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사훈, 수나라 사신 배구와 협상에 나서다.
수나라의 사신으로 온 황문시랑(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대신) 배구는 사훈의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참으며 간신히 말을 꺼낸다.
“으음…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요. 두 황자 마마를 돌려달라는 것이오.”
“수나라에서 우리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면서 아무 조건도 없이 돌려 달라니… 염치도 없군요.”
“…어떤 조건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들어드리겠소.”
“그 말… 절대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오.”
“물론 이외다…….”
배구가 힘겹게 그렇게 할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사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배구에게 펼치며 말한다.
“이 내용을 모두 읽어 보시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오.”
배구는 사훈의 말에 서찰의 내용을 읽어 본다.
내용들을 읽어 나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찰을 든 손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구가 내용들을 다 읽고는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언성을 높인다.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오?!”
“뭐가 너무 하오?”
“우리에게 너무 불리한 것뿐이오!”
“그렇소?”
“당연하오! 우리라면…….”
“당신네가 승전국이 되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그… 그렇소!”
배구의 대답에 이번에는 사훈이 크게 언성을 높인다.
“그런 되지도 않을 소리 하려면 당장 협상을 집어 쳐라!”
“뭐… 뭐라고?!”
“너희 중원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우리 영토를 노리고 온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항상 시비를 먼저 건 것은 너희들 쪽에서였다!”
“그… 그것은 우리의 요구를 제대로 듣지를 않아서…….”
“그 요구가 지나치다고 생각 되지 않나?”
“우린 그렇게 과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래? 좋아… 그럼 이걸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훈은 또 다른 것을 자신의 품에서 꺼내어 배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이 무엇인가?”
“네가 직접 읽어 봐라!”
사훈의 말에 배구는 그것을 바로 집어서 읽어 봤다.
잠시 후 그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게 대체…….”
“그래. 이제 알겠느냐? 우리가 조공을 바쳤을 때 너희가 항상 요구하던 조공의 내용들이다.”
“…….”
“너희 나라는 주변 나라들에게 입조를 하라고 요구했지.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그에 따른 사신을 보내어 고개를 숙였다. 너희 나라의 국력이 워낙 대단하니 말이야. 그중 우리나라에게도 그런 사신이 왔고 우리는 당시 주변 정세 때문이라도 너희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단 여기서 전제가 된 것이 있었지. 우리가 조공의 형태였다고는 하나 너희 황제와 우리 태왕 폐하와의 관계는 동등한 관계였다. 그것을 너희 중원의 나라에서도 인정했었지.”
“……”
“너희도 우리 때문에 얻는 것이 있었고 우리도 너희 때문에 얻는 것이 있으니 서로 반목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으니 말이야. 헌데… 언제부턴가 너희는 우리를 동등한 관계가 아닌 아래의 나라로 취급을 했다. 그것은 너희가 한나라 시절… 우리 조선이 있던 시절부터 그랬지. 너희가 힘이 강해지니 우리를 찍어 누르려고만 했고 말이야.”
“……”
“그것에 대한 증거로 너희가 보낸 입조를 요구하는 사신을 들 수 있겠군. 너희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황실의 사람이 입조하길 바랐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말이야.”
사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것은 아마 너희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 때문이겠지. 너희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이며 나머지는 그 아래이고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랬기에 우리에게 입조를 요구한 것이 아닌가? 우리 황실 사람에게 입조하라고 했으니 말이야.”
“…….”
“특히 그중 제일 참을 수 없던 것은 우리 태왕 폐하나 태제 전하를 입조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를 얼마나 얕보았으면 그런 요구를 한단 말인가?! 좀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태왕 폐하께서는 너희가 천자라고 말하는 황제와 동등한 위치다! 그런데 이것이 가당키나 한가?!”
배구는 사훈의 말에 한 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을 꺼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소. 우리가 지나친 요구를 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당신네 태왕의 위치와 우리 황제의 위치가 애초에 동등했다는 것은 난 이해할 수가 없군.”
배구는 자신의 황제와 고구려의 태왕이 동등한 위치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든 거부하고자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사훈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훈의 해박한 역사 지식에 번번이 막혔다.
“자… 좀 더 해보시겠소?! 역사적으로 그대의 중원과 우리나라 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오.”
“으음…….”
“이제 모든 이 이야기는 끝난 것 같군. 자… 어찌 할 것이오?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오? 말 것이오?! 그리고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수나라는 패전국이고 우리 고구려는 승전국이오. 그 점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가시오.”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좋소. 내일 이 장소에서 우리가 오늘 이 일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그럼…….”
그렇게 사훈이 먼저 협상 장소를 나갔다.
사훈이 방을 나가자 배구의 명을 수행하는 수하가 다가온다.
“황문시랑 어른. 어떻게 됐습니까?”
“하아…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저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겠다. 내일 우리가 오늘 이 일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 시간에 다시 나와야 하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예. 황문시랑 어른.”
배구는 그렇게 협상 장소를 벗어나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오늘 일로 인해 충격을 받은 듯 몸을 휘청거렸다.
“화… 황문시항 어른!”
“괜찮다… 으음… 숙소로 가자.”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배구는 협상 장소를 빠져 나갔다.
