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것 좀 봐바.”
혜정은 잡지를 펼치더니 글을 하나 보여주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잡지사에 글을 기고하는 요리 칼럼니스트가 왔다 갔었나 봐, 이 잡지가 되게 잘나가는 여성 잡진데 앞으로 우리 가게에 손님들이 더 모여들 것 같은데?”
수혁과 선웅은 잡지에 실린 칼럼을 읽어보았다. 내용을 살펴보니 현월당의 음식과 반찬에 대한 칭찬과 한식을 즐길 수 있는 내부 인테리어를 갖췄다는 내용이었다.
현월당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자 맛을 평가하기 위해 칼럼니스트가 왔다 간 것이다.
“와, 여기 보니까 평점을 9점이나 줬네?”
선웅은 칼럼 하단에 적힌 평점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칼럼에 다른 식당에 대한 평가도 적어놨는데 대부분 6점에서 7점 사이 정도를 받았어요, 이름난 식당들도 그렇게 준 거 보면 우리는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은 셈이에요.”
수혁은 칼럼을 읽으며 첨언을 했다.
“이제 잘 되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 좀 더 힘내보자.”
혜정이 잡지를 읽고 있는 수혁과 선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힘냅시다.”
“하하,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네요.”
선웅이 혜정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더 좋아졌고 가족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행복한 밤을 보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거리에 있는 가로수들은 점점 단풍이 들고 있었고 밤이 되면 가을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수혁은 주중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가끔씩 고서번역을 하며 한가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끔 부모님을 도와 가게 일을 도와주곤 했다.
“엄마, 채소 다 다듬었어요.”
일요일 아침, 수혁은 일찍 나와 혜정이 반찬을 준비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매일 많은 손님이 오는 현월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찬을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양의 채소를 썰고 다듬어야 했다.
“우리 아들은 칼질도 잘하네? 그것도 네가 준 메뉴얼에 나온 대로 딱딱 말이야.”
혜정은 수혁이 다듬어 놓은 채소들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궐중일기’를 번역하며 한식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했고 이를 토대로 만능도구이용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식칼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그냥 예전에 틈틈이 연습해서 그런 거예요. 또 도와드릴 거 없어요?”
“가서 아버지 좀 도와줘라. 주방 일은 이만하면 될 것 같아.”
“네.”
수혁은 채소를 다듬는 것 외에도 홀 청소와 손님에게 서빙하는 것까지 가리지 않고 일손을 보탰다.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고 한 무리의 여성들이 현월당에 들어왔다.
수혁은 현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쳐다봤는데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저 사람은?’
화려한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수다를 떨고 있는 중년 여성을 발견한 수혁은 그녀가 미희의 엄마인 현숙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여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네, 맛은 두말할 것 없고요 최근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화제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요?”
“최근에 한 궁중요리 연구가가 이곳 음식이 전통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적도 있거든요.”
“오, 확실히 보통 식당들하고는 차원이 다른가 보네요.”
현숙은 주변에서 현월당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자 기대가 많이 되었다.
“듣기로는 장사가 워낙 잘 돼서 한 달 매출이 1억 가까이 됐데요.”
“음식점이 잘 되면 돈을 많이 번다고는 하지만 대단하네요.”
‘딱 봐도 손님이 끊이지 않고 인테리어도 괜찮네. 사장이 돈 꽤나 벌었겠어.’
현숙은 현월당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선웅이 일행을 확인하고 맞이하러 다가갔다.
“6명이에요.”
정식의 엄마인 명은은 이번에도 현숙을 따라왔다.
“그건 그렇고 음식점이 참 예쁘네요. 장사 잘되시겠어요.”
여자들 중 한 명이 내부를 살펴보며 감탄했다.
“하하, 네. 그냥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가실까요?”
룸은 이미 예약이 돼서 꽉 찼기 때문에 일반 테이블들이 있는 자리로 안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 불만이 생긴 현숙은 볼멘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보니까 방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룸으로 가면 안 될까요? 저희는 코스요리를 먹으러 왔거든요.”
“아, 손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룸이 예약이 다 되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쪽에 앉으셔도 코스요리를 즐기실 수 있게 해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선웅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편 수혁은 현숙이 온 것을 확인하고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 저 여자는 변하는 게 없구나.’
수혁은 그녀가 진상 행동을 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예약이요? 그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을 드리고 왔겠죠. 사장님, 오늘만 어떻게 안 될까요? 우리가 이 동네에서는 오래 살았고 주민인데 편의 좀 봐주세요.”
가게 앞에는 크게 예약문의에 관한 내용이 붙어 있었고 예약제를 운영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숙은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이 도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맞아요. 그리고 어차피 이 근처 엄마들은 서로서로 정보를 공유한다고요. 저희가 기분 좋게 먹고 가면 입소문도 나고 좋잖아요.”
명은도 옆에서 현숙의 말을 거들었다.
“네, 저야 그러고 싶죠. 오늘은 일단 다른 손님들 사정도 있으니 테이블에서 드시면 어떨까요? 다음에 예약해서 오시면 제가 서비스도 드리고 잘 해드리겠습니다.”
선웅은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하려 했다.
“그래요 미희 엄마, 저쪽에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저기에서 먹어요.”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평소라면 자리 잡기도 힘든데 그래도 저쪽에 빈자리가 있네요. 저기로 가요.”
