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뭐야 저 표정은? 날 지금 얕보는 거야?’
남자는 경기에 집중하며 진지하게 시합에 임하고 있었지만 수혁은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죽도를 세게 쥔 채 스텝을 밟고 빠르게 돌진했다.
바로 그때, 수혁은 죽도를 휘두르더니 순식간에 상대의 손목과 어깨를 쳤다.
“경기 끝.”
신우는 상호간에 실력 격차가 극심한 것을 확인하고 시합을 끝내버렸다.
“저....... 아직 3점은 안 된 것 같은데요?”
남자는 호구를 벗으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어차피 해도 안 될 것 같아서 중지시킨 거야. 네가 먼저 공격했는데도 먼저 타격을 적중시킨 사람을 네가 어떻게 이기냐?”
“.......”
신우는 후배에게 핀잔을 주었다. 딱히 할 말이 없던 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으며 호구를 벗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인사도 안하고 그냥 가네? 나도 나가야겠다.’
수혁은 머리에 쓴 호구와 들고 있던 죽도를 신우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런데 그는 갑작스럽게 시합을 제안했다.
“스피드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거기에다 스피드에 걸맞는 정확한 타격까지 실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괜찮으시면 저와도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신우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검도를 하여 검도 4단을 취득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는데 수혁의 검도 솜씨를 보고 호승심이 생겼다.
“그러죠, 뭐.”
수혁은 짧게 고민을 한 뒤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는 경기를 위해 죽도를 휘두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신우도 호구를 차고 시합을 위한 예열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체구를 지닌 그가 죽도를 휘두르자 공기 중에 훅훅 소리가 크게 났다.
“수혁아, 저 소리 들려?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기세에 눌린 찬식은 토끼 눈이 되어 신우를 쳐다봤다.
“뭐든 해봐야 알지 않겠어?”
수혁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시합은 내가 무조건 이긴다.’
사실 수혁은 통찰력의 능력을 활용하여 상대 실력에 대한 가늠이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스피드는 내가 뒤진다. 힘으로 밀어 붙여야겠어.’
신우는 몸을 풀며 생각했다. 그는 시합을 개시하기에 앞서 뭔가 말하고 싶은지 우물쭈물 대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 하는 분한테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정식으로 붙고 싶습니다.”
“네? 그건 안 되죠!”
신우의 말을 들은 찬식은 깜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정식으로 경기를 한다는 것은 머리치기와 목 찌르기 등을 허용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호구를 찼다 해도 신우와 같은 거구에게 머리를 가격 당하면 충격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상관없습니다. 준비는 되셨나요?”
수혁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매트 위에 올라섰다.
신우도 머리에 호구를 차고 준비자세를 취했다.
찬식은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잔뜩 긴장한 채 경기를 지켜봤다.
“시작하겠습니다.”
“네.”
신우는 말을 함과 동시에 수혁에게 달라붙어 죽도를 수혁의 죽도에 바짝 갖다 대었다. 그는 스피드로 승부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힘으로 수혁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혁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그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뭐지? 꿈쩍도 안하잖아?’
신우는 무게를 이용하여 수혁을 누르려고 했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버티고 서있던 수혁은 손목에 힙을 주어 반대로 신우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윽.”
신우는 힘으로 버텨내려고 했지만, 상대의 죽도에서 넘어오는 커다란 압력에 한쪽 무릎을 구부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혁은 신우를 제압한 것을 확인하자 죽도를 뗌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신우는 타격을 맞고 조금 주춤거렸지만,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호구를 벗었다.
“제가 졌습니다.”
신우는 시합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패배를 시인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거 아닌가요?”
수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스피드, 힘 어느 것 하나 우위를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시합에 굳이 힘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우는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사실, 제가 이기면 검도부에 들어오라고 권유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어서 아쉽네요.”
“아닙니다. 저도 많이 배웠고 나중에 볼일이 있으면 찾아가겠습니다.”
이들은 경기가 끝난 뒤 덕담을 나눴고 얼마 있지 않아 수혁과 찬식은 천막을 빠져나왔다.
“완전 대박인데? 네가 검도를 그렇게 잘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참나, 됐어.”
찬식은 호들갑을 떨며 왁자지껄 떠들어댔고 수혁은 그저 말없이 들을 뿐이었다.
동아리 구경을 거의 다 했을 때 쯤 알음알이라는 동아리가 수혁의 눈에 띄었다.
“저 동아리는 뭐하는 데야?”
수혁은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까 들어보니까 홍보하는 사람이 막 돈 벌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모으던데?”
찬식은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을 했다.
‘돈을 벌게 해준다고?’
수혁은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알음알이를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순간 찬식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수혁아, 미안한데 나 아까 가입한 스타즈 있잖아 거기 가봐야할 것 같아. 방금 연락이 왔는데 입부한 사람들은 지금 바로 모이라고 그러네?”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
수혁은 미련 없이 찬식을 보내주었다. 홀로 남은 그는 알음알이 천막을 살펴보니 가입하고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부원들은 수혁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느라 신경 써주지 못하고 있었다.
“가입하러 오셨어요?”
한눈에 보아도 쾌활하고 성격 좋게 생긴 남자가 천막 앞에 서있는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음료수를 잔뜩 사들고 오는 길이었다.
“가입은 아직 결정 못 했고 이야기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 해서요.”
