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이번에 우리가 들고 온 음악은 스웨디시 팝의 느낌을 가득 채운 밴드 음악이었다.
그래, 약간 아바 같은 느낌의 음악이랄까?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멜로디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그런 음악 말이다.
여기에 아이 요한슨의 신비로운 코러스가 더해졌다.
우~
아이 요한슨이 멜로디를 맡고, 조민하 선배가 화음을 맡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코러스를 쏟아냈다.
“와아아!”
전주만 들었음에도 팬들이 감탄사를 자아냈다.
지켜보는 나도 뿌듯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
재호가 먼저 노래의 포문을 열었다.
[킬 더 킹
왕을 죽여라.
왕은 신이 아니야.
그도 사람이야]
자연스레 노래가 1절 후렴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마이크가 펑 하고 터졌다.
연주는 계속되었는데, 마이크 소리가 안 나왔다.
‘이런…!’
멤버들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노래를 부르지도 못하고 패닉에 빠지려 했다.
나는 재빠르게 멤버들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눈빛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걱정하지 마. 우리 이걸 미리 알고 대비했잖아?’
내 눈빛을 읽은 멤버들이 재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글로벌 비전 글로벌 본선 참가 전에 우리는 빅4라는 아카펠라 그룹과 특훈을 했다.
그중에는 갑자기 반주를 끊은 후, 침착하게 노래하기 미션이 있었다.
일부러 비상 상황을 연습해 둔 것이었다.
우리가 연습한 상황에 비해, 마이크 소리만 끊어지는 상황은 대처가 쉬운 편이었다.
하여튼 반주는 있었으니까.
5초 정도 지났을까.
바로 마이크 연결이 복구되었다.
우리는 마치, 사고가 없었다는 듯 능숙하게 바로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운명은 조종할 수 없어.
부적으로도 보시로도.
운명을 받아들여.
Enjoy the ride, you]
이번 노래의 이름은 ‘킬 더 킹’.
나를 구속하는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라는 도발적인 가사를 대중적인 음악 안에 담았다…는 것은 사실 핑계였다.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그 속에는 우리 삶을 반성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남 비판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모순이나 생각해보자는 거다.
…예를 들면 전범에 연루된 군주를 가진 역사가 있는 일본 자신의 군주제에 대한 반성이라던가.
일본 관객 상당수가 분노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관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밝게 웃고 있었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도발적인 가사를 넣어 둔 음악으로 들렸겠지만, 사실은 베이즈에 대한 도발이 담겨 있는 노래였다.
베이즈 보컬과 눈이 마주쳤다.
카가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득표 계산합니다!”
카가와가 내게 분노하며 물었다.
“다른 나라 문화를 그렇게 멋대로 비난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그냥 제 사상을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듣는 사람 몫이겠지요. 그건 베이즈의 음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크윽!”
카가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의 가사나 우리의 가사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잠시 우리와 베이즈 모두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깬 건 베이즈였다.
이번에는 베이즈의 베이시스트, 히로시가 빈정댔다.
“여기는 재패니즈 타운 근처야. 일본을 무시하고서 득표가 제대로 될 거 같나? 후회하게 될 텐데.”
“일단 시청자는 전 세계 사람들이고요. 라이브 반응도 좋은데요? 함성소리 안 들려요?”
그 말을 들은 베이즈 멤버들이 일제히 관중을 쳐다봤다.
비원더 무대에 흥분한 관중들이 멤버들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재패니즈 타운 근처 외국인들은 쿨재팬에 경도된 사람들인데, 왜 한국을 응원하는 거지?”
베이즈는 아마 일본 팬덤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카가와의 말은 맞았다.
재패니즈 타운 근처에는 주로 일본인 중심으로 제이팝과 아니메 등 일본문화를 소비하는 일본문화 애호가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점이 하나 있었다.
이미 2006년부터 제이팝을 타고 케이팝이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 대표 주자가 내 회사 선배인 문루아였다.
