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응? 뭐가?”
수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도와줬잖아, 정말 고마워.”
“별거 아닌데 뭘.”
유리는 진심으로 수혁에게 고마워하였고 수혁은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말했다.
“아니야, 할아버지가 그 일로 상심이 크셔서 많이 괴로워하셨는데 오늘 표정 보니까 한시름 놓으신거 같았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수혁은 이성과 대화를 해 본적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말이 계속 짧게만 나왔다.
“너도 선민고등학교 다닌다면서.”
“응.”
“사실 등굣길에 널 본적 몇 번 있었어. 학교에서 이 동네 사는 사람은 아마 너랑 나밖에 없을 걸?”
“진짜? 난 생각 없이 다녀서 그런지도 몰랐네.”
동네 학생들이 선민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꺼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수혁은 유리의 말을 듣고 새삼 놀라워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지만 난 엄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어, 그 뒤로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는 것이 내 꿈이 되었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선민고등학교에 간 이유도 사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였고.”
유리는 천변을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음, 그렇구나.”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진학했던 수혁은 괜히 할 말이 없어졌다.
유리는 그런 수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고등학교에 가니까 달동네 사람이라는 것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더라고, 그래서 난 더 악착같이 공부했고 의대를 갈 희망도 보았지만 지금은 포기했어.”
“왜?”
“의대에 들어가는 비싼 학비를 내 형편에 감당하기 어렵겠더라고, 그래서 꿈을 바꿨어, 난 열심히 공부해서 돈을 벌면 재단을 만들어서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유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의사가 되는 것보다 더 멋진 꿈인데?”
수혁은 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넌 꿈이 있어?”
“나? 나는 그저 내 인생을 바꾸고 싶어.”
유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혁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수혁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같이 쳐다보았다.
“요즘 여자애들이 네 이야기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래? 난 별로 관심 없어.”
“변하고 싶다는 그 목표 지금 잘 되어가는 것 같은데?”“……”
유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할 말이 없던 수혁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학교에서 딱히 마음 터놓은 친구도 없는데, 가끔 너랑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
“응 그렇게 하자.”
유리는 밝게 웃으며 수혁에게 말하였고 그는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대답을 했다.
“너 2반이지? 난 6반이야 층이 달라 많이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학교에서 보면 아는 척 하자.”
“그래.”
여자와 대화를 많이 하지 못하여 말주변이 없는 수혁과 달리 밝은 성격을 가진 유리는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둘은 한참을 천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간이 흘러 노을이 지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쩌다 보니 수련을 하지 못했네, 근데 오늘은 그냥 좀 쉬고 싶다.’
유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수혁은 마음속에 드는 묘한 기분 때문에 싱숭생숭했다. 그는 이날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용한 밤을 보냈다.
* * *
월요일이 되자 조용했던 주말과 달리 학교는 활기로 넘쳐났다.
수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서 차분히 복싱 교본을 읽고 있었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종욱이한테 배워보니 갈 길이 먼 것 같아, 복싱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수혁은 한참 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평화로웠던 반 분위기가 부산스럽게 변했다.
“야, 야 조금 있다가 전학생이 온데.”
“야, 전학생 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냐.”
종명은 짐짓 근엄한 척을 하며 친구에게 무안을 주었다.
“그냥 전학생이면 말 안하지, 내가 알기로 이번에 오는 애가 국회의원 아들이래.”
“뭐? 그게 진짜야?”
친구들 앞에서 무게를 잡던 종명은 깜짝 놀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종명과 그 무리들은 호들갑을 떨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국회의원 아들? 야 그렇게 되면 거의 우리 학교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거 아니야?”
“그 뿐이 아니야, 그 국회의원이 이 지역구 의원인데 학교를 위해 힘을 써 준 일이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이사장이랑 교장도 꼼짝 못 할 거 같다고 그러던데?”
“뭐야, 그러면 학교에서 아무도 못 건들겠네?”
“근데 그것보다 더 대단한 사실이 있어.”
무리 중 한 명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바람을 잡았다.
“그것보다 더 대단한 사실이라고?”
종명과 주변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집중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오는 전학생이 중앙회 멤버래.”
“진짜? 중앙회면 대박인데.”
“거기 진짜 유명하잖아. 나 게네들 이름 다 알아.”
종명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일인 마냥 흥분해대기 시작했다.
‘오늘 오는 모양이네.’
이야기를 엿 듣던 수혁은 전학생이 조성준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수혁이 듣고 있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신이 나서 계속 떠들어 댔다.
“전학생 이름이 조성준 이라는데?”
“조성준 들어봤어. 싸움도 잘하는데 잘사는 걸로 유명한 애였잖아.”
그들 중 한 명이 아는 체를 하며 떠들었다.
그러자 종명의 바로 옆에 있는 남자가 조용하게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싸움은 중앙회 내에서는 잘하는 편이 아니래, 근데 머리가 좋아서 책사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더라고. 들어보니까 곽혁수가 되게 신뢰 한다는데?”
곽혁수는 중앙회의 실질적인 리더로 싸움실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와, 그러면 완전 실세네. 진짜.”
