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잠시 후 설명회를 진행할 선생이 들어왔다.
“오늘은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특별반 운영에 관한 사항과 지난 특별반 학생들의 성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럼 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생은 미리 뽑아둔 프린트를 학부모들에게 나눠 준 뒤 설명회를 개시했다.
설명회는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끝이 났다. 그리고 각 반 담임들은 종료 시간에 맞춰 반에 들어와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혁이 부모님이시죠? 저는 3반 담임을 맡은 이경자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혜정은 담임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드님을 참 잘 키우셨더라고요.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도 잘하고 배려를 잘해서 주변 아이들이 많이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 잘 지도해주신 덕분입니다.”
경자는 한동안 계속 수혁에 대한 칭찬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혜정은 설명회 때문에 느꼈던 긴장감도 서서히 풀려 감을 느꼈다.
‘아들 키운 보람이 있구나.’
담임과의 대화 후 혜정은 자리에 앉아 흐뭇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자 각 반에서 온 선생들은 학부모들을 남겨 두고 반을 나갈 준비를 했다.
“앞으로도 자주 뵐 수도 있으니까, 인사들 나누시다가 원하실 때 귀가하시면 됩니다.”
선생들은 학부모들 간의 친목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짧게 이야기한 뒤 반을 빠져나갔고 교실에는 어머니들만 남게 되었다.
“오늘 설명회를 들으니까 특별반에 들어가면 아이한테 되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게요. 그건 그렇고 민영이 아버지는 이번에 승진하셨다면서요?”
“네, 만평일보에서 편집장으로 승진했어요. 앞으로는 뛰어다니면서 글 쓸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것보다 형수는 공부를 되게 잘하는데 비결이 뭐에요?”
학부모들은 저마다의 친분을 자랑하며 은근히 자식이나 집안 자랑을 하는 중이었다.
혜정은 그런 분위기가 불편했다.
‘하, 눈치 좀 보다가 바로 집에 가야겠다. 수혁이 칭찬 들은 거는 좋은데 이런 분위기는 적응이 안 되네.’
혜정은 저마다 떠들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누구 어머니세요?”
“네?.......”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자 그녀는 다시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화려한 치장과 비싼 손가방을 들고 있는 여자는 다른 엄마들과 수다를 떨다가 조용히 앉아있는 혜정을 발견하곤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1반 정식이 엄마 되는 사람인데요.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뵙는 것 같은데 누구신가요?”
그녀는 일전에 수혁네 반장이었던 정식의 엄마로 이름은 이명은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정혜정이라고 합니다. 3반에서 공부하는 수혁이가 제 아들이에요.”
혜정은 가슴이 떨렸지만 이내 진정 시키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런데 자기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교실 안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어머, 수혁이 어머니셨어요?”
“아들을 어떻게 키우셨길래 그렇게 공부를 잘해요?”
“정말 장하시겠어요. 벌써 이 근방에서는 수혁이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다 났더라고요.”
학부모들은 혜정에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들은 3학년이 돼서 부동의 1등을 하는 수혁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있는 한 여자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여자가 강수혁의 엄마란 말이지? 어휴 얄미워 별볼일 없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저렇게 치켜 세워주지?’
한쪽에서 혜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여자는 일전에 수혁도 본 적이 있던 미희의 엄마 현숙이었다.
그녀는 예전 일로 인해 수혁에 대한 감정이 원래 좋지 않았지만 3학년 들어서 자신의 딸이 1등을 뺏기자 악감정은 더 커진 상태였다.
‘좀 전에는 나한테 알랑거렸던 사람들이 그세 저년 옆에서 호들갑들 떨고 있네.’
현숙은 부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혜정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주변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희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김현숙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네 저도 반가워요. 미희가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미희 어머니셨군요.”
혜정은 현숙의 손을 잡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뭐야? 지네 아들이 우리 딸 제치고 1등한 거 다 알텐데 지금 날 약 올리는 거야?’
현숙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졌지만 이내 풀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휴, 우리 미희가 수혁이한테 많이 배워야죠. 그런데 아드님을 어떻게 교육시켰길래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건가요? 저희 딸은 유명한 과외선생도 붙여주고 학원도 보내는데 도통 점수가 오르지 않아서요.”
“맞아요, 괜찮은 데 있으면 저희도 좀 알려주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현숙이 질문을 하자 다른 여자들도 모두 혜정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저희는 수혁이한테 특별히 뭐 시킨 건 없어요, 그냥 애가 알아서 다 하더라고요. 해준 것도 없는데 스스로 잘하니 고마우면서 미안할 따름이죠.”
혜정은 손을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현숙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훗,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아니면 우리한테 정보를 말하기 싫으셔서 그런가? 저희는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하는 편인데 싫으시다니 뭐 어쩔 수 없네요.”
“흠, 안 알려주신다니 참 아쉽네요.”
