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후 뭔가 답답하네,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수혁은 구태여 누군가와 사귈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간에서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온 거야?’
행사가 열리고 있는 홀에서 빠져나온 수혁은 회관 복도에서 중년의 여성을 발견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수혁아 잘 지냈어?”
한 눈에 보아도 비싼 명품으로 온몸을 무장한 여성은 과거 수혁과 트러블이 있었던 현숙이었다. 그녀는 미희와 남편이 모두 대연의 멤버였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네,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수혁은 현숙과 말을 섞기 싫었지만, 미희가 대연 총회에 참석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우리 엄마랑 아버지한테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지만 어쩔 수 없군.’
수혁은 그녀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최대한 마찰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듣자하니, 사업을 한다면서?”
현숙은 미희에게 종종 수혁의 근황을 묻고 있었다.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사업 수완이 있는 녀석이었어. 나중에 우리 미희한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친하게 지내야지.’
그녀도 수혁이 내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딸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하여 철판을 깔기로 했다.
“네.”
수혁은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SH스터디랑 지오닷컴이 너희 회사 거라면서? 정말 대단하다. 달동네에서 허우적거리던 아이가 이렇게 멋지게 크다니.”
“뭘 안다고 제가 허우적댔다고 그러십니까?”
수혁은 현숙이 생각 없이 말하자 차분하게 일침을 놓았다.
“아니, 뭐 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 거지. 널 기분 나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달동네에 살면 허우적대는 거고 좋은 동네 살면 폼 나게 사는 겁니까?”
“쳇, 이래서 내가 너랑 이야기 안 하려고 했다니까? 얘, 어른이 말을 하면 좋게 좀 들어라, 그렇게 고깝게만 들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수혁이 달동네 출신인 것을 알고 있는 현숙은 그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에는 무시하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도 변한 게 없군요. 본인이 실수해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 버릇 말이에요.”
“뭐? 버릇? 이 녀석이 보자보자 하니까!”
현숙이 언성을 높이자 그녀의 째진 목소리는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다행히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아무도 이들 사이에서 언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자는 없었다.
“옛날부터 능력이나 집안으로 사람을 무시하셨지 않았습니까? 기억나세요? 저한테 자신의 분수를 알라고 그러셨잖아요. 사회에 나오면 말도 못 섞을 놈이라고 그러면서.”
수혁은 타인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그래서 뭐? 막말로 내가 틀린 말 했니? 어디 하찮은 놈이 돈깨나 벌었다고 건방을 떨고 있어?”
“아줌마 기준으로 보면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무리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수혁은 이성을 잃은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싸가지 없는 놈. 저번에 식당에서도 지네 애비 앞에서 똥오줌을 못 가리더니, 여기까지 와서 사람 성질을 건들이네? 야, 갑자기 출세하니까 세상이 다 네 것처럼 보이냐? 어디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려!”
“어디 돼먹지도 못한 년이 뭐라고 하는 거야?”
수혁은 그녀가 아버지를 들먹이며 이야기를 하자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뭐, 뭐라고??”
“말 못 들었어? 능력도 없는 년이 남편만 믿고 왜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해?”
“아니 이게?”
국내에서 알아주는 명문대를 나온 현숙은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대형로펌에서 일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의 친구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스스로 돈을 벌은 적은 없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입니다. 무시당하니 기분 더러우시죠? 그니까 앞으로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갖추고 진심으로 대하라 이 말입니다.”
“야, 네가 뭔데 예의를 운운하고 난리야? 너 같이 천박한 놈이 그런 말 하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역겨운 자식.”
또래 여자 동기들이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속으로 부러워했던 현숙은 약점을 공격당하자 약이 단단히 올랐다.
“휴, 말이 안 통하네. 사람 같아야 대화를 하지 원.”
“이 녀석이?”
수혁과 그녀의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때 한 목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수혁아 뭐해?”
“그냥 바람 좀 쐬려고 나왔다가 아줌마랑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들에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보성이었다. 그는 행사장 안에 수혁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보성은 수혁의 옆에 있는 현숙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응, 그래. 보성아 미희랑은 잘 지내고 있지?”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싹 바꾸었다.
“네, 미희도 그렇고 동기들이랑은 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여기 오는데 큰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보성은 현숙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지만 짐짓 모른 척하며 물었다.
‘잘 됐다. 이런 놈은 이번 기회에 혼 좀 나봐야 해.’
현숙은 기회를 포착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마침 잘 왔어 보성아. 너랑 아는 사이인 거 같은데 네가 한마디 좀 해줘라. 이 녀석 때문에 너무 속상하다. 아까 나한테 반말을 해가며 돼 먹지 못한 년이라고 욕까지 하더라고. 네가 회장이니까 이 일을 그냥 지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현숙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보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설마요. 제가 수혁이를 아는데 이유 없이 어른한테 그러는 애는 아니에요.”
