둘로 분산되어 안타깝던 참이었는데…….”

“정 의원, 거기까지만 하세요. 의견을 내놓는 건 좋지만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

현제는 문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의 입을 막았다.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무선망에 대한 수요는 적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이 무선 인터넷을 많이 사용할까요?”

“그건, 크흠…….”

정명은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변호를 했지만 정찬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스마트 폰이 생산되면 다 해결될 일인데 이 자리에선 말을 못 하니 참 답답한 노릇이네.’

WG와 SH가 스마트 폰 제작에 나선 것은 회사 기밀 사안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선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와이파이에 관한 컨텐츠가 기획안에 들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건 근거리 무선망인 WIFI가 아니라 무선 네트워크입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수혁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어찌 됐든 부회장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획안의 주된 내용이 와이파이인 것처럼 언급하신 걸 정정해 드린 것뿐입니다.”

문호는 유리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수혁을 몰아붙였지만, 수혁은 여유롭게 대응했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여우같은 놈. 점잖은 척하는 건 다 위선이었어. 치고 빠지는 게 아주 능숙한데?’

수혁은 적절한 타이밍에 사과하는 정찬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고작 단어 하나 가지고 사과까지 하십니까?”

“허허,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요.”

일송으로부터 은밀히 후원을 받는 의원들은 정찬의 위신을 살려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러분들껜 작은 실수이지만 누군가에겐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것보다 강 대표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한 정찬은 은근슬쩍 수혁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네, 맞습니다. 무선 인터넷의 수요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정찬은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전에 예를 들라고 하셔서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핸드폰으로도 간단한 게임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술은 이미 개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와 있습니다. 무선 인터넷을 활용해서 간단한 동영상과 게임을 실행하는 건 지금도 가능합니다.”

수혁이 말을 꺼내자 정명은 맞장구를 치며 흐름을 바꾸려고 했다.

“그렇긴 하지만 비용 문제 때문에 수지가 안 맞지 않습니까?”

정찬은 핸드폰 사업부를 총괄하고 있었기에, 고객들이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프라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게 되면 무선 인터넷 사용료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선 인터넷의 효용은 핸드폰 사용자들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집이 아닌 카페에서 노트북을 사용하는 걸 상상해 보세요. 국민들에게 돌아갈 편익이 쉽게 예상되지 않으십니까?”

“경영자는 확실한 수치에 근거해서 경영적 판단을 내려야지, 상상력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정찬은 수혁의 말을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과거에 애니악이라는 컴퓨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물건을 어디다 쓸 건지 궁금해했지요.”

애니악은 1946년 미국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무게가 30톤에 달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었다.

“애니악도 그렇고, 이후에 나온 컴퓨터들이 대부분 공업용 컴퓨터였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했겠지요. 후, 그런데 뜬금없이 애니악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질문을 받은 정찬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잘 아시네요. 공업용 컴퓨터가 대부분이던 시절 미국의 청년 CEO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게 됩니다. 기기를 소형화해서 전국에 있는 가정에 컴퓨터를 놓겠다는 포부로 사업을 시작한 거지요.”

미국의 한 유명 CEO는 집집마다 컴퓨터를 구매하게 만들겠다는 비전을 세운 뒤 사업을 개시했고, 큰 성공을 거둬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업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했지만 사업적 상상력을 발휘한 CEO 덕분에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PC 제조 국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부회장님과 달리, 사업가에게는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미소를 지으며 정찬을 쳐다봤다.

- 18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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