“우리학교에도 진짜가 오는구나, 사실 우리 맨 날 다른 학교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그랬잖아.”
“그렇지, 이제 우리 학교는 명실상부한 중앙회 멤버가 있는 학교가 된 거야.”
친구들의 대화를 한참 듣고 있던 종명이 조용히 있다가 말을 꺼냈다.
“야, 애들아 이럴게 아니라. 우리도 중앙회에 들어가자.”
종명의 말을 들은 그의 친구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부정적인 주변의 반응에 종명은 한심하다는 듯이 친구들을 쳐다봤다.
“야, 개가 아무리 잘나가도 이 학교 터줏대감인 우리의 도움 없이 안착할 수 있겠냐? 적응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중앙회에 들어가는 거야.”
종명의 말을 들은 수혁은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모자라 보이긴 했었지만, 저 정도로 한심할 줄은 몰랐다. 그건 그렇고 중앙회는 뭐지? 아무래도 변수가 생긴 것 같네.’
수혁은 책을 읽으며 조성준에 대하여 고민을 했다. 잠시 후 수업은 시작되었고 시간은 흘러 3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세단 하나가 운동장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왔다.
통상적으로 차가 운동장까지 진입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몇 몇 아이들은 창문을 처다 보았다.
“야, 왔다, 왔어.”
“어 진짜다.”
종명과 아이들은 무슨 연예인이라도 온 것처럼 흥분하며 창문으로 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수혁은 부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조금 있다가 반으로 오게 될 조성준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조성준은 조용히 지내는 척 하나 어느 순간 본색을 드러내고 가장 만만해 보였던 나를 괴롭혔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수혁은 성준을 떠올리며 주먹을 으스러지듯 세게 쥐었다. 그가 고민을 하고 있던 그 때 몇 몇 학생들은 창가에 몸을 기대고 차에서 누가 내리는지 주목하고 있었다.
“야, 야 내린다.”
차는 정차되었고 성준은 차에서 내렸다.
체구는 크지 않지만 184에 이르는 큰 키와 뒷목까지 흘러내리는 장발을 가진 남자는 차에서 내려 학교를 둘러보았다.
“저는 이제 알아서 갈 테니까 먼저 가세요.”
“알겠습니다.”
운전기사는 대답을 한 뒤 차를 몰고 유유히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성준은 홀로 서서 학교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지 않은 눈이었지만 길게 뻗어있는 눈에서 날카로움이 묻어나왔다.
“재가 조성준인가 보네?”
“맞는 것 같아. 키는 큰데 생각보다 덩치는 별론데?”
애들은 성준을 보며 수군거렸다.
소란을 떠는 아이들과 달리 성준은 차분하게 건물로 들어가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교장과 교감은 미리 나와 성준을 맞이했다.
“자네가 조일오의원님의 아들 되는 조성준인가?”
“네, 그렇습니다.”
“하하 반갑네 난 이 학교 교장 차일승이라고 하네.”
“난 교감인, 박신호라고 하네.”
“네, 안녕하세요.”
반겨주는 그들과 달리 성준은 성의 없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허허, 그래 의원님을 닮아서 그런지 훤칠하구먼, 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잠깐 안으로 드세.”
일승은 성준을 교장실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가죽으로 된 개인용 소파들이 있었는데 상석에는 일승이 앉았고 양쪽에 신호와 성준이 마주보고 앉았다.
“그래, 이곳에 온 걸 환영하네, 우리 학교는 이 지역이 개발된 이후 많은 학생들이 선호하여 최근에 나름 명문 소리를 듣는 그런 학교네, 멀리서 왔을 텐데 차라도 한 잔 들 텐가?”
“네. 그러죠.”
일승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성준에게 차를 권한 뒤 자신의 책상에 있는 다기를 꺼내어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 학교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고? 집은 학교 근처인가?”
신호는 친절한 말투로 성준에게 물었다.
“뭐, 학교 근처에 빌라를 구했어요. 거기서 등하교 할 것 같습니다.”
“자 차들 들게. 성준 학생, 자네의 부친께서 우리 학교를 위해 큰일을 해주셔서 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일승은 은은한 향이 도는 차를 성준과 신호에게 권하며 말을 꺼냈다.
“그렇다네, 혹시 학교 생활할 때 불편한 점 있으면 편하게 이야기하시게.”
신호도 일승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성준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힘들게 도와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리 환대해주시니 부끄럽네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는데 우리야 감사하지.”
건조한 반응의 성준과 달리 그들은 친근감 있게 말했다.
“뭐 저한테 잘 하시면 앞으로 더 큰 것도 많이 도와주실 거예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성준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일승은 그의 무례한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꾹 참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이제 가서 새로운 친구들에게도 인사하고 그래야지, 나가면 담임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만 가보지.”
“네, 그럼 이만 갈게요.”
성준은 그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린 친구가 조금 거만한 거 같군.”
일승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꺼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느꼈습니까?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니까 저희가 이해해야지요.”
신호도 그의 말에 크게 공감하며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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