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163화 (163/316)

163화

“방법이라면……?”

유신은 수혁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대가 됐다.

“어제 분명, 해결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물론 기억은 합니다만, 이렇게 빨리 방법을 찾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사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한번 살펴봐 주세요.”

수혁은 서랍에 넣어 둔 커다란 종이를 꺼냈다.

“아니, 이건…….”

“어제 이걸 그리느라 밤을 새웠습니다. 어떻습니까?”

“……대표님이 대단하신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재주도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유신은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자, 지금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이건 건물의 외형을 그린 건데, 많은 차량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하차장 쪽 디테일을 조금 살려봤습니다. 이쪽 부분을 보시면…….”

수혁은 회귀하기 전에 알바했던 기억을 살려 창고의 기능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언제 이런 것까지 다 고민하셨습니까? 안 그래도 이영섭 전무가 제일물류의 물류창고를 보여 주겠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호의를 베풀 때 거절하면 상대 입장에선 많이 민망할 겁니다. 기왕 제안이 들어온 것, 받아들이고 가서 견학해 보세요.”

“공사가 며칠 더 늦춰질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답신을 보내, 견학 일정을 잡겠습니다.”

유신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유연하게 생각하면, 공사 일정이 늦어질 일은 없습니다. 일단, 제가 준 이 그림을 건설사 관계자에게 넘겨준 다음에 추가로 수정할 사안이 있을 때만 추후 논의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일물류의 물류창고를 살펴볼 땐, 제가 설명한 기능들과 면밀히 비교해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창고와 물류설비의 대략적인 크기도 안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제가 비록 건축에 대한 지식은 없으나, 도면을 그릴 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혁은 손으로 그림을 짚어가며 말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작업에 착수해서 2월 중에 공사에 들어가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나가실까요? 사람들이 기다리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수혁은 벗어 놓은 외투를 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

“다 챙겼나요?”

“네,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유신은 수혁이 미리 준비해 놓은 화통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대표님, 차량이 아래 준비되어 있으니, 그걸 타고 가시죠.”

“알겠습니다.”

찬명을 만난 수혁은 그의 안내에 따라 고급세단에 탑승했다.

‘이제 나도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 보는구나.’

그는 말없이 창문을 보며 호텔로 이동했다. 이날 SH그룹 임원들은 다른 계열사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다졌고, 연회를 위해 마련된 음식들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2002년 새해가 되었다. 수혁은 여러 프로젝트를 총괄하느라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후, 코드 정리부터 지오쇼핑 관리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는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아예 대표실에 상주하고 있었다. 하루 중 대부분을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1월 한 달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부지 선정은 완료됐고, 오늘부터 건설사에서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2월의 어느 날, 유신은 보고를 하기 위해 대표실에 찾아왔다.

“수고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을 훌륭히 처리하셨군요.”

“하하, 대표님이 여러모로 힘써 주신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첫 삽을 뜰 수 있었습니다.”

유신은 밝게 웃으며 공을 수혁에게 돌렸다.

“현재 우리 회사는 지속적인 성장세에 있지만, 한동안 새로운 수입원 발굴에 신경을 못 쓰고 있었습니다. 현상 유지를 넘어, 회사의 덩치를 지금보다 더 키우려면 지오쇼핑의 성공은 필수입니다.”

“그 점, 유념하겠습니다.”

“현재 공사가 들어간 곳은 어딘가요?”

“제일물류가 거액을 투자해 준 덕분에 광역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공사를 한꺼번에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할 겁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류센터가 완공되기 전까지 제조업체들과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 부분도 제일물류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석호는 제일물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제조사들을 SH와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지오쇼핑 사이트를 만드는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SH커뮤니케이션 개발팀에 일을 맡기려고 했지만, 차라리 개발팀을 따로 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인력들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자꾸 보채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지오쇼핑이 정상적으로 영업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혁은 스마트 폰이 출시되기 전에 지오쇼핑을 시장에 안착시켜 놔야 된다고 생각했다.

“완공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빨라도 내년 중순쯤은 되어야 서비스를 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못해도 올여름 안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드세요. 내년 중순이면 너무 늦습니다.”

유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수혁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저 죄송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영섭 전무랑 이야기 안 해 보셨습니까? 정석호 회장님이 우리에게 물류센터와 택배 인력을 제공해 주기로 했었는데, 흠…….”

