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노인은 수혁에게 눈짓으로 따라오라고 한 다음 사무실에 들어가 탁상위에 책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이 책들의 가치 또한 알아 볼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그는 책상위에 있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수혁은 쌓인 책들을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책은 송나라 때 발간된 책으로 이태백의 시문을 모아놓은 것이군요. 송나라 시대 관직에 있었던 자가 이태백을 흠모하는 마음에 당대에 퍼져있던 시문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수혁은 그러면서 이태백의 유명한 시문 외에 알려지지 않은 시문들을 몇 개 읽어 주었다. 그 외에도 다산 정약용이 유배 중에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적어 놓은 일기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다양한 시문들을 노인에게 해석해주었다.
“하하 놀랍구나, 당대에는 항상 인재가 있다고 선친이 말씀하셨는데 하마터면 내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구나.”
노인은 수혁이 고서들을 능숙하게 읽어내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저 어르신 죄송한데 시간을 알 수 있을까요?”
“지금? 8시30분이다. 아 혹시 집에 들어 가봐야 하느냐?”
수혁은 시간이 많이 늦어지면 부모가 걱정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좀 더 있을 수는 있는데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 같아서요.”
“사무실 전화로 집에 연락을 해라, 부모님이 걱정하시면 날 바꿔라 내가 이야기해주마.”
“네.”
수혁은 사무실 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고 곧 선웅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 수혁입니다.”
“응, 그래 어디냐?”
수혁은 선웅에게 칸타빌레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인은 수혁의 전화를 낚아챘다.
“수혁이 아버지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아, 저는 칸타빌레라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정평우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아들을 참 잘 키우셨습니다. 오랜만에 지우를 만난듯하여 제가 잠시 서점에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저희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신다니 다행입니다.”
평우는 한동안 즐겁게 선웅과 대화를 나눈 다음에 수혁이 서점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맡았다.
“사무실에 침대랑 샤워시설까지 다 있으니 자는 것은 걱정하지 마라, 그것보다 이것들도 봐 줄 수 있겠느냐?”
“네, 가능합니다.”
평우는 사무실 밖에 나가서 고서들을 챙긴 뒤 돌아왔다.
“그럼 시작해보자.”
“네, 어르신.”
그날 수혁과 평우는 밤이 새도록 고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수혁은 주로 고서의 내용을 해석하는 역할을 하였고 평우는 그 책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했다. 어느덧 밤이 늦어져 새벽 1시가 되었다.
“하하하 마음 같아서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자네가 찾는 것이 있다고 하니 더이상 시간을 할애해달라고 하기가 어렵구만. 그러면 이제 원하는 책을 찾는데, 도움을 주겠네. 일로 따라와 보게.”
평우는 수혁을 데리고 서점 안 깊숙한 곳에 배치된 책장 앞으로 데려갔다.
“여기 모여 있는 책들이 자네가 찾는 무술과 각종 격투기에 관련된 책들이야.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책들도 있으니 참고하게.”
“감사합니다.”
평우는 수혁에게 말을 하면서 피곤한지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이만 눈 좀 붙이러 가야겠어, 자네는 원하는 데로 책을 둘러보다가 사무실에서 자게나 문은 잠가 놓고 가겠으니 문단속은 신경 쓸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평우는 대화를 마치자 바로 서점 밖으로 나갔고 이제 칸타빌레에는 수혁만 남게 되었다.
‘일단 책들을 다 둘러봐야겠다.’
책장에 있는 서적들은 시대와 역사가 정말 오래된 것부터 비교적 근대인 조선시대의 것까지 다양하게 배치되어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서적만 보관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온 서적까지 있어 가치를 따지면 이루 헤아리기 힘든 것들이었다.
‘이 서점 자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되겠다. 왜 예전에 수집가들이 여기를 드나들었는지 알겠어.’
책장에는 다양한 고서들이 있었다. 도교에서 유래한 건강도인술, 고대 명의 화타가 쓴 신선체조, 조선시대 무명의 고수가 쓴 택견에 관한 책들도 눈에 띠었다. 수혁은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의 무술이로군.’
수혁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무술인 수박에 관련된 고서를 찾았다.
‘한 번 읽어보자.’
수혁은 책을 펼쳐 읽어보았다. 자신을 고려시대 무인으로 소개한 책의 저자는 수박의 달인으로 전쟁을 하다가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수박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왜구와의 전투에서 창이 부러져 큰 위기에 쳐했었는데 그때 수박을 통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책을 서술하고 있었다..
‘좋기는 한데, 뭔가 무기가 없어졌을 때 보완용으로 익혔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수혁은 책을 집어넣고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유래한 다양한 무술들을 읽어보았다. 중국에서 유래한 무술의 특징은 형을 중요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들어봤던 태극권, 동물의 형상을 본 떠 만든 무술인 당랑권 같은 것들이 있었다.
‘분명히 익히면 도움이 되고 당대 대가들이 쓴 책이기에 그 가치가 높지만, 현대에 통용이 될지 조금 의심이 간다.’
중국 고서를 집어넣은 수혁은 일본에서 건너온 책들을 읽어보았다. 여러 책들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에 관한 책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대부분 사무라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검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현대 시대에 검을 휘두르고 다니기도 난감하니, 이것도 어렵겠군.’