“그러게요. 다 같이 잘 되면 좋은 건데.......”
현숙의 선동에 다른 여자들은 아까와 달리 차가운 얼굴로 혜정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게, 지금 오해들 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정말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혜정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크게 당황했다.
“됐어요. 말씀 안 해주셔도 되요. 자 이러지 말고 커피나 마시러 가죠. 날도 더운데 근처 카페로 갈까요?”
“잘 아시는 데가 있나보네요?”
“그럴까요?”
명은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뜬금없이 학부모들에게 카페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1학년 때부터 현숙과 친하게 지냈는데 혜정을 따돌리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도와주고 있었다.
“아, 맞다. 제가 깜빡하고 있었네요. 수혁이 엄마는 일부러 우리에게 정보를 숨기는 게 아니에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현숙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깜빡한 사람처럼 연기를 하며 주의를 환기 시켰다. 혜정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의아해졌다.
“수혁이한테 들었는데 학원가 근처에 있는 빌라 촌에서 사신다면서요? 어려운 형편인데 무슨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시키겠어요.”
“네?”
혜정은 불쾌한 감정을 느꼈지만, 주위에 시선이 많았기 때문에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들이 효자네요, 스스로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 대견하겠어요.”
“그것도 모르고 저희가 물어본 거였네요.”
“우리 자식도 수혁이처럼 알아서 잘 해줬으면 좋겠어요.”
현숙의 예상과 달리 몇몇 여자들은 혜정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다.
‘저년들은 재수 없게 착한 척을 하고 난리야.’
그녀는 그런 모습이 보기가 싫었는지 무례한 질문을 서슴없이 하기 시작했다.
“수혁이 아버님하고 어머니가 무슨 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운 형편에 참 힘드시겠어요. 저희는 자식 교육 외에도 재테크나 부동산에 관한 정보도 서로 공유하고 있거든요.”
현숙의 말에 여자들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조용해졌다.
“제가 비록 변변치 않은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수혁이한테 인성교육은 잘 시키고 있습니다.”
혜정은 현숙의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간신히 참고 말했다.
“어머? 그럼 저는 미희한테 인성교육을 잘못시키고 있다는 이야긴가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예민하게 구시네요.”
현숙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혜정의 속을 계속 긁었다.
“미희 엄마, 그만하세요.”
“맞아요, 오늘은 그냥 설명회 들으러 온 거잖아요.”
다른 여자들은 현숙의 말이 심하다고 느꼈는지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사실 그녀의 자식들 중에는 조성준 일로 인해 수혁에게 도움을 받은 부모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자식을 도와준 수혁의 부모를 외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너무들 하신 거 아니에요? 언제부터 수혁 엄마를 잘 알았다고 그러실 수가 있어요? 미희 엄마가 우리 도와준 거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명은은 분위기가 현숙에게 불리하게 흘러가자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변호를 했다. 그러자 앞에 나섰던 여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현숙이 그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많이 제공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 때문에 괜히 싸우실 필요 없습니다. 이만 들어 가보겠습니다.”
혜정은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렇게 하세요. 자, 우리는 카페 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죠. 날도 더운데 커피 마시고 식사도 같이해요.”
명은은 차가운 말투로 혜정에게 말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교실에 있던 학부모들은 모두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수혁 엄마 미안해요.”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몇몇 여인들은 혜정에게 미안했는지 조그만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혜정은 그녀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곧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수혁은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엄마는 잘 하고 계시려나?’
그는 라면을 먹으며 설명회에 간 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수혁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 수혁아. 엄마야.”
혜정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수혁은 식사를 멈추고 그녀에게 갔다.
“엄마,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보통 보면 식사도 하고 오시던데?”
“응, 그냥 어쩌다 보니까 후, 엄마는 옷도 갈아입고 좀 쉬어야겠다. 라면 먹고 있었어? 식사마저 해 수혁아.”
혜정은 힘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수혁은 먹던 라면을 바로 싱크대에 붓고 설거지를 한 뒤 안 방에 노크를 했다.
“엄마, 잠시 들어가도 되요?”
방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기다리다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은 뒤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엄마 말씀 좀 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그게 사실........”
혜정은 수혁이 따라와서 계속 묻자 현숙과 정은한테 당했던 수모를 말해주었다.
“못난 건 엄마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에요. 걱정 마세요. 다시는 그런 일 안 생기게 만들게요.”
수혁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꾹 참고 있었다.
“아니야, 수혁아 어른들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지금 하는 대로 열심히 잘 살아.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걱정 마시고 푹 쉬세요.”
“응.”
수혁은 혜정이 쉴 수 있도록 안방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엄마가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니 괴롭다.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수 있을까?’
방에 들어온 수혁은 여러 각도로 방법을 생각해봤다. 처음에는 현숙에게 복수를 할까 생각했지만, 미희와의 친분과 실행가능성을 고려하여 복수는 포기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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