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73화 (273/280)

제273화

4강 전날 아침에는 뜻밖에 통화가 왔다.

-오빠! 꼭 이겨! 결승은 나 꼭 갈 거니까. 일정 맞춰놨어.

여동생의 응원 전화였다.

사실 응원 그 자체야 매번 해주던 거지만, 대회를 보러 오겠다는 내용은 또 새로웠다.

“야 왜 그런 짓을 했어. 대학생이. 그러다 내가 지면 어쩌려고.”

-오빠 무조건 이길 거니까 걱정하지 마! 뉴욕행 비행기 끊어 놓았으니까. 자신 있지?

자신이 없으면 한 대 때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통화를 끝내자 재호가 피식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이냐?”

“그래. 너는?”

“형이 전화했어.”

“요새는 관계 괜찮냐?”

“형 이미 취직했어. 로펌에. 요새는 내가 집안에 자랑이라고 날 엄청나게 밀어주더라.”

“그러냐?”

그러고 보면 재호는 가족 관계에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가족들이 변호사인 형을 더 이뻐했고, 동생의 성공은 무시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좌절이 재호가 마약 파티에 엮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와 함께 재호가 월드 스타가 돼서인지, 재호는 온 가족에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재호가 문제가 생길 기미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 앞에서는 환희가 환한 얼굴로 부모님과 통화하고 있었다.

“에이 엄마! 오지 마. 오지 마. 온들 무슨 소용이 있어? 다 생방송으로 볼 수 있는데. 그래그래. 우승하면 꼭 엄마한테 고맙다고 할게.”

환희에게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저 녀석은 ‘주환희’가 아니라 ‘주하늘’이었다.

주환희라는 인격은 가수 생활을 위해 만든 껍질일 따름이었다.

이제 주환희와 주하늘은 완전히 통합되었다.

환희는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가수 활동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가수 생활에 딱히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완벽한 팀이었으니까.

‘그러면 만약 우리 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변수는 나뿐인가?’

딱히 내게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대결을 벌였지만, 미리 준비해둔 덕에 건강 상태도 괜찮은 편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부의 문제는 대부분 말끔하게 해결해 두었다.

컨디션 조절까지 잘되었으니 이제는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인 ‘루비 아이’와의 대결이 문제였다.

* * *

4강전 무대에 섰다.

매번 섰던 무대지만 오늘은 왠지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준결승쯤 되니 전 세계인의 관심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오늘 무대는 월드 스타의 상징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진행했다.

8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 정도 인파의 콘서트장은 미국 글로벌 비전 예선을 관람객 입장에서 방문해본 이후 처음이었다.

그 모든 사람이 우리의 노래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말론의 소개와 함께 조명이 꺼졌다.

우리의 무대를 보여 줄 차례였다.

핀포인트 조명이 비원더 3인에게 비쳤다.

밴드는 연주를 멈췄다.

이번 노래의 시작은 오로지 우리 3명의 목소리로 채워 넣을 작정이었으니까.

[그저 우연이었을까

우리의 만남

한순간 스친 것뿐인데

왜 다른 것 같을까]

아름다운 화음으로 시작된 노래는 점차 고조되면서 조금씩 악기가 추가되어 갔다.

하지만 악기는 이번에는 거의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음악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드럼조차 이번 공연에서는 최소화해서 꼭 필요한 하이라이트 부분에만 추가했다.

우리 세 명의 화음과 목소리, 그것에만 집중한 노래였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다시 모든 악기 연주가 잦아들었다.

노래의 마무리를 위해서였다.

우선 재호가 화려하게 가성으로 올려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다가가겠어]

바로 환희가 특유의 리듬감을 강조하며 노래를 받아주었다.

[너와 나 사이, 우연 이상이 있어]

나는 마지막까지 눈을 감고 재호와 환희의 노래에 집중했다.

둘의 감정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서였다.

마치 한 사람이 노래하듯, 자연스럽게 환희의 노래를 이어받아 마지막 피크 파트를 불렀다.

[이제 그 필연을 찾을 거야.