“보성아, 넌 어떻게 쟤 편을 들 수가 있니?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잘 챙겨줬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음,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
이야기를 듣던 보성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회장이니까 조치를 취해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처음 참석하는 거라도 그렇지, 어디 하늘 같은 선배 부인에게 입을 함부로 놀려?”
그녀는 수혁이 게스트 자격으로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줌마가 먼저 선을 넘으셨고 제 아버지까지 모욕했잖아요. 휴, 아니다. 보성아 나 그냥 먼저 갈게, 짜증이 나서 더 이상은 못 있겠다.”
수혁은 이 상황에서 굳이 변명을 하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 죄송한데요. 제가 오면서 아주머니가 욕하신 것도 들었는데 그냥 서로 사과하고 끝내는 건 어때요?”
“너 지금 쟤 편드니?”
“수혁이는 아직 대연 회원이 아니라 제가 회장이어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그러세요?”
보성은 쌍심지를 돋우며 말하는 현숙에게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회원도 아닌 사람이 여기 있는 게 정상이니?”
“하, 수혁이는 여러 선배들의 요청으로 이곳에 온 겁니다. 아주머니 이제 들어가세요. 보니까 선배께서 찾으시는 거 같던데.”
보성은 현숙의 남편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너 말 잘했다. 우리 남편이 신평에서 일하면서 너희 회사 일 처리해 준 건 다 잊어버린 거야? 그리고 우리 그이랑 현 회장님이 친한 건 알고 있지?”
현숙은 어떻게든 수혁을 궁지로 몰기 위해 되는 데로 말을 뱉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할아버지는 수혁이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계셔서 아줌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소용없을 거예요.”
‘미희네 아버지가 신평에서 일하고 있었어? 잘 됐다. 이 기회에 버릇을 고쳐야겠어.’
자리를 뜨려고 했던 수혁은 현숙이 신평 법무법인을 언급하는 것을 듣자 생각을 바꿨다.
“아줌마, 김형석 변호사님 아세요?”
“뭐? 네가 그 분을 어떻게 알아?”
씩씩거리며 흥분을 하던 현숙은 수혁이 뜻밖의 이름을 꺼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형석 변호사님이 저하고 굉장히 친하거든요. 참고로 제 회사들은 모두 그분의 케어에 따라서 법적인 사무를 처리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제가 오랫동안 연락을 못 드렸지만, 김형석 변호사님은 절 아들처럼 챙겨주시거든요.”
“…….”
남편의 성공에 의지해 기세등등하게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수혁은 그런 현숙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편이 어떤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해서는 김형석 변호사님 말을 거역하기 힘들 거야.’
현숙이 그렇게 자랑하던 남편은 신평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석은 신평의 대주주임과 동시에 대표변호사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저와 제 아버지를 모욕하고 무시했던 건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 약속드리죠. 앞으로 제 힘이 닿는 곳이라면 아주머니가 원하는 것들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볼 수 없을 겁니다.”
‘안 돼, 조금만 버티면 대표 변호사로 승진할 수도 있는데 일을 그르칠 수 없어.’
로펌의 대표 변호사는 오너를 제외하면 한 두 명의 특별한 변호사들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다.
게다가 신평과 같은 국내 최대 로펌의 대표 변호사는 국내 최고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왜 갑자기 말이 없죠? 혹시 남편 분한테 피해가 갈까 봐 걱정인가요? 와, 신기하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확 변하냐?”
수혁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조롱했다.
“그, 음. 내가 말이 심했던 거 같은데 미안하다.”
현숙은 처음으로 수혁에게 사과를 했다. 왜냐하면 대표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오너와 현직에 있는 대표 변호사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과를 참 빨리도 하시네요.”
수혁은 풀이 죽은 현숙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아냥댔다.
“네 말대로 내가 예의가 부족했던 거 같다. 앞으로 주의하마.”
“이미 늦었어요. 앞으로 아줌마 집안에 무슨 일이 있든 그건 다 아줌마 때문인 것만 아시면 돼요. 보성아 들어가자.”
“응, 알겠어. 아줌마, 좀 있다 봐요.”
수혁은 보성을 데리고 홀 안으로 다시 들어갔고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한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테이블에 다시 앉은 수혁은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며 불쾌한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수혁아, 그래도 미희 어머닌데 어떻게 할 거야?”
“나도 모르겠어, 두고 봐야지 뭐.”
수혁은 마음 같아서는 형석에게 연락하여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주고 싶었지만, 미희가 마음에 걸려 당장은 지켜보기로 했다.
“보성아, 너 진짜 강 대표님을 모셔왔구나? 반갑습니다. 저는 일영이라는 회계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김성훈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SH의 강수혁입니다.”
총회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보성에게 수혁을 데려오라고 보챘던 선배들이 하나둘 모여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들과 맞인사를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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