현숙과 명은을 제외한 여자들은 민망한지 그녀들을 데리고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이들은 이전에 혜정이 모욕을 받았을 때 위로를 해줬던 사람들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손님으로서 정당한 권리는 행사를 해야지요! 룸이 아니면 저희는 식사 못 해요. 설마 저희를 문전박대할 거는 아니죠?”
현숙은 여자들의 만류에도 더 뻔뻔하게 나왔다.
“그렇게 되면 다른 엄마들한테도 이야기 해야죠, 손님 대접이 아주 형편없는 식당이라고. 사장님 잘 생각하시고 말씀하셔야 될 거에요.”
명은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옆에 여자들은 그런 그들을 질린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곧 있으면 예약 손님들이 오시는데........’
선웅은 몹시 당황하여 대답을 못한 채 생각만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수혁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대화에 참여했다.
“경우 없게 행동하는 것은 여전하네요.”
“뭐예요?”
현숙은 발끈하여 몸을 돌렸다.
“아니, 너는?”
“네, 예전에 뵌 적이 있는데 저 기억나시죠?”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보니까 여기서 알바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네?”
현숙은 사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고 있는 수혁을 알바생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도 계신데 예의 좀 갖추셨으면 좋겠는데요? 미희한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잘 만났다. 오늘 된통 당해봐라.’
그녀는 수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회를 포착이라도 한 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고작 알바 주제에 뭐? 예의? 사장님, 이렇게 훌륭한 식당에 저런 아이를 알바로 쓰면 되겠어요? 당장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저 놈을 당장 자르세요. 그러면 오늘 우리를 푸대접한건 눈감고 넘어가 줄게요.”
“네? 푸대접이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현숙과 달리 선웅의 얼굴에는 황당해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맞아요, 손님접대도 불만족스러운데 알바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명은도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저, 죄송합니다만 이 아이는 직원이 아니라 제 자식입니다. 혹시 여러분들하고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선웅은 이들이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학생이 사장님 자식이라고요?”
현숙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네. 제 아들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이던데?”
“아버지, 더이상 말 섞을 필요 없어요. 저기 저 아줌마랑 옆에 있는 아줌마가 예전에 우리 엄마를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이에요.”
“그게 진짜냐?”
수혁은 그들이 학교 설명회 때 혜정을 망신 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당시 몹시 분해했던 선웅은 아내를 모욕한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표정이 굳어졌다.
“죄송한데, 저희는 여러분들한테 음식을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 나가주시죠.”
선웅은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뭐라고요? 사장님 그게 무슨 경우에요? 어이가 없네?”
명은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선웅을 째려봤다.
“저기요, 사장님. 아드님 교육 똑바로 시키세요. 애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사장님을 닮아서 저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였네요.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까?”
“아니, 그게 무슨.........”
얼굴이 새빨개진 현숙은 되는 데로 말을 지껄였다.
그녀의 모욕적인 언행에 화가 난 선웅과 수혁은 대응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일행들이 현숙과 명은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참 너무들 하시네요. 저번에도 수혁이 엄마에게 개망신을 주더니 오늘은 아버님한테 그러는 건가요?”
“누가 아니래요? 그동안 만났던 정 때문에 참고 있었는데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세요? 교양들 좀 갖추세요.”
일행 중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나머지 여자들은 합심이라도 한 듯 말을 거들었다.
“뭐라고요? 지금 누구 편드는 거예요? 지금 미희 엄마가 사장한테 모욕당하고 있잖아요!”
명은은 격앙된 목소리로 현숙을 변호했다.
“모욕은 무슨 모욕이에요. 미희 엄마랑 정식 엄마가 하는 행동이 저분들에게 진짜 모욕이에요. 정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여기서 나가세요.”
“맞아요, 다른 손님들도 계시는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휴, 앞으로 만나기도 꺼려지네요.”
여자들은 이제까지 참아왔던 것을 토해내는 듯 그들을 쉼 없이 비판했다.
현숙은 쓴소리가 계속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정식 엄마 그만해요, 그냥 나가요. 여기서 시끄럽게 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좋을 것도 없을 것 같네요.”
“아니,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명은은 사태파악을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리려 했다. 그러자 주변 테이블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참, 밥 먹는데 되게 시끄럽네.”
“저 여자들 아까부터 계속 봤는데 매너도 없고 말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사장님이랑 학생한테 하는 거 봤어요? 완전히 진상들이에요 진상.”
현숙은 주변의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명은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남은 여자들은 선웅과 수혁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예전에 학교에서 수혁이 엄마를 잘 못 챙겨 드려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가게를 시끄럽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 여자 말은 귀담아 듣지 마세요.”
“아닙니다. 친한 지인인 것 같은데 편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선웅은 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인이었던 게 부끄럽네요. 저희는 더이상 그 사람들이랑 못 어울리겠어요.”
“하하, 네. 이쪽으로 오시죠. 주문해주시면 저희가 맛있게 만들겠습니다.”
선웅은 빈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했다.
‘후, 다행히도 잘 끝났네.’
혜정은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보통 때보다 더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었고 나중에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시끄러웠던 하루가 지나고 수혁과 가족들은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아까 그 여자들 말 함부로 할 때 어떻게 참았어요?”
“말도 마라, 다른 손님들 계셔서 겨우 참았다. 그래도 다른 분들이 우리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그날 밤 수혁네 가족들은 현월당에 있었던 소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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