너에게로.]

화려한 고음을 쳤다.

천둥 치듯 모든 악기가 내 목소리와 보조를 맞춰 강렬하게 울렸다.

이윽고, 악기가 사라지고, 3인의 아카펠라와 함께 노래가 마무리됐다.

[그저 우연은 아닐 거야]

잠깐의 침묵 후,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우와아아아아!”

8만, 아니 9만 명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과 갈채가 우리에게 쏟아졌다.

그야말로 태풍에 부딪힌, 그런 느낌이었다.

관객들의 함성은 1분가량 이어졌다.

“자, 그럼 다음 참가자를….”

“우와아아아아아!”

다음 순서를 진행하려 했던 말론의 멘트가 관중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

말론이 피식 웃었다.

그는 말을 멈춘 채로, 관중의 반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멈출 수 없는, 관중의 리액션으로 샤워를 넘어 목욕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 *

간신히 관중이 진정한 후에야 루비아이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루비아이의 변신 또한 충격적이었다.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데스티니가 강력하게 노래했다.

노래라기보다는 랩에 가까운 파워풀한 보컬이었다.

이후에는 애드리아나와 다른 멤버들의 보컬이 이어졌다.

알앤비라기보다 힙합에 가까운 공격적인 음악이었다.

대기실에서 노래를 모니터링하던 재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새롭긴 한데. 너무 밸런스가 안 맞는데?”

환희는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반문했다.

“저는 좋은데요? 힙합이 뭔지 아세요?”

재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자유. 반항. 리듬감. 뭐 그런 거 아니야?”

“요요요요요 예예예예예예예~ 아! 이런 거예요.”

환희가 스텝을 밟으며 힙합 애드립 라인을 들려주었다.

상당히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힙합 느낌이 났다.

그리고 환희의 애드립 라인과 마찬가지로 루비아이의 이번 무대에서도 힙합 특유의 에너지는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 무대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무대면 우리가 질 리가 없어.’

* * *

말론이 무대 한가운데에 올라왔다.

한쪽에는 루비아이, 다른 한쪽에는 비원더가 서 있었다.

말론이 한층 업된 목소리로 루비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멋진 랩이었어! 이제 힙합 하는 거야?”

“몰라요.”

루비아이는 똥 씹은 표정이었다.

말론이 그녀를 위로했다.

“왜 그래? 루비아이도 잘했어.”

“우리 ‘도’ 잘한 거죠.”

재호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속삭였다.

‘쟤 왜 저래?’

‘자기 무대에 만족하지 못했나 보지.’

‘아무리 그래도 루비아이에 대한 환성은 엄청났어. 심지어 데스티니 파트에서는 우리보다 분명 더 열광했다구.’

재호의 말이 사실이었다.

분명 데스티니는 팝스타였다.

우리 셋보다 ‘아직은’ 인지도는 더 대단했다.

그리고 확실히, 그녀의 퍼포먼스는 대단했다.

재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내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게다가, 구글 트렌드도 이번에는 우리 편이 아니잖아.’

‘맞지.’

글로벌 버전 대회에서 득표율을 가장 잘 보여주는 데이터는 다름 아닌 구글 검색량이었다.

보통 구글 검색량이 더 많은 후보가 득표를 이겼다.

구글 데이터를 제압하는 자가 승부에서 이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우리는 전승하는 동안 항상 상대편보다 더 많이 구글에서 검색됐다.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비원더가 루비아이보다는 더 많이 검색되었지만, 데스티니가 단연 검색량에서 압도적이었다.

‘검색량도 우리가 떨어지구. 팬들 함성도 더 많구. 우리 이렇게 떨어지는 거 아냐?’

재호의 푸념을 들은 환희의 표정도 서서히 썩어들어 갔다.

패배를 직감한 모양이었다.

말론이 그대로 대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승자는! 바로바로~~~~~ 이번에는 광고 안 붙이고 바로 할 거야. 총 맞을지도 모르니까.”

재호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물론, 말론이 알아듣지 못하게 한국어로 말이다.

