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미희야 뭐해? 곧 모일 시간이잖아?”
그녀에게 말을 거는 자는 오티에서 명학의 옆에 있었던 남자였다. 그는 미희를 찾으러 왔다가 수혁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오늘 동기 모임 있는 거 잊은 건 아니지?”
“알았어, 금방 갈게.”
“빨리 와. 안 그러면 먼저 간다.”
남자는 미희와 대화를 마친 뒤 카페를 나갔다.
“너도 오늘 모임이 있었네? 어서 가봐야겠다.”
“그러게 수혁아, 미안해 나중에 여유 될 때 또 보자.”
“아 근데 혹시 그 모임에 이명학도 있어?”
“어? 이명학을 어떻게....... 아 맞다, 걔 너랑 같은 과지?”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짓던 미희는 상황을 금세 이해했다.
“같은 과긴 한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놈이야. 그것보다 약속 늦겠다, 다음에 보자.”
“그래. 또 연락하자!”
수혁은 미희를 보내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대충 어떤 모임인지 짐작이 가네. 후,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
알음알이 모임 시간이 거의 다 되감을 확인한 수혁은 카페를 나와 동아리 천막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니 찬명을 포함한 부원들은 짐을 거의 다 정리한 상태였다.
“오셨어요? 지금 거의 다 끝나갑니다. 오기로 한 신입회원들 좀 더 있으니까 기다렸다 같이 가요.”
“네, 천천히 하세요.”
수혁은 근처 벤치에 앉아 작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곧 정리가 끝나고 신입회원들이 다 모이자 그들은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회식장소는 대학가에 있는 평범한 술집이었다.
“자, 다들 모였으니까 먹고 싶은 것 시키시고 다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 하기로 하죠.”
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자기소개를 하였고 그 뒤에는 시계방향 순서로 진행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좋은 인연도 만나고 의미 있는 학교생활을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수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가볍게 자기소개를 했다.
소개시간이 끝나자 주문한 안주와 맥주가 상에 차려졌고 모두들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지만, 중간에 찬명이 테이블들을 돌아다니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수혁씨, 1학년이면 20살이시죠? 괜찮으면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찬명은 3학년이었는데 중간에 군대도 다녀오고 돈 벌려고 휴학도 하여 현재 26살이었다.
“네, 얼마든지요.”
수혁은 흔쾌히 찬명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는 술자리가 제법 진행된 상태라 살짝 취한 상태였다.
“그래, 수혁아. 너는 뭐하려고 여기 온 거야?”
그는 술기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저는 이번 기회에 형이랑 친해지고 같이 일 좀 해보고 싶어서 왔어요.”
수혁은 맥주잔을 비우며 속내를 밝혔다.
“하하 이렇게 잘생긴 후배가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기분 좋은데? 그건 그렇고 몇 몇 여자애들이 자꾸 너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진 찬명은 다른 테이블의 여자애들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가요? 저는 여자애들보단 형이랑 대화하고 지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자식, 그러면 앞으로 친한 형 동생으로 지내자.”
수혁은 그날 밤 다른 사람들보다는 찬명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는 술자리가 파할 무렵 찬명과 번호를 교환했고 대학가 근처에 있는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갔다.
‘일단 찬명이 형에게 공을 들여야겠다.’
술자리 이후 수혁은 찬명에게 종종 연락하여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친해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수혁아 이번에는 형이 살게.”
“아니에요, 저번에 형이 사주셨는데 제가 사야죠.”
그들은 대학가에 있는 고기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휴, 처음에 한 번 사준 거 말고는 거의 너한테 얻어먹기만 한 것 같은데?”
“나중에 저한테 더 잘해주시면 되요.”
“하하, 알았어 수혁아.”
찬명은 동아리 회장이고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느라 바빴지만, 왠지 모르게 수혁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수혁이 어플을 통해 매력과 운 스텟을 충분히 올린 영향이 컸다.
거의 매일 찬명과 만나다시피 한 수혁은 목요일 수업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칸타빌레에 갔다.
‘슬슬 일을 좀 해볼까?’
수혁은 시간표를 짤 때 금요일에는 수업이 없도록 했기 때문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점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 계획서를 제대로 만들어 봐야겠어.’
수혁은 알음알이에서 찬명을 만난 이후로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세울 수 있었다.
‘형의 인적 자원을 잘 활용하면 SH스터디에 크게 도움이 될 거야.’
수혁이 요 며칠 동안 찬명과 시간을 들여 친분을 많이 쌓은 것도 그를 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찬명의 품성과 자질을 살펴봤는데 의리가 있고 친화력이 좋아 사업을 같이 꾸려나가기에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고 같이 일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수혁의 통찰력은 34에 달했기 때문에 자신을 철저히 숨기려는 사람이 아닌 이상 상대방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 많이 발달 되어 있었다.
그는 공을 들여 사업 계획서를 작성한 뒤 미리 작성해놓은 견적서를 적절하게 수정했다.
‘사무실 임대비용, 서버 구축비용, 촬영기기, 각종 사무용품까지 빠진 부분이 있으면 지금 채워놓자.’
비용 항목을 작성한 수혁은 정확한 견적을 뽑아내기 위하여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어 경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경현아, 나야.”
“와, 오랜만이다 수혁아. 잘 지내지?”“난 항상 잘 지내지. 것보다 내가 부탁할 게 있어서 연락했어.”
