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동돌궐의 아사나돌길이 고구려에 신종을 결정하고, 동생 아사나사리불은 고구려로 향하다.
의안공주가 막사를 나감으로 인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정적을 아사나돌길이 깨며 말한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희들의 의견은 어떠냐?”
“아버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형님. 대세를 따라서 우리 힘을 키웁시다. 형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는 듯합니다. 일단 고개를 숙이고 우리 힘을 키우고 그 후에 고구려와 붙어도 됩니다. 영토가 통합되었을 때보다 적다고는 하나 우리의 현재 영토는 결코 고구려에 뒤지지 않으니 만큼 그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을 한 후… 다시금 힘을 보여 주면 됩니다.”
“그래. 나도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다.”
“……?”
“그것이 우리 대에서 이루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고구려는 워낙 강성하니 말이다. 수나라의 100만 대군도 막아 냈으며 유주, 병주, 기주 지역까지 모두 장악하는 힘을 보여준 고구려야. 너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형님.”
아사나돌길은 동생 아사나사리불이 동의를 하자 그제야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한다.
“네가 동의한다니 다행이다. 나는 내 부인은 염두에 두었으나 너까지 반대한다면 이 일을 진행시키지 않으려 했었다.”
“당연히 국익이 우선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이더라도 우리 동돌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그나저나… 부인이 걱정이구만.”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형수님께서는 본래 수나라 황실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어떻게든 부인의 마음을 달래보겠다. 너는 열흘 안으로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평양성)으로 갈 준비를 하거라. 예물까지 갖춰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렇게 아사나돌길은 결정을 내리고 부인 의안공주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달래 주려 많은 애를 썼다.
그런 아사나돌길의 노력하는 모습에 의안공주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 보였다.
그런데 며칠 뒤…….
“형님!! 형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혀… 형수님과 아이들이…….”
“……?”
“이럴 것이 아니라… 직접 가서 보십시오!”
동생 아사나사리불이 급히 아사나돌길을 이끈다.
아사나돌길은 동생의 얼굴빛이 사색이 된 채 들어오는 것을 보았기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아니?! 이게 대체…! 어째서 부인과 내 자식들이 죽어 있는 것이냐?”
“형님! 흐흐흑…….”
아사나사리불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도 아사나돌길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사나사리불은 탁상 위에 있던 서찰을 아사나돌길에게 건넨다.
아사나돌길은 그 서찰을 급히 읽어 본다.
[서방님. 그동안 서방님과 아주 행복했습니다. 허나… 저는 본래 수나라의 공주. 그렇기에 서방님의 결정을 도무지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피가 섞인 만큼… 훗날 제 자식들도 불이익을 당할 것이 분명할 터… 그래서 제가 제 자식들과 함께 하늘에 가고자 합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서방님. 제가 죽은 후… 새로운 여자를 부인으로 맞으시고 그 부인의 자식을 나아 뒤를 잇게 하소서.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저를 결코 용서치 마십시오. 그럼… 나중에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의안공주의 유언이 담긴 서찰을 본 아사나돌길은 그제야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느낀 듯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어찌… 어찌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오! 부인!! 애들아!! 흐흐흑……!”
아사나돌길은 풀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한 동안 통곡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리불.”
“예. 형님.”
“지금… 성대히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자결했다는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
“예… 이렇게 된 거… 수나라의 자객들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다고 말을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맡겨 주십시오. 형님.”
그렇게 명령을 받은 아사나사리불은 막사를 바로 나가 장례 준비를 했다.
아사나사리불이 장례를 준비할 동안 아사나돌길은 부인과 자식들의 싸늘해진 시신의 손을 잡으며 예전에 행복했던 일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모든 장례 준비가 끝나자, 동돌궐 사람들도 동생인 아사나사리불에게 모든 소식을 들었는지 대성통곡을 한다.
그러면서 수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다.
“감히 자객을 보내 우리 칸의 가족 분들을 죽이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네!”
“그러게 말일세! 반드시… 반드시 수나라에 복수해야 해! 특히 칸의 대모님께서는 본래 수나라 사람인데도 죽었어! 이것은 수나라가 우리 대모님을 버렸다고 봐야해!”
“그렇다기보다 대모님께서 뜻을 굽히지 않으셨겟지.”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수나라에서 우리 칸께 시집을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 식구이지. 헌데 자객들이 왔어. 그들이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칸의 자식 분들을 죽이러… 아……!”
“자네도 눈치를 챘나보군. 내 생각도 그러하네. 분명 대모님께서는 자신을 죽이기 전까지 자식들을 죽일 수 없다고 막으셨겠지. 그렇게 했으니 자객들이 대모님을 죽이고 칸의 자식 분들도 다 죽이지 않았겠나?”
아사나사리불이 사람들에게 잘 말해 준 듯, 부인과 자식들이 죽은 것이 수나라가 한 소행이라며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그렇게 동돌궐의 사람들은 수나라에 큰 적개심을 품으며 아사나돌길의 부인인 의안공주와 그 자식들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리고 며칠 뒤…….
“동생아. 부탁한다. 본래는 내가 직접 가야했으나 부인과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혼란하여 바로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해합니다. 형님. 제가 고구려로 가서 그들을 상국으로 받들며 번국으로서 인정을 받고 왕으로 인정받는 책봉 칙서와 번국들 중 왕을 뜻하는 옥새까지 다 받아오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아사나돌길은 동생인 아사나사리불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했다.
아사나사리불은 그런 격려를 받자 반드시 이 일은 성사시켜야 한다고 결심을 하고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
며칠 후… 드디어 아사나사리불은 고구려의 영토 안에 들어섰다.
