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차피 대학 들어가면 온라인 강의 사업을 바로 시작할 건데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이 할 만한 일을 구상해볼까? 어차피 고등학생 때는 사업을 벌이기도 어렵잖아.’
수혁은 평생을 고생만 하시던 부모님이 운영할 수 있는 사업체를 만들어드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혜정과 선웅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었다.
‘그래, 밥 먹을 때 항상 느꼈던 거지만 엄마의 음식 솜씨는 정말 뛰어나. 이번 기회에 엄마한테 번듯한 식당을 차려드려야겠다. 그렇게 하면 기죽는 일도 없을 거야.’
수혁은 부모님께 음식점을 차려드리기로 마음을 먹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엄마가 잘할 수 있는 메뉴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가게도 알아봐야 돼, 그러려면 뭐부터 해야 될까?’
심각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고민하던 수혁은 칸타빌레에 가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점에 가면 분명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이 있을 거야. 지금 가서 한 번 찾아보자.’
수혁은 혜정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고 말을 한 뒤 바로 칸타빌레로 향했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걸음을 재촉하니 어느 새 서점에 도착했다.
‘우선 책을 찾아보자.’
수혁은 불을 켜고 서점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헤짚고 다녔다.
한참을 찾았으나 그가 찾은 책들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요리에 관한 것과 창업에 대한 조언들이 서술되어 있는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이걸로는 안 돼. 뭔가 차별화 되고 사람들을 끌 수 있는 획기적인 게 필요해.’
시간은 벌써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고 수혁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생각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런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손님인가?’
수혁은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하러 나갔다.
“수혁이냐?”
“누군가 했네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이 아닌 평우였다. 그는 책을 한 아름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들은 뭐에요?”
수혁이 책을 보고는 질문했다.
“응, 예전에 친구들한테 빌려줬던 고서들인데 좀 전에 돌려받고 오는 길이다.”
“그렇군요.”
“그래, 넌 뭐하고 있었어?”
“네, 괜찮은 책을 좀 찾고 있는데 제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해서요.”
수혁은 낙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 그래? 이 안에는 웬만한 책은 다 있을 텐데 신기하구나, 혹시 고서들도 살펴봤냐?”
“네, 방금 전까지 쭉 다 봤는데 찾질 못했어요. 후. 답답하네요.”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왔다. 평우는 답답해하는 그를 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아?”
“딱히 일정은 없습니다.”
“그럼 오늘 내 별장에 가보지 않을래? 괜찮으면 하룻밤 자도 된다. 산 근처에 있는데 공기 좋고 기분 전환하기에는 최고인 곳이야.”
“죄송한데....... 다음에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지금은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수혁은 난감해하며 완곡하게 거절을 했다.
“하하, 안다, 지금 책을 찾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가자고 하는 거야. 우리 가문이 지금까지 수집한 서책은 이곳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야. 칸타빌레 정도로는 집안의 고서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어.”
평우는 목이 탄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마시며 말했다.
“그래서, 난 방금 말한 별장에 별도로 책을 보관하는 곳을 또 만들어 놨다. 도서관으로 치면 일종의 별관 같은 데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그런 데가 있을 줄이야. 어쩌면 내가 원하는 책이 있을지도 몰라.’
평우의 말을 들은 수혁은 책을 찾는 것에 대한 희망이 보였다.
“네, 좋습니다. 그러면 부모님한테 연락 드린 후 바로 출발하는 거로 하죠.”
“허허 그래, 나도 차를 불러야 하니 천천히 해라.”
평우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서점 앞에 차를 가져오라고 말했고 수혁은 집에 전화하여 외박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어, 그래 다 왔다고? 알겠네. 수혁아 다 왔다는구나. 그만 나가볼까?”
“네.”
평우는 전화를 끊고 수혁을 데리고 차를 타러갔다.
건물 앞에는 수혁이 예전에 봤던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타시죠.”
기사는 차 문을 열었고 수혁과 평우는 차에 탑승했다.
“별장으로 가주게.”
“넵.”
수혁과 평우는 차를 타고 별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서울 외곽이 아니라 서울 안에 있는 산 근처에 있었다.
별장 근처까지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어 이전과 달리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했다. 내리거라.”
“네. 별장이 참 예쁘네요.”
수혁은 내려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별장은 현대 건축기술로 만든 3층짜리 저택이었다.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집은 곳곳에 CCTV도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아들한테 말해놨으니 3층에 있는 빈방에서 자고 가게.”
“네. 알겠습니다.”
평우는 남자에게 손님을 위해 마련된 침실에서 자고 가도록 지시했다.
이는 내일 돌아갈 때 기사를 기다리는 수고를 덜기 위한 것이었다.
“들어가자, 수혁아.”
평우는 수혁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장의 내부는 원목으로 된 벽과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천장은 3층까지 뚫려 있었고 원 형태의 나무 계단이 각 층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별장이 되게 크게 느껴지네요.”
“1층에는 부엌과 손님을 대접하는 응접실이 있고 2층과 3층은 모두 침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가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이곳에서 파티를 하기도 했거든.”
“그렇군요.”
“나중에 다른 층도 둘러보기로 하고 일단 책을 보러 가볼까?”
평우는 수혁을 데리고 1층 구석에 있는 하얀 문 앞으로 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별장에 지하도 있었네요?”
