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동현은 백제의 황훈에게 조건을 걸고, 을지문덕은 막리지 자리를 물려 줄 준비를 하다.
황훈은 동현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증명에 관한 것이라면 문서로 남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당연히 해야겠지. 하지만 그것도 너희 백제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찢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우리와 너희 백제 둘 다 그 문서들을 가져간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우리 백제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당연한 것일세. 우리 고구려는 지금 병합한 신라는 물론이고 백제에도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으니 말이야.”
“그럼 대모달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면 해결하되 그렇지 못하면 다시 백제로 가 어라하의 의중을 듣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저자세를 취한다라… 좋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해 주지.”
동현은 크게 웃다가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고치고는 말한다.
“일단 먼저 입조부터 해라. 그래야 우리가 조금이나마 너희들을 믿을 것이다. 처음에 너희 어라하가 직접 입조하기를 꺼려한다면… 그 아들인 태자를 먼저 입조하게 하고 5년 정도 뒤에 너희 어라하를 우리 태왕 폐하께 직접 입조하게 하라.”
“으음… 그 이야기는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어라하께 답을 듣고난 뒤 답을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둘째… 우리에게 조공한다는 문서를 우리 고구려와 백제 둘 다 나누어 가지면서 대외적으로 공표할 것. 셋째는 우리 고구려 상인들이 백제의 항구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 다시 말해서 규제를 대폭 완화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아예 백제 영토에 정착하여 장사를 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지.”
“그 말은 저희 백제 영토에서 점포를 열어 장사를 하려 할 때, 그 점포 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무조건 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시군요.”
“맞다. 백제와 동등한 조건이니 말이다.”
“음… 알겠습니다. 더 있으십니까?”
“두 가지가 더 있다. 넷째로는 백제에서 범죄를 저지른 우리 고구려 사람들은 백제의 법이 아닌 우리 고구려의 법에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게 해줄 것이며 다섯째로는 백제 영토에 있는 해안 모든 곳을 측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다 받아들이고 문서화를 시키고 대외적으로 공표를 한다고 하면… 너희가 제안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겉으로는 동맹이지만… 안으로는 우리 속국인 백제의 의도에 따라 주겠다는 말이다.”
동현의 말에 황훈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한다.
“제가 바로 답을 못할 것 같은 것이 몇 가지가 있군요. 일단 입조 같은 경우는 어라하께 직접 말씀을 드려봐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 같은 경우도 제가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니 만큼 그것도 제가 어라하께 돌아가 직접 답을 듣고 다시 오겠습니다.”
“좋아… 넉넉하게 잡아서 그믐(30일)의 시간을 주지. 만약 그 안에 답이 없다면… 우리의 요구를 백제에서 거절한 것으로 알겠네.”
“그 말씀은…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할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잘 알면서 뭘 그러나?”
동현이 씨익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하자 황훈은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는 동현의 방을 나왔다.
그러고는 바로 말과 배를 타고 백제로 빠르게 돌아간다.
그때 동현의 방에서는 황훈이 방을 나가자 누군가 동현이 있는 병풍 뒤에서 나왔다.
“대모달은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말입니다.”
“나를 추켜 세워주니 고맙네. 아무튼… 내가 저들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네. 받아들일 것이라 보는가?”
“소인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주 굴욕적인 조건인데도?”
“그렇습니다.”
“어째서?”
“현재 백제는 우리 고구려보다 모든 것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라…….”
“예. 우리 고구려보다 국력은 물론이고 무기와 장수 등등… 우리보다 나을 것이 하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고구려를 적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기로 백제의 어라하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자일세.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백제에도 뛰어난 신하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그 신하들이 백제의 어라하가 자존심을 꺾도록 조언을 해줄 것입니다.”
“음… 그러면 우리에게는 최상이겠지…. 허나 그러지 않을 경우도 대비를 해놓아야 해.”
“예. 대모달. 항상 모든 상황에 대비를 해놓겠습니다.”
그렇게 동현은 사훈과 이야기를 나눈 후 이 이야기를 을지문덕에게 전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예. 막리지. 허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어서 태왕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확정되면 그때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그래. 그게 좋아. 섣불리 결정해서는 안 되지. 그리고 모든 것은 태왕 폐하께서 결정하셔야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일을 꾸미고 제안하며 설득을 하는 선에서 끝내야 해. 그 선을 넘어버리면 그것은 권력 남용이야.”
“옳은 말씀입니다. 막리지.”
“그리고 오늘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
“나는 내년을 마지막으로… 이 막리지 자리를 내려놓으려 하네.”
동현은 을지문덕의 말에 깜짝 놀란다.
“예? 막리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번에 돌아가신 선제 태왕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나는 너무 늙었네.”
“늙었다고 해서 이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허나 이제 내 건강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안 좋다기 보다… 이제는 힘에 부치다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 몸을 보하는 보약을 지어먹어도 얼마 가지 못하고 그때 뿐이야. 이럴 때는 답이 없어. 쉬어줘야 하네.”
“막리지…….”
“그래서 내 후대를 자네에게 부탁하고자 했다네. 나는 이 막리지 자리를 태왕 폐하께 고하여 자네에게 주라고 할 것이야.”
“그렇다면 이 대모달 자리는…….”