한국 가수지만 일본 최정상 댄스 가수기도 한 문루아 선배는 일본 방송을 타고 브라질에서도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 인기는 재패니즈 타운을 타고 브라질에까지 번졌다.
그들은 당연히 문루아와 오디션에서 대결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멤버들로 구성된 비원더에게도 관심이 있었다.
‘혹시, 우리도 브라질에서 인기가 있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배영웅 매니저를 통해 현지에서 비원더의 인기가 어떤지 확인해봤다.
내 예상대로 비원더는 브라질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가사가 문제라는 베이즈의 경고도 큰 효과가 없었다.
브라질에서 사는 일본인들, 혹은 일본문화를 즐기는 외국인들에게는 우리의 가사가 그다지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번 대결은 자연스레 누가 더 일본문화를 애호하는 팬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느냐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비원더는 베이즈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제이팝 특유의 단조 감성에, 스웨디시 팝의 풍성한 느낌을 섞은 싱어송라이터, 아이 요한슨 덕분이었다.
우리는 제이팝 특유의 감성은 살리되, 여기에 세련된 느낌을 더했다.
그에 반해 베이즈는 80년대 베이즈의 음악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인 곡을 연주했다.
잘하긴 했다.
하지만 전혀 신선하지 않았다.
‘읽히는 음악만큼 한심한 건 없지.’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급작스럽게 일어난 음향사고를 극복해서 호감 표를 잔뜩 얻어낸 상태기도 했고 말이다.
“음향사고에 사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고 이유는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절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작진의 사과 후 승자 발표가 이어졌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승자는 비 원 더!”
* * *
상파울루의 한 호텔 방안.
글로벌 비전 무대를 보던 예정 엔터 백 이사가 마이크를 내던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분명 그의 계략은 제대로 먹혔다.
그의 계획대로 비원더의 무대 중 급작스러운 음향사고가 일어났다.
백 대표의 생각에는 분명 저런 사고가 나면 당황해서 무대를 망쳐야 했다.
그런데 비원더는 마치 예상된 일이었다는 듯, 태연하게 사고를 넘기고 훌륭하게 무대를 해냈다.
자신의 공작이 미리 들통났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깔끔한 대처였다.
‘배신자라도 있는 건가… 여튼 다른 수를 써 봐야겠지.’
백 이사는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비원더를 공작으로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자신이 미는 가수가 우승할 방법은 없다.
마지막 예정 엔터의 아티스트인 ‘베이즈’가 탈락했기 때문.
이번 글로벌 비전 무대를 통해 자신의 소속 가수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겠다는 예정 엔터의 계획은 수포가 된 것이다.
한숨을 푹 쉬고 있던 그때, 누군가 호텔 방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백 이사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보안 요원들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예정 엔터 팩 디렉터시죠? 글로벌 비전 무대 음향사고를 사주하셨던데요. 잠깐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백 이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음향사고를 유발하던 예정 엔터 직원의 모습이 CCTV에 잡혔습니다만? 직원이 팩 디렉터를 주모자로 지목했습니다.”
백 이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멍청한 놈이!’
* * *
무대가 끝나자마자 비원더 멤버들은 하우스 밴드와 함께 자가용 비행기에 탑승했다.
다음 무대인 오사카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8강은 일본, 4강은 유럽, 그리고 결승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강행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나눌 틈도 없구만.’
내 옆에는 배영웅 실장이 앉아 있었다.
배영웅 실장이 내게 속삭였다.
‘노을 아티스트님 말대로였습니다. 예정 엔터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더군요.’
‘한 번 하는 놈이 두 번 안 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배영웅 매니저가 손가락으로 승리의 브이 자를 만들었다.