수혁은 이 외에도 책장에서 고서들을 꺼내어 읽어봤지만 쓸 만한 것을 찾기는 어려웠고 그는 점점 난감해져갔다.
‘확실히 옛 무술은 전쟁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아 현대에 쓰기에 쉽지가 않은데 이를 어쩌지?’
한참을 고민하던 수혁은 우연히 책장 맨 위쪽에 가로로 포개져있는 책을 발견했다.
수혁은 책을 끄집어 제목을 읽었다. 어느 나라의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전 처음 본 고대어로 ‘무’라고 한 글자 써져있었다. 그런데 수혁이 제목을 읽자 갑자기 어플이 켜지고 퀘스트 창이 활성화 되었다.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운이 5에서 10으로 상승하였습니다.>
“드디어, 찾았다!”
수혁은 퀘스트에 따른 보상은 잊어버린 채 그저 책을 찾은 기쁨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희열이 가득 찬 표정으로 책을 살펴보았다.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았던 책을 발견한 수혁은 감격하여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좋기는 한데 운이 오른 것이 뭐가 좋다는 거지?’
정신을 차린 수혁은 보상으로 받은 운에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는 운을 그저 스텟 항목에서 본 적이 있을 뿐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고 한 번 내용을 살펴볼까?’
수혁은 당장은 찾은 책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책을 읽어나갔다.
책의 내용은 저자의 서평 그리고 격투기를 익히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나라를 지키는 무인으로서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통 무예인 무에타이에 대해 서술해 보려고 한다. 위로는 한나라가 쳐들어오고 옆으로도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으니 나는 백성들이 목숨을 지키려면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이런 내용의 서평을 읽던 수혁은 책을 쓴 저자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그는 도움말을 키고 물어보았다.
“혹시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 알 수 있어?”
<이자의 이름은 윌라안으로 고대 태국에서 활동했던 무인입니다.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특이하게 적군과 싸울 때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대에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무에타이 고수였다고 합니다.>
‘고대 태국에서 쓰인 책이 어떻게 이 먼 한국까지 온 거지? 아무튼 무에타이라면 현대 격투기에도 많이 쓰이는데 나하고는 잘 맞겠어.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자야겠다.’
설명을 들은 수혁은 만족해하며 책을 사무실 탁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새벽4시가 다 된 늦은 시각 그는 사무실 안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수혁은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시계는 어느새 낮 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느냐?”
평우는 사무실 책상에 홀로 앉아 고서를 읽고 있었다.
“아, 어르신 언제 오셨어요?”
“좀 됐다, 그래 도움이 되는 책은 찾았느냐?”
“네, 찾았습니다.
수혁은 무라고 적힌 고대 무에타이 서적을 평우에게 보여주었다.
“이 책을 본 적이 있어. 난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저 뒤에 그려진 그림들만 봤을 뿐이지.”
“그림에 그려진 그림들은 무에타이의 동작들을 표현한 거예요.”
“허허, 그럼 이 책이 태국에서 건너온 책이란 말이냐?”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먼 남쪽의 나라에서 온 고서라는 사실을 들을 평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 이 책을 찾은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책을 저에게 파실 수 있나요? 역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 책이라는 것은 알지만 저에게 꼭 필요합니다.”
수혁은 평우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이 정도 가치의 책은 함부로 파는 것이 아니지.”
“역시, 그렇군요.”
수혁은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기운이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평우는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말을 했다.
“허나 책의 가치를 아는 너라면 그냥 줄 수도 있다.”
“정말입니까?”
수혁은 그냥 준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평우를 쳐다보았다.
“뭘 그리 놀라느냐, 나는 오래 전부터 책을 귀하게 여기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책을 그냥 주곤 했다. 어제 있었던 대화를 통해서 나는 네가 책을 아끼고 그 가치를 파악할 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그랬나요?”
수혁은 평우의 말에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한 것이라고는 그저 평우가 원하는 데로 책을 읽어 준 것뿐인데 평우는 수혁에게서 뭔가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너에게는 이득을 추구하는 느낌이 나지 않았어, 지금까지 고서를 찾아 여기로 온 대부분은 돈에 환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알량한 지식으로 책의 가치를 알아내어도 난 그런 자들에게 책을 팔지도 주지도 않았다.”
“그렇군요.”
수혁은 이제야 평우의 말이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너와 대화를 볼 때 너는 이득이 아니라 뭔가 그 너머의 것을 위해서 책을 찾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평우는 수혁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전 그저, 저 자신을 바꾸고 싶습니다.”
“흠, 너는 정말 어려운 길을 선택했구나, 그 길은 쉽지 않을 텐데 참으로 용기가 있구나.”
평우는 일전에 도서관에서 만났던 우진과 다르면서도 무언가 비슷한 말을 했다.
“이 책은 너에게 그냥 줄 테니 소중히 다뤄줬으면 좋겠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혁은 평우가 선선히 책을 주자 고마움을 표시했다. 평우는 뭔가 할 말이 아직 남았는지 말을 계속했다.
“그전에 너에게 궁금한 것과 부탁 하나가 있다.”
“무엇인가요?”“난 평생 살면서 고대 태국의 문자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넌 도대체 뭐하는 애냐?”
“저는….”
수혁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런 질문이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받을 것이라 예상하였지만 아직 대비를 못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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