평우가 문을 열자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계단 옆에 있는 스위치를 켠 다음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뒤 지하에 도착한 평우는 벽에 붙어있는 두꺼비집을 열고 스위치를 켰다.
“대단하네요.”
불이 켜지자 드러난 지하의 모습은 칸타빌레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지하에는 많은 책장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책들은 각 책장마다 빼곡히 꽂혀있었다.
“원래는 나중에 알려주려고 했는데 어차피 나중에 네가 다 가져갈 책이니 미리 보여 주는 거다. 여기서 네가 원하는 책이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걱정 마세요. 그리고 항상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난 위층에서 먹을 거가 있나 보고 있을 테니 천천히 보고 올라오너라.”
평우는 수혁을 남겨두고 먼저 1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은 그는 곧바로 책장에 다가가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칸타빌레에서는 평소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도서들을 훑어보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이곳은 모두 처음 보는 책이라 일일이 뒤져야 했다.
‘이런 책도 있구나.’
지하에는 수많은 종류의 책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칸타빌레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귀중한 고서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현재 수혁에게 필요한 책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혁아, 배고플까봐 요깃거리를 가져왔다. 먹으면서 해라, 나는 피곤해서 먼저 눈 좀 붙이려고. 잠은 2층에 있는 아무 방에서 자면 된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평우는 그가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을 지하로 가져다주었다.
수혁은 급하게 허기만 채운 다음에 다시 책을 찾아 나섰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1시쯤이 되었고 살피지 않은 책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후, 그래도 한 권은 건졌다.”
수혁은 낡은 고서 한 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궐중일기’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중기에 수라간에서 일하던 궁녀가 나이가 차 퇴궐한 뒤 자신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었다. 책의 초반에는 궁녀가 된 계기와 일상적인 궁중생활이 서술되어 별 볼일이 없었지만, 후반부에는 수라간에 일하면서 배웠던 다양한 요리들이 적혀져 있었다.
‘간단한 반찬을 만드는 법부터 신선로를 활용한 어려운 요리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거면 도움이 되겠어.’
혜정은 평소 가정부로 일하면서 매일 요리를 해왔기 때문에 한식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녀에게 적합하다고 볼 수 있었다.
‘궁중요리라는 것이 이름은 화려하나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들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이거면 음식점을 차리는데도 부담스럽지 않겠어.’
궁중요리의 대부분은 불고기, 잡채, 장아찌 등과 같이 현대에서 흔하게 접하는 음식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소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수혁은 내용을 확인한 후 지하실 불을 끄고 2층에 잠을 자러 올라갔다.
‘다들 주무시나보네.’
나무계단 옆 벽면에 달린 작은 랜턴을 제외하고는 모든 불은 꺼져 있었다.
수혁은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고 다음 날이 되었다.
“수혁아 잘 잤어?”
1층에서는 평우가 다기에 물을 부으며 차를 만들고 있었다.
“네 잠자리가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피곤이 싹 가시는 기분이에요.”
수혁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한 뒤 1층에 내려왔다.
“그래, 어제 수확은 있었어?”
“네. 지하에 귀한 책들이 정말 많더군요. 할아버지의 컬렉션에 또 한 번 감탄했어요.”
“그렇구나.”
평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책을 찾았어?”
“이 책은요.”
수혁은 평우에게 자신이 찾은 고서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고 음식점을 차릴 계획을 말했다.
“식당을 차리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내가 좀 도와주랴?”
“아니에요, 이 일은 제 힘으로 할게요. 이미 도움 받은 것도 차고 넘칠 지경이에요.”
평우는 도와주려 했지만 수혁은 이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들은 별장 주변에서 산책을 한 뒤 차를 타고 칸타빌레로 다시 돌아왔다.
“집에 내려주려고 했는데 볼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네, 잠시 들어가서 작업 좀 하고 가려고요.”
서점 앞에 차는 정차되어 있었고 그들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가 누차 이야기했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평우는 작별인사를 한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수혁은 서점에 내려가 사무실 불을 켠 뒤 바로 번역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번역을 해서 엄마가 이 책에 있는 요리를 익히게 해야 해. 최대한 빨리 번역하고 돈을 어떻게 구할지 생각해봐야겠어.’
수혁은 컴퓨터를 켜고 궐중일기에서 혜정에게 도움이 될 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음식들은 대부분 현대에 많이 먹는 것들이었지만 야채를 다듬는 법부터 불을 조절하는 방법까지 세밀한 부분에서 현대의 음식들과 차이를 보였다.
‘정말 섬세하게도 글을 썼군, 너비아니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불 조절과 굽는 방법이 이리도 복잡할 줄이야.’
수혁은 번역을 하면서 궁중음식을 조리하는 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내자.’
그는 집에 전화하여 서점에서 자고 가겠다는 말을 하고 밤잠을 줄이며 번역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후 드디어 끝났다.’
궐중일기는 상당히 두꺼웠으나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예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이제 부모님한테 내 계획을 말하고 이 번역본을 엄마한테 주면 돼.’
수혁은 번역본을 프린트하면서 생각했다.
시간을 보니 오후 다섯 시였고 이제 곧 가족들이 저녁을 먹을 때였다. 그는 번역본을 챙긴 뒤 급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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