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69화 (269/280)

제269화

방송이 끝난 뒤, 나는 일부러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대기실에 남았다.

관인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항상 경기가 끝난 후에는 패자를 격려하면서 대회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게 승자의 예의랄까?

‘만약 내가 진다면, 그때는 승자가 나를 위로해 주려나?’

큰 의미 없는 생각이기는 했다.

일단 나는 지지 않을 작정이었으니까.

대기실 앞으로 걸어 온 관인이 날 힐끗 봤다.

나와 배영웅 실장을 확인한 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장난스레 물었다.

“제가 그렇게 싫으신가요?”

“아니. 그냥 좀…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대충 그의 의도는 짐작이 갔다.

“대기실로 가 봤자 술은 없어요. 스웨덴 당국에서 이미 다 쓸어갔으니까. 아마 고위 공직자가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관인이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벌써 왔어? 그럼 도망가야겠네.”

역시나, 그가 말한 ‘준비’란 것이 무엇인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미국으로 가실 건가요?”

관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걸 어떻게.”

“행동만 봐도 다 보이죠. 딱 봐도 스웨덴에 신물이 나신 것 같고. 게다가 팝가수인 바로네스 메이어스와 무대도 함께하셨으니 미국과 연결도 생겼을 거고.”

“그 사람은 전혀 몰라. 그냥 무대랑 리허설할 때만 봤지. 그 사람은 미국인도 아니고."

“그래도 매니저는 만났겠죠? 그것도 자주?”

관인이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그가 내게 조용히 질문했다.

“나를 막으려는 건가?”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시든, 스웨덴에 남으시든, 저랑은 상관없죠. 제가 관여하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럼 뭐?”

“그냥, 개인적인 의문이 풀렸습니다.”

“무슨 말이지?”

“알아도 괜찮으시겠어요?”

모르는 게 나으실 텐데.

관인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이번에는 정말 저희가 진 줄 알았습니다. 저희 레퍼토리도 거의 다 떨어졌고. 새로운 곡 아이디어도 이제 없었어요. 모두가 탈진 상태였죠. 그에 반해 당신은 매번 새로운 게스트를 초빙하잖아요? 모든 무대가 새로울 수밖에 없죠. 아마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저희가 이번만큼은 무조건 졌을 겁니다.”

관인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네가 날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은 아주 조금, 이거 지면 ‘패배를 계기로 조금 빨리 미국으로 가자, 오히려 잘됐다.’라고 생각했을걸요. 4강에 진출하면 아무리 그래도 무대를 해야지, 이민 준비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대에 올인하지 않은 겁니다.”

그 약간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우리는 이걸 이기든 지든, 다른 옵션이 없었다.

그저 이 대회에 모든 걸 걸었을 뿐이다.

모든 것을 건 사람의 간절함과 이기든 지든 모든 옵션을 다 준비한 사람의 여유.

그 조금의 차이가 이번 대결의 승패를 갈랐다.

물론 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비를 안 하는 게 멍청한 거지. 그냥 이번에는 어떻게 운이 좋아서 네가 이겼을 뿐이야. 나는….”

그때였다.

느닷없이 문이 열리고, 요한슨 씨가 굳은 표정으로 나와 관인에게 말했다.

“잠깐, 실례합니다 노엘 군. 저 관인 씨와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관인은 아차 싶었는지 도망가려 했다.

“아 그건 저….”

하지만 이미 고위 관료의 눈에 띈 이상, 관인은 도망칠 수 없었다.

일단 오늘은 꼼짝없이 요한슨과 대화를 시작해야 했다.

스웨덴의 공무원들이 관인 주변을 둘러쌌다.

나는 요한슨 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나가면서 요한슨에게 딱 한 마디를 남겼다.

“관인 씨, 어디에 살든 상관없지만 도망친 곳에는 낙원은 없을 겁니다. 자, 가시죠 실장님.”

“자, 잠깐만!”

관료들에게 잡힌 관인을 남겨 둔 채로 나와 배영웅 실장은 재호와 환희가 기다리고 있는 차량으로 향했다.