경현은 작년 12월부터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부동산에 관한 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예상보다 업계에 금방 적응했고 점점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데 수혁아, 말해봐.”
“내가 노량진 근처에 사무실을 얻으려고 하는데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서울의 큰 학원가는 대체로 강남과 노량진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수혁은 임대비용이 비싼 강남보다는 노량진에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응, 알아봐줄 수 있지. 어느 정도 크기의 사무실을 원하는데?”
수혁은 경현에게 사업에 필요한 사무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고 경현은 알아봐 준다고 이야기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 외에도 인터넷으로 다른 항목들에 들어가는 비용들도 상세히 알아보았다.
때때로 전화를 하여 문의하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으며 견적서의 내용을 하나하나 채워갔다.
“응 고마워, 알겠어.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보자.”
경현은 노량진 근처의 부동산을 알아본 다음 가성비가 좋은 사무실을 수혁에게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가장 걱정했던 서버구축 비용이 예상보다는 크게 들지 않아 걱정도 한시름 덜을 수 있었다.
‘홈페이지 제작은 직접 하면 되고 서버 구축하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네? 그런데 문제는 현재 내가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건데......’
수혁은 견적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업을 시작하는데 들어가는 총 비용은 1억 2천 정도로 수중에 3천밖에 없는 그로서는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돈으로 싼 부동산이라도 알아볼까? 아니면 주식을 하면 어떨까?’
2000년대 당시에는 온라인 게임 붐이 크게 일고 있었다. 수혁은 게임 관련 회사 주식을 사서 돈을 벌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주식이 오른다고 해도 1억 상당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최대한 빨리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루하루가 아쉬운데 참......’
당장 사업을 개시하고 싶었던 수혁은 단기간에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해보았다.
이제는 대학을 다니는 상황이라 예전처럼 스파링을 뛰면서 돈을 벌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할 수 있는 거라도 해보자. 딱히 방법이 없잖아.”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수혁은 혼잣말을 하면서 컴퓨터를 다시 켰다.
그는 일단 자신의 주 수입원인 번역작업을 하고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여 돈을 벌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 때문에 밀어놨던 주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수혁은 우진이 주었던 CD를 컴퓨터에 놓고 출판이 가능한 자료를 찾아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후, 최대한 빨리 해보자.’
수혁은 목요일 저녁부터 잠을 거의 자지 않다시피 하며 번역을 했다.
그는 총 두 권의 고서를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쉬지 않고 15시간 이상 번역에 매달린 결과 토요일 밤쯤에 첫 번째 고서 번역을 완료했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은 어차피 증권회사들이 문을 열지 않는다. 주식은 월요일 날 사러 가고 내일은 두 번째 책을 번역해야겠다.’
3일 가까이 엄청난 페이스로 번역을 했던 수혁은 체력에 부담을 느꼈다. 그는 샤워를 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 점심이 다 돼서야 눈을 떴다.
‘바로 시작해야겠다.’
수혁은 근처 마트에서 컵라면을 사와 대충 먹은 다음에 두 번째 고서를 위한 번역작업에 들어갔다.
책의 제목은 ‘망국록’이었는데 저자는 나라가 망하고 몰락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수혁은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하며 서론부분을 타이핑 했다.
‘이씨 성을 가진 자에 의해 나라가 세워지고 나의 조국 고려는 멸망했다. 이 책은 나라가 멸망한 후 탄압을 받았던 상처받은 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서론을 읽은 수혁은 이 책이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살았던 고려시대 귀족이 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용을 보니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뒤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의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갔다고 한다.
따라서 개국에 공헌했던 몇 몇의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망국의 귀족이 쓴 책이라 제목이 망국록이구나. 좀 더 읽어 볼까?’
수혁은 번역을 하며 책을 자세히 읽어 나갔다.
‘이성계는 고려의 남은 후예들을 샅샅이 잡아들였고 우리들은 살림살이와 노비들도 버려둔 채 깊은 산속이나 타국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러나 철저한 색출작업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 관군에 잡혔고 남은 귀족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불쌍하군.’
수혁은 내용을 읽을수록 그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저자가 가족들을 이끌고 피신하는 장면과 관군에게 쫒긴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책의 중반부에 돌입했을 때 쯤 흥미로운 내용이 발견 되었다.
‘조국 땅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깊은 산속에 숨어도 곳곳을 뒤져 찾아내고 명나라로 도망가도 압송되어 잡혀오니 그물에 갇힌 고기의 신세로다. 하지만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들은 고민 끝에 살 방도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수혁은 뒷부분을 더 읽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퀘스트창이 활성화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프로그램이 또 뭔가를 발견한 건가?’
그는 퀘스트의 내용을 먼저 확인해보기로 했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고서의 내용을 참고해서 고려인 마을을 찾으십시오.>
‘고려인 마을? 이 남한 땅에서 찾을 마을이 더 있나? 아니다 일단 내용을 더 읽어보자.’
수혁은 먼저 고서를 완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섬에 가는 것이었다. 이 땅의 서쪽 바다에는 못해도 수천 개의 섬이 있고 대부분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만약 그곳에 가서 정착하게 된다면 관군들도 우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고서의 뒷장을 보니 어설프게 그려진 지도가 있었고 서해의 어느 섬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몰락한 고려의 귀족들은 서해에 위치한 무인도로 이주를 했는데 그들은 이곳을 ‘칠부도’라고 했다.
고서에는 섬의 특징과 섬 안에 형성된 마을의 위치가 서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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