“정 회장님께서 그런 약조를 하셨습니까?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유신은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직 이 전무에게까지 의견이 전달되진 않았나 보군요. 회장님은 우리가 유통망을 구축하기 전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공사가 완공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촌음을 아껴 사업을 진행하세요.”

“네, 서버 관리팀과 개발팀 인력 채용이 끝나면 바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이 외에도 제조업체 관계자들과 만나, 제휴 관계를 맺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제가 드린 사업 기획안을 보시면, 우리 회사를 통해 물건을 판매했을 때 큰 수익이 난다는 근거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을 관계자들에게 잘 설명해 주려고 했습니다. 보니까, 거래 수수료를 제하더라도 타 유통 업체를 이용했을 때보다 제조업체에 이득이 되는 부분이 많더군요.”

수혁이 기획한 온라인 쇼핑몰은 직거래를 통해 비용을 줄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거래 수수료도 타 업체에 비해 낮게 책정하여 제조사가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게끔 했다.

“맞습니다. 내용들을 잘 숙지하셨다가 관계자들을 만나면 이야기해 보세요. 적지 않은 회사들이 관심을 가질 겁니다. 그리고 제일물류에서 소개해 주는 업체들 외에 다른 제조사들하고도 접촉하세요. 상품 가지 수를 많이 확보해 놓아야 운영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겁니다.”

“넵, 제가 직접 사람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혹시 또 논의해야 할 것이 있나요?”

수혁은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슬슬 대화를 마치려고 했다.

“아닙니다, 더 이상 보고드릴 건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좀 되는군요.”

“뭐가 말입니까?”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유신을 쳐다봤다.

“제가 유통 쪽은 처음 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미숙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꾸 대표님께 의지하게 되네요.”

“뭐 어떻습니까? 다들 하나씩 배우면서 익혀나가는 겁니다. 당분간은 회사 주요 사안들을 처리할 땐 저랑 상의하도록 하죠.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제가 지시사항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기소침해진 유신은 작게 대답했다.

‘하, 내가 알아서 해야 되는 건데…….’

그는 부담을 덜게 되어 안심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수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 회사가 박 사장님에게 신세 진 게 적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도 박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신은 수혁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았다.

“현재도 잘하고 계시니까, 지금처럼만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만 들어가서 일 보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유신은 수혁에게 인사를 한 뒤 대표실을 떠났다.

* * *

대전의 일송유통 지점, 명학은 오만상을 쓰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재수가 없냐? 지방에 온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일은 왜 이렇게 많이 주는 거야?’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저, 상무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노크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명학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이고, 오시자마자 고생이 많으십니다.”

“오 부장, 무슨 일이야?”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남성은 손을 비비며 아부를 떨었다. 그의 이름은 오명규로 명학에게 잘 보여 출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자였다.

“다른 게 아니라,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이런 젠장! 내가 호구로 보이나, 왜 이렇게 자꾸 뭘 시키는 거야?”

명학은 대전 지점에 온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라는 거야?”

“흐흐, 들어 보시면 상무님한테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명규는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뭔데? 말해 봐.”

“제가 사장님께 상무님도 현장을 좀 둘러봐야 하지 않겠냐고 건의했더니, 흔쾌히 들어주시더군요.”

사장은 대전에 있는 지점들을 총괄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일송유통의 회장인 이정수에게 특별지시를 받아 명학을 보살피고 있었다.

“뭐?! 너, 지금 날 일부러 엿 먹인 거야?”

자신을 약 올린다고 생각한 명학은 몸을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전 단지, 상무님을 위해서…….”

“날 위해서라고? 만약에 괜히 날 열 받게 만들려고 한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그건 오해십니다. 전 상무님께서 사무 업무에만 치중하다 보니 현장을 놓치고 있다고 말씀드려, 격무에서 벗어나실 수 있도록 해 드린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장이 뭐래?”

명학은 표정을 풀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지점에서 서류 업무는 많이 본 것 같다며, 남은 기간은 현장 시찰을 도는 거로 마무리하자고 하셨습니다.”

“그게 나한테 뭐가 좋은데?”

‘이렇게 말해 줘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그는 명학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공손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오늘부터는 서류를 들여다보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진짜야?”

명학은 흥분하여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현장 시찰의 경우 업무 감독 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돌아다니시면서 대접만 받으면 됩니다.”

“그래, 이거지. 드디어 제대로 된 경영 수업을 받는구나.”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명학은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 16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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