환희가 투덜거렸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그런 게 있어.”

“관인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죠. 이제 올 것이 왔다구요.”

환희 말에 나도 공감이 갔다.

우리는 결국 우승 0순위 후보이자 팝의 나라 미국의 대표, 루비아이와 붙게 됐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재호도 무겁게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상대와는 차원이 달라. 바로네스 메이어스 정도가 인기로는 비슷할까? 하지만 둘은 또 전혀 다른 타입이라구.”

나도 동의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분명 루비아이보다도 더 대단한 팝 스타였다.

하지만 ‘글로벌 비전’이라는 대회에서 그녀는 약간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스트 입장일 따름이었다.

워낙 작은 나라 출신이라 예선이 사실상 없이 바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루비아이는 온 세계의 글로벌 비전 시청자들이 가장 몰입하면서 본 팀이었다.

제일 치열한 지역 예선인 미국 지역을 뚫고 올라온 참가자였다.

여유 있는 중저음으로 노래하는 보컬인 바로네스 메이어스와는 달리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오디션에 적합한 고음 보컬이 즐비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압도적이었다.

운전 중인 배영웅 매니저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저희가 참여했던 한국 예선이 좀 화제가 되었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상대가 안 되죠. 미국 예선은 온 세계 사람들이 기본으로 본 방송이었고, 한국 예선은 좀 독특한 취향의 어린 유색인종들이 별식으로 즐긴 방송이었고.”

내가 배영웅 매니저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비아이의 우승을 원한다는 거잖아요?”

배영웅 매니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루비아이의 ‘이야기’를 가장 많은 이들이 들었고, 공감했으니까요.”

환희가 배영웅 매니저의 키워드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이야기…!”

결국, 가수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기술도 좋아야 하지만 음악적 기술은 하나의 이야기로 전달되어야만 그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루비아이야말로 절대적인 이야기를 가진 존재였다.

전 세계의 ‘글로벌 비전’ 시청자 중 과반수가 루비아이가 참여한 미국 지역 예선을 보면서,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게다가, 루비아이의 서사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루비아이의 히트곡 ‘Lioness Flame(사자의 불꽃)’을 틀며 말했다.

“루비아이의 이야기가 가진 상징성이 있어요. 가난한 할렘가의 부모들. 그들이 자기 딸과 친척들의 재능을 확인해요. 그래서 딸 데스티니를 주축으로 사촌인 애드리아나 등까지 데려와서 그룹을 결성.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루비아이 덕분에 가족 전체가 성공하는 그런 이야기.”

온 가족이 딸의 재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고난을 극복한다.

어쩌면 흔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잘 먹혔다.

내가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핵심은 메인 보컬인 데스티니지만. 은근히 애드리아나가 키 퍼즐이었죠. 애드리아나의 중저음 덕분에 화음이 너무 풍성해졌으니까. 우리랑 오디션 봤을 때는 그 애가 저렇게 슈퍼스타가 될 줄은 몰랐는…데에?”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운명의 장난처럼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오빠! 드디어 우리가 붙네! 오빠네들이 끝까지 올라올 줄 알았어. 밥이나 먹자 밥이나! 이제부터는 적이니까. 그 전에, You know?

내 핸드폰에 애드리아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 *

이번 대결 장소인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애드리아나와 점심 식사를 잡았다.

애드리아나가 머무는 호텔 방에서 만났다.

못 본 사이에 애드리아나는 훨씬 더 고혹스럽게 변했다.

하긴, 그녀를 처음 내가 데뷔했던 ‘슈퍼스타 T’에서 봤을 때 그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실감이 났다.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애드리아나가 피식 웃으며 내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 크루즈에서는 그래도 가끔 봤는데.”

“그야 너는 너무 경호가 빡세니까. 쉽게 만날 수가 없지. 일부러 이렇게 보지 않고서는….”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역시나 루비아이는 철저한 경호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애드리아나는 너무 위험해서 외부 레스토랑에서는 밥도 함부로 못 먹는다고 했다.

루비아이는 점심 메뉴도 굉장한 고급 요리만 나왔다.