“그것은 자네가 정하게. 이제 자네는 이 나라의 재상이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모든 군을 이끄는 사실상의 군 통솔자가 될 것이니 말이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제가 힘으로 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할까 봐 두렵습니다.”
동현의 말에 을지문덕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네.”
“어째서입니까?”
“막리지 자리를 물려줄 때 태왕 폐하와 내가 있는 것은 물론 모든 신하들도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자네에게 이 막리지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네. 그리고 그때 자네가 대모달을 지명하게 되면 태왕 폐하께서 대모달 자리를 누가 맡을지 말씀해 주실 것이야.”
“그렇다면 대중상 대장군을 대모달로 올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대중상이 우리보다 젊기는 하나 자네보다 나이는 위야. 헌데 직책은 자네가 위지. 그렇게 되면 대중상이 불편하지 않겠나?”
“…….”
“막리지 자리가 문관을 대표하고 대모달 자리가 무관을 대표해 서로의 직책에서 으뜸인 것은 맞으나… 제대로 보면 막리지 직책이 더 높으니 말일세. 그리고 막리지 자리도 태왕 폐하의 명에 따라 급한 전시 상황에는 전투에 나가기도 하지 않나?”
“그렇다면 대중상 대장군을 막리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현의 말에 을지문덕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대중상은 내 밑에 직속으로 있을 때 지켜봐서 내가 알아. 그는 높은 문관직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높은 무관직 자리를 가질 때 어느 정도 문관직의 벼슬이 있어야 그 직책을 맡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에게는 정치적 능력은 부족하니 문관직으로 높은 벼슬은 필요 없다는 뜻이지. 그러니 문관직은 현재 맡은 그대로 두고 차라리 무관직 벼슬을 올려 주는 것이 나아. 자네가 굳이 그렇게까지 대중상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다만… 대중상의 의중은 모르겠군.”
“…….”
“자네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내가 대중상을 따로 불로 그의 의중을 물어봐 주겠네. 후배가 높은 자리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이야. 아… 그리고 사실 지금도 보면 자네가 더 위가 아닌가? 대장군보다 대모달의 벼슬이 위이니 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문관과 무관의 으뜸 벼슬 두 개가 다 걸려 있으니 말입니다.”
“알겠네. 내가 물어봐 주지. 그리고 답을 바로 주겠네.”
“감사합니다. 막리지.”
그렇게 동현은 잠시 을지문덕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방을 나왔다.
을지문덕은 동현이 자신의 집을 나가자마자 하인을 시켜 대중상을 불렀고 동현이 염려했던 부분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대모달이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사실 지금 자네보다 한 단계 높은 직책에 있는 것에도 매우 미안해 했어. 경력으로는 자네보다 선배인데 말이야.”
“…….”
“헌데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려서 지금의 대모달이 막리지가 되고 자네가 대모달이 되면 또 다른 차원이지. 양쪽 다 으뜸의 벼슬이긴 하나 지위 상 막리지를 더 쳐주니 말이야. 그래서 지금 내가 물려준다고 해도 자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 맞지 않겠다고 했네.”
“그렇게까지…….”
“그래. 자네를 생각하고 있지.”
“…….”
“나는 지금의 대모달이 후배이긴 하나 그 능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하네. 문무를 전부 겸비했고 말이야. 그에 반해 자네는… 병법이나 지략 면에서는 매우 뛰어나나 정치적인 능력은 영 꽝이지. 나는 그래서 자네가 대모달의 말을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네. 그래야 나도 마음 편히 은퇴를 할 것이 아닌가?”
대중상은 을지문덕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지금의 대모달 능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신동으로 불릴 때부터 심상치 않았고 지금까지 봐온 바… 그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으니까요.”
“그래. 잘 아는군.”
“한때 그런 능력을 보고 저도 사람인지라 질투한 적도 있긴 있었습니다.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말입니다. 허나… 그의 능력을 보고는 제가 질투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더군요.”
“워낙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줘서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는 제가 인정한 이 고구려는 물론이고 천하의 기재입니다. 막리지의 말씀대로… 지금 대모달의 말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허나…….”
“……?”
“제 후배인데 제 위로 지금의 대모달이 아닌 다른 자가 앉는다면 저는 인정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후배이나 저보다 높은 자리에 있어도 된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은 오직 지금의 대모달뿐이라는 겁니다.”
대중상의 솔직한 말에 을지문덕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대모달이 지금 그 말을 들으면 좋아하겠구만. 알겠네. 그리고 고마워. 이 이야기 하나로 크게 분란을 일으키지 않아서 말이야.”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든 말로서 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겁니다. 놔두었다가는 언젠가 일이 터질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자…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자네의 의중을 잘 알았으니 이 말을 지금 바로 내 하인을 통해 대모달에게 전하도록 하지.”
을지문덕은 대중상의 말을 듣고는 매우 안심하며 동현에게 소식을 전했다.
동현도 소식을 전해 듣고는 직접 대중상을 찾아가 감사함을 표시했다.
대중상은 그런 동현을 보며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그를 용납하고 받아들여 줬다.
* * *
한편, 백제로 돌아간 황훈은 우선 자신의 아버지인 황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이런 다섯 가지 요구를 했단 말이지?”
“예. 아버님.”
“으음…….”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황훈의 말에 황우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