“잘 오셨어요,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잠시만요, 부원들 음료수 좀 나눠주고요.”
남자는 학생들 상담을 해주고 있는 부원들과 상담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고 곧장 수혁에게 돌아왔다.
“이쪽으로 오실래요?”
남자는 수혁을 중앙 분수대 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가니 자그마한 책상이 있었고 옆에는 종이와 과자와 같은 물품들이 쌓여있었다.
“천막이 작아서 여기에다가도 자리를 마련했어요. 앉으세요.”
남자는 수혁에게 앉기를 권했다. 수혁은 메고 있던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아까 홍보하는 분이 돈을 벌게 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왔는데요.”
수혁은 찬식의 말을 떠올리며 용건을 말했다.
“그러셨군요. 일단 이것 좀 드세요.”
남자는 음료수를 하나 꺼내어 수혁에게 주었고 자신도 캔 음료를 따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다소 민망할 수 있는 수혁의 질문에 어떤 감정의 동요도 들어내지 않았다.
“돈 벌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기 전에 먼저 동아리 설명부터 해야겠네요.
저희는 2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역사 깊은 동아리입니다. 이 동아리는 학교에는 봉사 명목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끼리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 만든 동아리에요.”
“네. 그렇군요.”
“동아리 알음알이는 이름 그대로 서로 알음알음 도와준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면 좋은 알바자리를 소개해 주거나 동아리 회원들 간에 서로 교재를 공유하기도 하는 그런 곳이죠. 뭐 많지는 않지만 졸업한 선배들이 장학금을 주기도 하고요.”
‘좋은 취지로 만든 동아리이긴 한데 내가 원했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 사업에 도움이 될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순진한 생각이었어.’
수혁은 남자의 설명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까 천막에 앉아있던 학생들도 대부분 돈을 벌어야 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저는 동아리 회장 박찬명입니다. 이곳에선 주로 학생들에게 과외 자리를 알아봐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졸업한 동아리 선배들은 학교를 나가면서 과외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은 제가 그것을 모두 관리하고 있지요.”
수혁은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찬명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혹시 관리하는 과외 선생님 수는 얼마나 되나요?”
“오호, 과외에 관심 있으신 모양이구나. 제가 관리하는 선생님들 수는 50명이 넘어요. 심지어 전문적으로 과외를 뛰시는 선배들도 저에게 문의하는 경우도 많고요.”
찬명은 수혁의 관심에 괜히 뿌듯해졌다.
“이 동아리에 가입하려면 뭘 하면 되나요?”
찬명의 설명을 들은 수혁은 곧바로 가입 의사를 밝혔다.
“하하 알겠습니다. 가입원서를 가지고 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찬명은 천막에서 가입원서를 가져왔고 수혁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했다.
“저녁에 동아리 뒤풀이를 할 생각인데 괜찮으면 함께하시죠.”
찬명은 가입원서를 챙기며 친절하게 말했다.
“네. 좀 있다 뵙겠습니다.”
수혁은 인사를 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동아리 홍보는 오후 7시가 마감 시간이었는데 아직 6시30분 정도로 30분 정도 홍보시간이 남아있었다. 참고로 알음알이 뒤풀이는 천막을 정리하고 7시 30분에 있을 예정이었다.
‘이거면 온라인 강의 사업에 필요한 강사들을 수급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어.’
수혁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광장을 걸었다.
그는 잠시 후 있을 뒤풀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할 것도 없는데 커피나 한 잔 할까?’
수혁은 찬식이 있었던 광장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발코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했던 커피는 곧 나왔고 수혁은 이를 받아 자리에서 음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수혁아. 잘 지냈어?”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은 수혁은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긴 원피스에 가벼운 자켓을 입은 그녀는 미희였다.
“미희야, 오랜만이다.”
“그러게, 뭐하고 있었어?”
“그냥, 좀 있다가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야.”
미희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동아리 가입했어? 무슨 동아린데?”
미희는 궁금한 듯 물어봤다.
“알음알이라고 나름 역사가 있는 동아리더라고.”
“그렇구나.”
“미희 너는 뭐 동아리 가입한데 있어?”
“나? 음 나는.”
미희는 수혁의 질문을 받자 조금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곤란한 거면 말 안 해도 돼. 괜찮아.”
“아니야 곤란한건 아니고 내가 원해서 들어간 곳이 아니라서.......”
수혁은 우물쭈물대는 미희의 모습에 괜히 궁금해 겼다.
“어디 들어갔는데?”
“난 엄밀히 말하면 동아리는 아니고 사교모임 같은 곳에 가입했어.”
“사교모임?”
“응, 대연이라는 사교 클럽인데 아빠가 대학 시절에 그 모임 회원 이었나봐, 아빠도 우리랑 같은 한국대학 출신인데 내가 입학하자마자 누구한테 연락을 하더니 바로 가입하라고 하더라고.”
대연은 한국대학교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교모임이다.
1960년대 정재계에 자리를 잡은 한국대학 출신 사람들이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오로지 추천제로만 들어갈 수 있었고 들어갈 때 검증도 꽤나 엄격하게 한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대연? 뭐하는 곳인데?”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학기 초에 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우리학교 교수님들뿐만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분들이 오시는 거 보면 보통 모임은 아닌 것 같았어.”
수혁과 미희는 한동안 대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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