‘저 같으면 뭘 할까 고민해봤는데요. 이전에 예정 엔터에서 방송 장비 장난을 쳤잖아요? 근데 안 걸리고 넘어갔고요. 걸렸으면 안 했을 텐데, 안 걸렸으니까 또 그걸 할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파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상하게 CCTV가 꺼진 포인트가 있더군요. 그다음은 쉽죠. 여기에서 장난질을 칠 게 확실하니까. CCTV를 복구하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직원은 잡혔고, 잡히자마자 백 이사까지, 예정 엔터의 꼬리가 제대로 잡혔다.
게다가 지금 방송은 한국 예선과는 달리, 글로벌 본선이 진행 중이었다.
전 세계의 글로벌 기업들이 모여서 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적당히 로비로 무마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뜻이다.
‘이제 예정 엔터는 큰일이네요.’
‘소송도 당하고, 무엇보다 곧 기사를 통해서 부정행위가 발표될 거예요. 예정 엔터는 이제 끝난 셈이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단 베이즈를 이긴 것은 좋았지만, 이제 겨우 8강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베이즈보다 버거운 상대만 남았다.
8강쯤 되면 모든 상대방이 다 우승 후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은 한숨 돌렸으니, 오사카 도착하면 하루 이틀 정도만 쉬어 볼까?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핸드폰이 느닷없이 울렸다.
이번 16강전에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아이 요한슨'에게서 온 이메일이었다.
-노으루 상!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 같아요. 꿈을 이루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다음 무대는 오사카라면서요? 운명의 붉은 실이 우릴 엮어줬나 봐요. 거기, 제 고향이에요. 한번 같이 식사 어떠세요? 저도 곧 비행기 편으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 * *
다음 날, 우리는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커피숍에서 아이 요한슨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차 적응 훈련하길 잘했다. 비행기 타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매번 낮과 밤이 바뀌네. 시차 적응 훈련 안 했으면 온종일 해롱댔겠어.”
재호가 하품하며 말했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도 시차 적응이 완전하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재호에게 대답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반주 끊기’도 다 도움이 됐잖아. 덕분에 마이크가 안 나와도 대처가 됐지.”
“그런 황당한 일 이젠 없었으면 좋겠는데. 왠지 아직 한참 남은 거 같단 말야?”
그렇게 수다를 떠는 사이 아이 요한슨이 커피숍에 도착했다.
아이는 일행과 함께였다.
“여기는 저희 아버지 라릭 요한슨이에요. 스웨덴의 외교관이셨고 지금은 정부 기구에서 일하고 계세요.”
라릭 요한슨은 멀끔하게 잘생긴 미중년 유럽인이었다.
깔끔한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내추럴 블론드로 다듬은 멋들어진 예수 스타일 턱수염이 돋보였다.
그가 크고 밝은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내게 인사했다.
독특하게 억센 북유럽 억양이 담긴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딸이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어요. 제가 매번 도와준다고 해도, 딸이 한사코 자기 힘으로 하겠다고 사양해서 걱정이 많았는데요.”
환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아이 상에게 도움을 크게 받았는걸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역시나 일본에서 예능을 많이 해본 멤버라 그런가, 꼭 일본인처럼 겸허함을 한껏 담은 답례를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아이 요한슨은 세련된, 그러면서도 일본의 미를 간직한 음악을 했다.
그녀의 음악은 ‘올드한 일본의 음악을 하는’ 베이즈를 저격하는 느낌이 있었다.
사실 베이즈의 음악도 매우 완성도가 높았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아이 요한슨을 만난 덕분에 순조롭게 베이즈를 이길 수 있었다.
요한슨 씨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다가 겸손하시기까지 하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는 저와는 적이긴 하지만요.”
재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적이요? 무슨 말씀이시죠?”
아이 요한슨이 우리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되물었다.
“아… 모르셨어요?”
“뭘요?”
궁금한 내가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재촉했다.
이번에는 요한슨 씨가 아이 대신 대답했다.
“비원더의 다음 상대는 스웨덴의 자랑, 디제이 관인(Guanyin)입니다. 적으로 만난 셈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