“아! 그딴 재미없는 드립치지 말고 그냥 좀!”

“야, 티비에 입 모양 다 보일라.”

재호가 ‘흡!’ 하고 입을 막았다.

다행히 카메라는 모두 말론을 향해 있었다.

그사이 말론이 승자의 이름을 외쳤다.

“승자는 바로…”

사실 나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

회귀로 얻은 지식 때문이 아니었다.

재호랑 환희 그리고 루비아이가 잊은 ‘기본’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루비아이가 인기 있는 이유였다.

루비아이는 음악보다는 ‘루비아이즈’라는 오디션 프로 덕에 인기를 얻었다.

곡 작업을 할 때도 루비아이는 모든 작업 과정을 리얼리티쇼를 통해 공개했다.

이를 통해 루비아이의 서사에 몰입된 시청자들은 당연히 루비아이의 음악에 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작업기를 담아야 했던 루비아이즈 지난주 에피소드 방영이 불발된 것이다.

‘아마 키스와 데스티니가 사귀고, 싸우고, 또 깨지는 과정을 차마 보여줄 수가 없었겠지. 부모와도 크게 다퉜을 것이고.’

덕분에 관객들은 이번에는 루비아이의 서사를 모른 채로 무대를 봐야 했다.

거기다가 이번 무대는, 데스티니가 너무 튀었다.

다른 3인 멤버들은 사실상 들러리 역할만 했다.

새로운 장르인 힙합을 하다 보니, 장르에 적응하느라 메인보컬 데스티니 외에 다른 멤버들이 역할을 부여받을 겨를이 없었다.

그에 반해 우리 팀은 철저하게 비원더다운 음악을 했다.

각 멤버가 자기의 개성을 모여주면서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다양한 매체 인터뷰를 통해 소개되었다.

4강까지 오르다 보니 비원더에 대해서 서양권 매체에서도 주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비아이가 메인보컬 데스티니의 스캔들로 인해 숨는 동안, 비원더의 이야기는 인터뷰를 통해 널리 널리 퍼졌다.

‘이번만은, 이야기의 힘은 우리 편이야.’

“…승자는 비! 원! 더!”

“으아!”

환희가 털썩 쓰러졌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야 괜찮아?”

환희를 부축하려던 찰나, 배영웅 재호가 나와 환희를 부둥켜안았다.

“야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어!”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배영웅 매니저조차 행커치프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겼다.

우승까지 이제 딱 하나, 결승만 남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기분이랄까.

짝짝짝짝짝짝짝!

그저, 팔짝팔짝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를 만끽할 뿐이었다.

데스티니가 내게 걸어왔다.

“축하해. 내가 졌어.”

나는 데스티니에게 악수로 화답했다.

“고마워요.”

“…내 잘못이야. 내 감정에 취해서, 팀을 신경 쓰지 못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뒤에서 울고 있는 다른 루비아이 멤버를 가리켰다.

“이대로면, 팀은 깨질 거예요.”

“……!”

데스티니가 울먹거렸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빨리 멤버들에게 가세요.”

“……고마워.”

데스티니는 그대로 자신의 자매들, 루비아이에게 다가갔다.

‘아마 다른 멤버들은 원망스러웠을 거야. 데스티니만 조명받는 무대 구성이나 편곡부터 애초에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피처링 가수와 연애하는 행동까지 모두 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경고하지 못했다.

데스티니가 팀의 압도적인 메인보컬이자 에이스, 그리고 리더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 벌어진 거리감이 골짜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골짜기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또 금방 메울 수 있다.

먼저 다가갈 용기를 내기만 하면 말이다.

“와아아아아아앙! 미안해~~!”

어린아이처럼 자매들 앞에서 우는 데스티니를 보며, 나는 루비아이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확인했다.

* * *

‘이제 결승뿐인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온갖 지인에게서 축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어…?”

그런데 그중, 내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문자 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권예슬 님 보호자 되시죠? 성모병원입니다. 오늘, 권예슬 님이 급하게 입원했습니다. 진단해보니 혈액암입니다. 바로 전화 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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