한편, 협상 장소를 빠져 나간 사훈은 동현의 집으로 가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현의 집에는 동현뿐만 아니라 막리지 연태조와 을지문덕 대모달도 함께 있었는데, 사훈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매우 기뻐한다.
“하하하!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어서 걱정을 좀 했는데… 역시 용양장군이 추천한 자라 다르구만! 아주 잘했네!”
“그러게 말일세! 지금 수나라 사신의 얼굴이 어떨지 안 봐도 눈에 선하군! 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아직 저희가 요구한 내용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니, 이 협상이 모두 끝날 때까지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으하하! 마음에 드는구만!”
동현은 을지문덕과 연태조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는 자신도 기분이 좋아져 말한다.
“오늘 기분도 좋으니 제가 두 분께 크게 대접하겠습니다. 술과 함께 고기도 내오라고 했으니 드시고 가십시오.”
“오! 그런가?! 그럼 먹고 마셔야지! 하하하! 오늘 늦게까지 먹고 마셔보세!”
사훈의 말에 동현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밤늦게까지 고기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어제 귀국에서 말씀하신 조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 그리고 네 번째 조건은 모두 받아들이겠소. 다만 세 번째 조건은 우리 황제 폐하의 재가가 필요하오.”
“나도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소이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 본국에 소식을 전해서 수 황제의 전언을 받아오도록 하시오.”
“안 그래도 오늘 아침 일찍 날이 밝자마자 내 수하 중 한 명을 바로 보냈소. 그러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으음… 좋소. 그 정도는 양해해 주리다. 그런데 마지막 조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군요. 우리는 두 황자 중 한 명만 보낸다는 조건 말이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계속 볼모로 잡아두고 있는다는 것. 이 조건에 대해서는 동의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만?”
“그건 두 분 중 한명을 누구를 데려갈지 귀공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기 때문이오.”
“지금 수나라에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부탁하오. 그것만큼은 우리가 선택하게 해주시오.”
배구가 저자세로 나오지 사훈은 피식 웃으며 묻는다.
“누구를 데려가려 하는지 말 안 해도 짐작이 가는군요.”
“역시 잘 아시는구려. 맞소. 우리는 양광 황자 마마를 데려가려 하오.”
“후후… 그 말이 사실인가 보오. 지금의 태자를 폐태자를 시키려 한다는 것 말이오.”
“그… 그 사실을 어찌 아시오?”
“우리 고구려의 세작들을 얕보는 거요? 우리 고구려 군은 어디라도 들어가 정보를 캐내올 수 있소. 질적으로 수나라의 세작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
“…….”
“뭐… 아무튼 잘 알았소이다. 양광을 데려간다라…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나도 태왕 폐하의 재가가 필요하오. 그러니 귀국에서 세 번째 조건에 대한 답이 왔을 때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알겠소이다. 그리고……,”
“……?”
“이곳에 머물 동안 잠시 행동에 대한 제약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실 순 없으시오?”
“우리 고구려의 내부를 살피려는 속셈 아니오? 그건 쉽게 들어줄 수가 없겠구려.”
“난 그저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을 뿐이오. 기껏 가 봐야 백성들이 사는 저잣거리를 구경하려는 것뿐이오. 아니 되겠소?”
“으음… 그 이야기도 일단 태왕 폐하께 말씀은 드려보겠소. 그 때까지 답을 기다리시오.”
그렇게 사훈과 배구는 또 한 번의 협상을 전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나왔다.
사훈은 그 길로 모든 것을 영양태왕 앞에 가 고했다.
“으음… 백성들을 살펴보고 싶다라…….”
“예. 어찌할까요?”
“자네라면 어찌할 텐가?”
“저도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다만……”
“……?”
“배구가 저잣거리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에게는 정말 후미진 곳을 보여 주시지요.”
“음? 그 말은… 그 사신이라는 자를 속이라는 것이구만?”
“그렇습니다. 그에게 마차를 타게 한 다음 후미지고 잘 개발되지 않은 땅을 배구가 돌아보도록 할 겁니다. 그럼 분명 배구는 우리를 얕잡아 보고 돌아가겠지요.”
“음… 그게 추후에 있는 수나라와의 전쟁을 이기기 위한 포석이겠군.”
“그렇습니다. 그걸 보게 되면 자신들이 진 것은 운이 나빠서이며 이번에 전쟁은 우리가 운이 좋아 이겼던 것이며, 내부적으로는 크게 좋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다고 느낄 겁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구만.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다만 마음이 아프군. 아직도 그런 곳이 있다니 말이야.”
“이제 우리 고구려의 사정도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 그 사람들도 곧 우리 고구려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그에 대해 용양장군이 많이 고하지 않았습니까?”
사훈의 말에 영양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맞아. 실제로 용양장군 덕분에 우리 고구려가 점점 더 살기 좋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아무튼 자네 말은 잘 들었네. 자네의 계책대로 한 번 해봐.”
“예! 태왕 폐하!”
“그리고 태자를 보내는 문제는 저번에도 이야기를 했다시피 양광을 보내는 것으로 해.”
“알겠습니다. 태왕 폐하. 다만 그 배구라는 자에게 제가 생색을 좀 내겠습니다. 그 배구라는 자… 이용 가치가 있어보여서 말입니다.”
“하하하하! 그래! 네 뜻대로 해 보거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사훈은 모든 일에 대해 고하고 재가를 받아 편전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