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하, 지금 동아리들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수혁은 2주라는 시간 동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는 남은 수업들을 들은 후 지도교수를 만나기 위해서 교수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 고민으로 인해 힘이 없던 수혁은 3층에 위치한 교수실로 털레털레 올라갔다.
‘여긴 거 같은데?’
방문 앞에 도착한 수혁은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했다.
“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구요?”
“네, 교수님과 면담을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허허, 그렇구먼. 들어오게.”
방안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것이었다. 수혁이 천천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얀 백발에 돋보기안경을 쓴 교수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나는 길명준교수라고 하네. 한국대학교에 재직한지는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한국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학생이라며? 머리도 좋은데 인물도 훤칠한 걸 보면 부모님께 감사하며 살아야겠어?”
“네.......”
수혁은 멋쩍은지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일단, 자리에 앉지.”
명준은 교수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했다.
테이블 옆에는 화이트보드가 있었는데 경영학에 관련된 여러 이론들이 쓰여 있었다.
수혁이 화이트보드를 흥미롭게 쳐다보자 명준은 입을 열었다.
“저것들은 예전에 대학원생들을 가르치면서 적어놨던 것들이야, 의미 없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게.”
명준은 소수로 구성된 대학원생들을 강의실보다는 교수실에서 가르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매실음료를 꺼내어 수혁에게 주었다.
“매실 좋아하나?”
“네, 좋아합니다.”
“매실은 심장의 기운을 보완하는 작용이 있어 나같이 기력이 딸리는 늙은이한테는 좋다네.”
수혁과 명준은 자리에 앉아 매실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하기에 앞서 명준은 수혁의 인적사항을 물어봤다.
“저희 부모님은 한식당을 운영하고 계시고 저는 외아들입니다. 제가 한국대 경영학과에 지원한 이유는......”
수혁은 부모님의 직업, 형제관계, 학교에 온 동기 등 다양한 것을 말했다.
“자네 부모님이 경영한다는 현월당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네, 작년 가을에 방송을 탄 적도 있고 잡지에도 실린 적이 있어 제법 유명해진 것으로 압니다.”
“맞아, 내가 우연히 티비에서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해. 나중에 동료교수와 식사하러 가봐야겠네.”
“오시기 전에 미리 알려만 주시면 부모님한테 말씀드려놓겠습니다.”
명준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항들을 물어봤다. 그리고 가끔씩은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하며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을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수혁은 면담이 점점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책상위에 낯익은 책이 한 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책을 읽고 계셨네요?”
수혁은 손으로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명준은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벌떡 일어나 책을 테이블에 가지고 왔다.
“최근에 학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인데, 참 재미있단 말이야. 제자백가 시대에 활동했던 현우자라는 사람의 사상에 대한 책일세.”
명준이 들고 있는 책은 수혁이 번역하여 최근에 출간한 책이었다. 책의 제목은 사상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현우자였다.
“저도 그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꽤나 흥미로운 인물이던데요?”
수혁은 자신이 그 책을 번역했기에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말을 듣자 명준이 웃으며 좋아했다.
“하하, 고전 읽는 것을 즐겨하는 모양이군.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새로 발견된 사상가라 유명하지도 않을 텐데 벌써 읽었는가?”
“네, 제가 느꼈던 건 이 분이 고대 동양의 사상가들 중에서 서양의 민주주의 사상과 가장 흡사한 이론을 창시한 사람처럼 여겨지더군요.”
“맞아, 나도 내용을 읽어보니 각 고을마다 대표들을 선출한 뒤 한데모여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한다는 점이 현대의 대의민주주의와 흡사하다고 느꼈네.”
“네, 이제까지 백성이 곧 하늘이고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말한 사상들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서양 민주주의와 흡사한 이론은 없었지요.”
수혁은 그 외에도 현우자의 주요 이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명준은 그의 말에 동의하며 열성적으로 대화에 임했다.
“강수혁이라고 했지? 내가 자네랑 대화를 하니 모처럼 즐겁구먼, 가끔씩 여기 들리라고. 난 책을 두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네.”
“네 다음에 또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명준은 이미 수혁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교수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용건을 마친 수혁은 인사를 하고 교수실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번역한 책을 지도교수가 읽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꽤나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데?’
수혁은 무거웠던 기분을 모두 떨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찬식을 만나러 갔다.
찬식은 광장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동아리 홍보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래 기다렸지?”
수혁은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찬식을 발견하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 왔어? 보니까 재밌는 것들이 되게 많은 거 같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겠어. 구경할게 한 두 개가 아니야.”
찬식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카운터에 반납한 뒤 수혁과 함께 광장으로 나갔다.
원형의 광장은 커다란 분수대가 가운데에 있고 그 주변에는 멋진 문양을 지닌 돌 블록들이 쫙 깔려 있었다.
천막들은 광장의 모양에 맞춰 원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문관측 동아리입니다. 달 밝은 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별을 보고 싶은 분이 있으면 여기로 오세요.”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하나쯤은 필수인 거 아시죠? 영어회화에 관심 있으신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다양한 카테고리의 동아리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동아리로 오라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찬식은 이곳 저곳에 들려 동아리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며 관심을 보였지만 수혁은 별 관심이 없었기에 멀찌감치 지켜보기만 했다.