어딘가에서 공수해 온 인도 요리도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특히 와인이 굉장한 퀄리티였다.

내가 애드리아나에게 와인병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얼마냐?”

“글쎄? 한 200만 원 하지 않으려나?”

나도 모르게 눈이 튀어나왔다.

“와인이…??”

애드리아나와 식사를 하면서 비로소 내가 정말 세계 정상급 걸그룹 멤버와 식사하고 있구나 실감이 났다.

“정작 본인 옷은 몇천 원짜리 올드 네이비 츄리닝을 입고 있으면서. 뭐 하러 이렇게 비싼 와인을 먹어?”

애드리아나가 핀잔을 줬다.

“무슨 소리야 오빠! 이건 내 용돈 주고 산 거고. 음식은 당연히 회사 거지!”

“아 그러냐.”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우리 주변에는 경호 인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애드리아나. 이거 물어봐도 되는가 싶은데.”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이 어디 있어? 다 물어봐.”

“저 카메라들 다 뭐냐?”

“이 미팅 방송에 나갈 거라고 말했잖아.”

“아, 그게 이런 뜻이었어? 그냥 시적인 표현인 줄 알았지. 진짜 방송으로 우리 식사 장면까지 찍는 줄은 몰랐네? 너무 빡세게 사는 거 아냐?”

애드리아나가 와인을 마시며 무심하게 내게 대답했다.

“그냥 24시간 대부분이 다 촬영에 나간다고 보면 돼. ‘루비아이즈’라는 리얼리티 쇼를 매주 진행하고 있거든.”

그 말을 듣고 보니 말도 안 되게 비싼 와인을 마시는 이유도 납득이 됐다.

이 와인도 아마 방송.

PPL의 일부일 테지.

“인기가 많나 보지?”

애드리아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방송이 저희의 전부예요.”

글로벌 비전이 아니라?

음악이 아니라 리얼리티 쇼가 가수의 전부라니, 뭔가 문제 발언 같았지만 일단 넘어갔다.

잠시 제작진인 것 같은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양해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배터리가 닳아서 교체하겠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주 잠깐 나와 애드리아나는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애드리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데스티니의 엄마, 그러니까 저한테는 고모죠. 그분이 많이 변했어요. 카메라는 돈이 되니까요. 이제는 카메라를 피할 곳이 없어요.”

“그 정도야?”

애드리아나가 입으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심지어 오늘도 오빠 만난다니까. 시청률에 도움 안 되는 동양인 남자랑 밥 먹지 말고, 섹시한 할리우드 배우랑 데이트하라는데요. 그게 화제가 돼서 돈벌이가 되니까.”

“데이트도 아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조카한테 할 말인가?”

못 보던 사이에 애드리아나의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월드 스타가 되었으니 변화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변화가 썩 좋기만 해 보이지는 않았다.

* * *

나는 배영웅 실장과 함께 우리 숙소인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 숙소도 나쁘지 않았지만, 사실상 호텔 한 층을 통째로 전세 내서 쓴 루비아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방에 들어가니 환희는 바닥에서 운동 중이었고, 재호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환희가 먼저 물었다.

“왔어요, 형?”

“그래.”

“어땠어요? 애드리아나?”

“루비아이는 그사이 완전히 월드 스타가 됐더구만? 우리랑 스케일이 달라."

“그 정도예요?”

재호가 읽고 있던 잡지를 소파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야, 이런 거까지 하니까 바쁘겠지.”

“이게 뭔데?”

“읽어봐.”

재호가 내민 잡지를 읽었다.

제목 : 애드리아나, 직접 디자인한 패션 브랜드 런칭!

소제목 : 애드리아나 ‘언제나 패션에 관심 많았어…. 이렇게 나의 패션을 나눌 수 있어서 기뻐.’

조금 전 애드리아나의 패션을 떠올려봤다.

검은색 티에 검은색 츄리닝.

항상 애드리아나는 그런 편한 차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애드리아나가 직접 디자인을 맡아서 패션 브랜드를 만들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건 대체 뭐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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