아사나사리불은 고구려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곳저곳 주변을 살펴보는데 옆에 같이 사신단으로 온 수하가 말한다.
“아직 수도에 이른 것도 아닌데 백성들이 평안해 보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음? 저건 무엇인가?”
“저도 처음 봅니다. 허어… 저기서 물이 도는군요.”
아사나사리불과 수하의 말에 국경에서 그들을 맞이한 고구려 관리가 말한다.
“저것은 수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차?”
“예. 저것으로 곡식을 제분하거나 또는 정곡을 합니다. 그리고 농지에 물을 대기도 하지요. 특히 가뭄이 들었을 때 저것이 아주 요긴합니다.”
“허어… 저런 것이 있을 줄이야… 헌데 우리가 고구려 국경을 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니 이 지역은 본래 척박한 곳이더군요. 헌데 농사가 제대로 됩니까?”
“저희도 그것을 우려하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제대로 됩니다. 척박한 곳을 개간하며 농지를 차근차근 늘려서 오늘날에 이르렀지요. 그리고 이곳에 꾸준한 관심을 주니 비옥한 땅으로 변했습니다.”
“그렇군요.”
“이 모든 것이 태왕 폐하와 그 밑의 신하인 건위장군 덕분입니다.”
“건위장군이요?”
“예. 이 수차를 개발하신 분입니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지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헌데 더 대단한 것은 그 분께서는 이런 것을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계책에도 매우 능하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관리의 말에 아사나사리불이 궁금해 하며 묻는다.
“계책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친 것도 그 분의 공이 매우 컸습니다. 물론 막리지 어른과 대모달, 대장군께서도 큰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건위장군에 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어…….”
“우리가 수나라 침입을 막고 수나라 영토를 역으로 공격 할 생각을 누가 했겠습니까?”
“그 모든 계책의 수립을… 그 분이 모두 생각해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계획 수립 및 계책을 건위장군께서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사나사리불은 고구려 관리의 말을 듣고 그 인물에 대해 궁금해졌다.
“내가 태왕 폐하를 알현하고 난 뒤… 그분과 잠시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으십니까?”
“만나보고 싶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분을 뵙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 합니다. 지금 우리 동돌궐이 워낙 어려워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말은 해보겠습니다. 다만 저도 워낙 말단이라서 말만 넣어보는 것이니 무조건 성사가 될 것이란 생각은 버리셔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말을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만약 성사가 되면 귀공께 내가 꼭 사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별 말씀을… 자…! 얼른 가십시다!”
그렇게 아사나사리불은 고구려 관리에게 안내를 받으며 수도인 장안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돌궐 가한 아사나돌길의 동생 아사나사리불이라 합니다. 고구려의 태왕 폐하를 이렇게 알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허어… 예법을 아는구만.”
“타국의 예법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하하하!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군. 헌데… 어쩐 일로 왔느냐? 얼마 전에 귀국의 사신이 내게 크게 매질을 당하여 돌아간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야.”
영양 태왕의 말에 아사나사리불은 갑자기 머리를 땅에 박더니 외친다.
“저희 동돌궐을 보호해 주십시오! 태왕 폐하! 우리 동돌궐은… 고구려의 번국이 되겠습니다!”
영양 태왕은 아사나사리불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묻는다.
“이상하군. 얼마 전에는 우리에게 와서 동등한 관계인 동맹을 요구했는데 말이야. 네가 널 어찌 믿느냐?”
“그렇다면 고구려 쪽에서 먼저 조건을 제시해 주십시오.”
“먼저 제시를 해 달라?”
“예. 태왕 폐하. 제가 듣자하니 이 고구려에서 번국을 삼았던 나라들을 보면 고구려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번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희도 곧 번국이 될 테니, 태왕 폐하께서 조건을 제시할 것은 당연한 바… 그래서 이렇게 먼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양 태왕은 아사나사리불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호오… 그래? 그렇게까지 원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태왕 폐하.”
“좋아. 그럼 건위장군이 조건을 말해 주게.”
“예. 태왕 폐하!”
아사나사리불은 건위장군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며 그 자를 보았다.
초롱초롱한 아사나사리불의 눈빛.
동현은 아사나사리불의 그런 눈빛을 잠시 보더니 무심한 듯 영양 태왕의 황명에 따라 조건을 말한다.
이 조건들은 흑수말갈을 번국으로 삼았던 조건과 거의 동일했다.
“저… 다른 조건은 다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만… 첫째 조건인 볼모의 경우에는 가한의 가족 분께서 이번에 큰일을 당하여 다 죽게 되었는데… 누가 볼모로 오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친인척을 보내라. 아… 그대도 직접 볼모가 될 수 있겠군. 동돌궐을 다스리는 왕의 동생이니 말이야.”
“…….”
“자네가 동돌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 자리를 비우지 못하면… 자네의 아들이나 딸을 보내도 괜찮네. 내가 허락하지.”
“알겠습니다. 소인 일단 동돌궐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리하게. 단… 우리를 속여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야. 다른 사람의 아들이나 딸을 자네 아들이나 딸로 속여서 데려오는 것을 말하는 것일세.”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좋아. 자네들 측에서 볼모를 보내오면 나도 동돌궐을 다스리는 아사나돌길에게 책봉 칙서와 왕의 옥새를 하사하도록 하지.”
“예. 태왕 폐하. 그리하겠나이다.”
“하하하! 오늘은 참으로 기분이 좋은 날이로군! 여봐라! 연회 준비는 모두 되었느냐?!”
“예. 태왕 폐하! 모두 되어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바로 이동을 하지! 우리의 번국이 되겠다고 온 자들인데 잘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얼른 가자!”
그렇게 명령한 영양 태왕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앞장서서 연회장으로 이동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