“수혁아 어때? 괜찮은 곳들 많지 않아? 나는 스타즈 동아리에 들어가려고. 넌 들어갈 데 정했어?”
찬식은 처음에 구경했던 천문관측 동아리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좀 더 봐야할 거 같아. 아직 못 정했어.”
“멀리서만 멀뚱멀뚱 보지말고 가까이서 봐 바. 혹시 알아? 네 마음에 드는 데가 있을지.”
그는 수혁이 조금 더 적극성을 갖고 동아리를 찾기를 바랐다.
“저희는 검도 동아리 검우입니다. 동아리 가입 전에 검도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이 돼 있으니까 참여해보시기 바랍니다.”
“저거 재밌겠다. 초등학생 때 검도 도장을 다닌 적이 있거든. 한 번 가서 해봐야겠다.”
검도 동아리를 발견한 찬식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는 수혁을 데리고 검도 동아리 천막에 갔다.
그곳에는 날렵한 체격의 남자가 검도복을 입고 서 있었다.
“저, 검도 체험 한 번 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검도 경험이 있으세요?”
“네, 어렸을 때 잠깐 배운 적이 있습니다.”
찬식은 남자에게 체험의사를 밝혔고 남자는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죽도와 보호구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을 천막 뒤편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가니 죽도들을 꼽아 놓는 나무 기구가 있었고 바닥에는 고무매트를 깔아놓아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그곳에는 체구가 우람한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검우 회장 이신우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검도체험의 일환으로 겨루기를 할 텐데 저는 심판을 보겠습니다.”
“괜찮겠어?”
수혁은 찬식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냥 체험하는 건데 뭘. 그리고 보호구 차서 괜찮아.”
“맞습니다. 어차피 약식으로 할 거여서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내를 했던 남자는 수혁을 안심시켰다.
찬식은 겨루기를 하기 위해 호구를 찬 뒤 매트위에서 몸을 풀었다.
남자도 허공에 죽도를 몇 번 휘두르며 준비를 했다.
“이쪽으로 서서 서로 마주보시기 바랍니다. 룰은 간단합니다. 먼저 3점을 따내는 쪽이 생기면 시합은 즉시 중지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전 심판이니 지시에 잘 따라주세요.”
가운데에 있던 신우는 자연스럽게 시합을 개시했다.
찬식은 어렸을 때 배운 기억을 더듬으며 죽도를 휘둘렀으나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패배하고 말았다.
“와, 오랜만에 하려니까 잘 못 하겠다. 그리고 호구도 내가 예전에 입었던 거랑 많이 달라서 당황했던 것 같아.”
“그래, 수고했어.”
호구를 벗고 나온 찬식은 민망한지 변명을 했다.
한눈에 보아도 남자와 찬식의 실력은 격차가 많이 나보였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한 번 해보시겠어요?”
순식간에 시합을 끝낸 남자는 종이컵으로 물을 마시다가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수혁은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옆에서 찬식이 계속 부추기기 시작했다.
“수혁아,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봐. 너 동아리들 돌면서 아무것도 안 해봤잖아.”
“그러기는 한데.......”
“하하, 그냥 재미라 생각하고 해보세요, 생각보다 별 거 없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신우도 수혁을 부추겼다.
“흠, 한 번 가볍게 해볼까?”
“그래, 어차피 호구 착용하면 맞아도 아프지 않으니까 긴장 안 해도 돼!”
수혁은 내키지 않았으나 마지못해 검도를 해보기로 했다.
“검도를 해보신 적 있으세요?”
남자는 죽도를 수혁에게 건네주며 찬식에게 했던 질문을 했다.
“아니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겨루기를 하기 전에 기본기를 조금 배우면 체험하는데 문제없을 겁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는 검도의 기본자세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는 수혁에게 머리치기, 손목치기 그리고 허리치기를 알려줬다.
수혁은 팔짱을 낀 채 남자의 동작을 유심히 관찰했다.
“방금 보여준 것들이 검도의 기본 공격입니다. 이 외에도 목 찌르기와 같은 기술들이 있으나 이것들만 잘 구사해도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남자에게 배운 동작들을 허공에 대고 연습을 해보았다.
그가 죽도를 들고 휘두르려 하자 도구 이용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었고 마치 수만 번 이상 죽도를 휘둘러 본 사람처럼 검도의 기본 기술들을 능숙하게 구현했다.
“뭐, 뭐야? 검도 안 배운 거 맞아? 너무 잘하는데?”
찬식은 수혁을 보더니 입이 떡 벌어지며 감탄을 했다.
“하하, 제대로 속았네요. 이거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는데요?”
수혁의 실력을 확인한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신우는 뒤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휘두르는 자세나 스피드가 보통이 아니야, 이거 힘들겠는데?’
신우는 후배 검도부원을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시간 끌 거 뭐 있겠습니까? 가시죠.”
수혁과 남자는 호구를 차고 매트 위에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신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심판을 보았고 시합은 시작되었다.
‘찬식이 때랑 다르게 엄청 진지하잖아.’
수혁은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나름 전문적으로 검도를 배웠던 사람인데 일반인한테 질 수야 없지.’
그는 방금 전 죽도를 휘두르는 수혁의 모습을 본 후 방심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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