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저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문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뜻을 알든 모르든 그저 글자들을 무작정 읽었는데 어느 순간 글자의 뜻이 유추가 되었습니다.”
수혁은 머리를 굴려 순식간에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평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거나 말거나 저는 그렇습니다. 그 후 어떤 글자를 보면 지금까지 쌓인 언어적 지식을 토대로 글자들의 뜻을 풀이하는데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 뒤로 제 능력에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긴, 고대의 언어를 누군가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더 거짓말 같은 말이지.”
‘이걸 믿는다고?’
수혁은 마음속으로 조금 웃음이 났다.
평우가 납득을 하는 것 같자 그는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궁금해졌다.
“어르신 혹시 부탁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우리 집안은 선조 때부터 각종 서책을 모으는 일을 하였네.”
“그렇군요.”
“나 때까지 그 가풍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내 자식이나 손주들 중 어느 누구도 가문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네. 수차례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시대에 뒤쳐진 서책수집 같은 것을 누가 하겠냐며 나를 그저 시대에 뒤쳐진 퇴물취급을 하더군.”
“그럼 설마 고서들을 제가 맡아달라는 이야기인가요?”
수혁은 평우의 의도를 간파했다.
“바로 알아듣는 군.”
“그러나 저는 이제 고등학생이라 서점을 운영하고 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수혁은 당장 조성준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고 나중에는 사업을 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난감해했다.
“서점 운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네, 내가 죽는 그날에 이 책들을 맡아달라는 것일세, 그리고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평우는 수혁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 주었다.
“이거는?”
“내 자네를 만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천운이었어, 앞서 말했듯이 난 마음이 내킬 때만 서점을 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제가 운이 좋았죠.”
수혁은 겸손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평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나는 이 서점 열쇠를 자네에게 주려고 하네, 눈치 보지 말고 그저 편할 때 책을 마음껏 읽고 빌려가도 좋네. 자네가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대한 나의 호의일세.”
평우의 말을 들은 수혁은 생각했다.
‘이 서점은 말 그대로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내가 다른 부분에서 막힘이 있을 때 분명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나를 믿어주는 마음을 외면하기 힘들어.’
“좋습니다. 저는 나중에 때가 되면 이 고서들을 잘 보관하고 아끼겠다는 약속을 하겠습니다.”
수혁은 평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그저 믿고 맡기는 것이니 처분은 자네 뜻대로 하시게나. 그리고 난 앞으로 자네를 내 친손자처럼 여길 것이네.”
“네?”
“우리 가족의 일을 해결해줬으니 가족이 아니고 뭐겠는가? 앞으로 날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수혁아, 잘 부탁한다.”
평우는 수혁을 정답게 부르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수혁은 그에게 열쇠를 받은 뒤 인사를 하고 서점에서 나왔다.
‘집에 가기 전에 교복을 좀 사야겠어.’
책들이 가득한 종이가방을 든 수혁은 개학에 앞서 교복을 새로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일 동안 책들을 구매하였지만, 생각보다 큰 지출은 없었기에 교복을 사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수혁은 시내의 한 영세 교복점에서 졸업생이 입었던 중고 교복을 구매하고 집에 돌아왔다.
‘바로 시작하자.’
집에 들어온 수혁은 종이가방에 있는 책들을 꺼내 살펴보았다.
‘일단, 급하니까 무에타이를 먼저 익혀야겠다.’
수혁은 여러 책들 중 칸타빌레에서 받아온 고대 무에타이에 관한 책을 먼저 살펴보았다.
책의 내용은 정말 단순했다. 16가지 무에타이 동작들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었고 각 동작에 맞는 호흡법만 짤막하게 구술되어있었다.
책 뒤쪽에는 부록처럼 특별한 수련법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수혁은 앞부분 먼저 익히기로 했다.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으니 지금부터 바로 익혀야겠다. 책 뒷부분이 조금 남았지만, 이것들 먼저 처리를 해야지.’
수혁은 동작들과 호흡을 익혀나가며 머릿속으로 외우는 작업을 했다.
동작이 많지 않아 빠른 속도로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수혁은 책 없이도 그럭저럭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었다.
“수혁아 우리 왔다.”
“네. 오셨어요.”
수련에 매진하다 보니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고 수혁은 퇴근한 부모를 맞아 같이 저녁을 먹은 뒤 바로 책의 뒷부분을 확인했다.
‘뒷부분은 어떤 내용일까?’
수혁은 무에타이 동작들 뒤에 서술된 내용들을 방에 들어와 천천히 읽어보았다.
책의 뒤편 첫 부분에는 무에타이의 유래와 무술이 함의한 철학이 적혀있다. 가볍게 첫 부분을 읽고 넘긴 수혁은 다음 장을 읽어보았다.
‘이게 책의 저자가 강해질 수 있었던 비결인가?’
뒷장의 내용은 앞서 소개된 무에타이 동작들과 유사한 기본적인 무에타이 자세들을 그린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뒷장의 주요 내용은 그림들이 아니라 책 하단에 적힌 설명에 있었다.
‘몸을 흉기로 만든다고? 이것이 가능하나?’
훈련의 핵심은 온몸을 흉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손과 정강이 그리고 팔꿈치를 미친 듯이 단련하여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이 무술의 핵심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노끈으로 묶은 다음 무조건 치라는 거잖아, 그리고 석영초를 찾아서 잘 때 상처 부위에 바른 뒤 자라는 건데. 석영초가 도대체 뭐지?’
책에는 석영초의 그림과 특징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꽃은 연한 황백색이며 원줄기 끝과 윗부분의 잎겨드랑이에서 마치 오리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라, 이거 그냥 뒷산에 많이 자라는 풀 같은데?’
석영초라 불리는 식물은 우리나라에서 ‘흰진교’라 불리는 야생화인데 가을에 꽃이 만개하는 특징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꽃이 석영초로 불리다니 참 묘하네.’
수혁은 책의 그림에서 꽃 부분 보다는 풀의 모양새를 외어두었다.
아직 여름이라 꽃이 필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권장하는 이 방법으로 수련을 하면 신체의 손상 없이 훨씬 빠른 속도로 신체가 단단해지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저자는 장담하고 있었다.
‘일단 핵심은 신체의 단련이라는 것은 알겠어, 앞부분에서 배운 동작들을 활용해서 신체를 단단하게 만들자.’
생각을 마친 수혁은 그날 밤 고서 앞부분에 서술된 동작들을 다시 한번 읽으며 동작들을 외우는데 열중했다.
‘밧줄이야 아버지가 집에 많이 갖다 놓으신 것을 쓰면 되고 돌은 집에 마대자루가 많이 있으니까 거기에 넣어 와야겠다.’
수혁은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훈련을 계획하면서 잠에 들었다.
다음날이 되자 수혁은 새벽에 일어나 돌과 흰진교를 찾아 나섰다.
동네 뒷산에 진입한 수혁은 등산로를 벗어나 안쪽으로 10분 정도 들어갔다.
그러자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것 같은 풀과 나무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러면 슬슬 찾아볼까?’
수혁은 집에 나오기 전에 흰진교와 돌을 담을 마대자루들을 짊어지고 나온 상태였다.
‘우선, 풀들을 아니 흰진교를 싹 쓸어 담자.’
수혁은 주변에 널린 흰진교를 확인하고는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최대한 많이 담아가기 위하여 풀들을 꾹꾹 눌러 담으니 풀로 우거졌던 수혁의 주변이 어느새 말끔히 정리가 될 정도가 되었다.
“이 정도면 두고두고 꽤나 오래 쓸 수 있겠군. 이제 돌들을 찾아볼까?”
책에 의하면 원래는 훈련을 위하여 샌드백으로 쓸 정도의 커다란 돌을 구해야 했으나 근처에서는 그런 돌을 구할 수 없었기에 수혁은 꼼수를 부리기로 결정했다.
‘커다란 마대에 적당한 크기의 돌들을 채워놓고 바깥을 밧줄로 감싸면 그런대로 쓸 수 있을 거야.’
수혁은 깊은 산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들을 골라 마대자루에 넣었다. 모르고 날카로운 돌을 집어넣으면 큰 부상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혁은 신중하게 돌들을 골라내었다.
‘이만하면 됐어.’
돌들을 충분히 모아 자루들을 가득 채운 수혁은 가득 찬 마대자루들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와, 장난이 아닌데?’
체력이 이전에 비해서 월등히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돌을 가득 짊어지고 산을 내려가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수혁은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다.
‘먼저 세팅을 한 번 해볼까?’
수혁은 돌들이 든 자루들을 이고 옥상마당으로 갔다. 그는 자루 하나를 다른 자루 위에 포개어 눈높이에 맞는 샌드백처럼 만들었다.
‘이제 다음 차례인가?’
수혁은 밧줄로 돌이든 자루를 돌돌 감았다. 작업을 마치고 형태를 보니 마대자루는 제법 쓸 만한 샌드백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바로 시작하자.’
수혁은 책에서 배운 무에타이 동작을 하며 샌드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돌들이 비록 마대자루와 밧줄로 감싸졌다고는 하지만 타격을 하였을 때 느껴지는 통증은 상당했다.
‘윽, 조그만 세게 때려도 너무 아프잖아.’
수혁은 아무 생각 없이 강하게 샌드백을 타격하다가 의외로 강한 통증을 느끼자 훈련을 잠시 중단했다.
‘아무리 아파도 무조건 해야 돼.’
수혁은 이를 꽉 깨물고 정강이로 샌드백을 힘껏 후려쳤다.
“악.”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른 수혁은 너무나 아팠으나 참고 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참고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샌드백을 가격하다가 괜찮은 요령을 찾아내었다.
‘동작들을 번갈아가면서 해야겠다.’
수혁은 킥 동작을 하다가 다리가 얼얼하면 주먹과 팔꿈치로 샌드백을 타격했다. 하지만 생 돌을 가격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수혁의 팔과 다리에는 상처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수혁이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밤 11시였다. 그는 일단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수혁은 흰진교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전에 캐놓은 흰진교를 말려놔야겠다.’
흰진교가 든 마대자루를 옥상 마당에 가져다 놓은 수혁은 바닥에 흰진교를 쏟아내었다.
그리고 쓰지 않는 다른 마대자루를 바닥에 깔기 시작했다.
공사 일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집에는 쓰지 않는 마대자루나 밧줄 같은 것들이 잔뜩 모아져 있었다.
‘흰진교를 일정 시간 건조시켜 놓아야 후에 두고두고 쓸 수 있어. 한 3일쯤 건조시켜 놓으면 되겠지?’
8월말이 되어 밤에는 가을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수혁은 오늘 당장 쓸 흰진교를 따로 빼놓고 마대자루위에 남은 흰진교를 흩뿌려 놓았다.
‘바람이 세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수혁은 집밖에 나와 집 근처 동네폐가에서 벽돌들을 구해왔다. 그리고 마대자루 곳곳에 얹어 놓았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온 수혁은 흰진교를 물에 적신 후 손으로 쥐어짜 으깬 다음에 상처가 난 부위에 골고루 펴 발랐다.
‘잠자는 시간도 줄여야 돼 자기 전까지는 다른 격투기를 익히자.’
자리에 누운 수혁은 잠이 들기 직전까지 복싱 교본을 읽었다.
- 1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