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아이 요한슨과의 미팅이 끝나고 비원더 3인과 앤젤이 연습실에 남았다.
앤젤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참… 국민 밴드 보컬이란 사람이 잘하는 짓이다.”
아이의 친구 중 한 명은 베이즈의 보컬리스트 토도의 내연녀였다.
그래, 뭐 여기까지도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토도에게는 도벽이 있었다.
본인이 엄청난 부자임에도 종업원의 신용카드를 습관적으로 훔쳐서 돈을 빼내 썼다.
내가 앤젤에게 물었다.
“왜 그런 일이 아직도 안 퍼졌을까?”
“모르겠는데? 좌우지간 일본 언론은 알면서도 쉬쉬하는 거 같은데. 우리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기자들이 모를 리가 없잖아? 아마 이렇게 약점을 잡고는 자기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바로 기사를 터트리겠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한 언론이면 모를까 언론 전체가 입막음이 된다고?”
앤젤이 뭔 새삼스러운 소리냐는 듯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게 일본인들이 맨날 지킨다는 ‘와’라는 거잖냐. 평화를 지킨다고.”
평화라.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그 평화를 깨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우리가 터트릴까?”
재호가 되물었다.
“터트려? 어떻게?”
“일본에서야 와가 통할지 모르지만, 글로벌 비전은 일본이 아니야. 전 세계가 기준이라고. 전 세계의 언론을 다 막을 수는 없지.”
환희가 미심쩍은 듯 내게 질문했다.
“그게 우리에게 이득이 될까요?”
“그게 문제냐? 누군가가 오늘도 돈을 털리고 있는데. 이건 일단 막고 봐야지.”
“그러네요. 피해자가 있는 범죄니까. 너무 제 생각만 한 거 같아요.”
베이즈에 타격을 주기 위해 기사를 터트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사가 터지면 이후 베이즈는 어떻게 대응할지, 나도 조금 궁금하긴 했다.
* * *
얼마 뒤 ‘더 타임즈’에서 토도의 행실을 폭로하는 기사가 터졌다.
배영웅 매니저와 천채왕 프로듀서의 솜씨였다.
제목 : 베이즈 보컬리스트 토도, 애인 카드 상습 절도
‘윽….’
제목만 봐도 불쾌해지는 기사였다.
본문을 읽어 보니 토도는 매일같이 애인들의 신용카드를 훔쳐 썼다.
그는 결혼한 남자니, 물론 그들 모두가 다 내연녀들이었다.
딱 봐도 이 기사에 참여해 폭로한 전 애인 수만 해도 대여섯 명이 넘었다.
조금만 취재해봐도 이렇게 술술 터지는 기사를 그동안 언론에서 막고 있었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 일본만 탓할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식으로 언론 권력을 악용하는 경우는 많았으니까.
다만 베이즈는 자신들이 이미 글로벌 비전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글로벌 스타에게는 글로벌 기준의 윤리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의외로 이후 진행은 빨랐다.
토도는 금방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베이즈 탈퇴 및 글로벌 비전 대회 참여 중지를 선언했다.
대신 기타리스트인 카가와가 보컬까지 맡기로 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우리가 승기를 잡은 건 아니야.’
베이즈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토도가 빠르게 탈퇴한 덕분이었다.
게다가 베이즈는 전 멤버가 뛰어난 연주력을 자랑했지만 개중에 약점은 보컬이었다.
베이즈의 핵심 멤버들은 그대로란 뜻이었다.
‘이걸로 이길 수야 없겠지. 그걸 기대하지도 않았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나섰을 뿐.
하지만 내게는 아이 요한슨이라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 * *
밴드 멤버들에게 아이 요한슨의 곡을 처음 들려주었다.
곡을 듣자마자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곡을 쓰는 조민하 선배의 반응이 대단했다.
“이건…!”
“굉장하죠?”
“굉장한 정도가 아닌데요? 대체 어디서 이런 데모를…. 이거 그대로 저희가 연주만 해줘도 정말 엄청나겠어요.”
‘천채왕 프로듀서도 똑같은 반응이었지. 이미 TYB와 계약은 완료한 상태고.’
“이걸 이번 16강전에 부르려고요.”
조민하 선배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가능하겠어요?”
“뭐가 가능한가요?”
“분명 이건 대단한 음악이에요. 근데 멜로디가 굉장히… 사파적이죠. 메이저 코드를 쓰는데 마이너 느낌이 나는, 묘한 분위기인데. ‘이 멜로디에 걸맞은 묘한 분위기의 가사를 누가 쓸 수가 있겠냐?’라는 말이에요.”
조민하 선배의 지적은 확실히 날카로웠다.
아이가 쓴 곡에는 어두우면서도 차가운 느낌의 멜로디가 담겨 있었다.
아이는 일본어와 영어로 핵심 단어만 몇 개 반복할 뿐, 완성된 가사를 붙여놓지 않았다.
그만큼 가사를 붙이기 어려운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묘한 분위기가 핵심이었다.
일반적인 가사는 아예 입에 붙지도 않았다.
게다가 글로벌 비전 본선용 곡이니만큼 영어 가사는 필수였다.
작사 난이도가 더 올라간 셈이다.
하지만 내게는 복안이 있었다.
“가사는 저랑 환희에게 맡기세요.”
딱, 아이의 곡과 어울리는 가사 컨셉을 나는 이미 갖고 있었다.
‘한 번 제대로 신을 죽여 보는 거야.’
* * *
어느새 베이즈와의 대결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16강이 벌어지는 상파울루에 갔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도시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아이 요한슨 및 밴드 멤버들과 낮이건 밤이건 연습실에서 무대를 준비하는 데 모든 시간을 다 썼다.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미디어 데이 날이 돼서야 비로소 우리는 바깥에 잠시 나올 수 있었다.
세계 어디나 미디어 데이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 언론의 태도였다.
베이즈의 보컬리스트가 타국 언론의 저격 기사에 당해서 출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서였을까?
아니면 일본의 국민 밴드 베이즈의 탈락 위기라고 느껴서였을까?
여하튼 일본 언론은 비원더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총공격을 가했다.
“토도의 기사를 비원더가 사주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이전에 글로벌 비전에서 팝가수 바로네스 메이어스와 대결하셨죠. 패배한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승리한 비원더보다 훨씬 관심을 많이 받던데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팬들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원더 멤버 주환희의 스캔들은 어떻게 끝난 겁니까?”
이 사람들, 일부러 비원더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자들과 싸울 순 없으니 적당히 회피하는 대답을 했다.
‘저 열정으로 한국 언론도 베이즈를 공격하고 있겠지?’
그러나 일본의 질문 중 제대로 대답해 줄 만한 질문도 있었다.
질문의 내용은 이랬다.
“한국 대통령이 비원더와 만났다고 하는데요. 정부의 비호를 받고 비겁하게 성공한 그룹이라는 평가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재호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줄 말이 많았다.
‘이 질문을 하기만 기다렸지. 너 잘 걸렸다!’
내가 마이크를 집었다.
“베이즈는 뮤직비디오 촬영을 오다이바에서 했더군요. 원래는 촬영이 어려운 곳이라고 아는데요.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
질문한 기자들은 물론, 일본 언론 모두가 침묵했다.
“저희는 직접 1주일 만에 장소 섭외까지 해내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서포트가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겉보기에는 일본 관료들을 칭찬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우회해서 일본 언론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말이었다.
정곡을 찔렸는지, 일본 쪽 기자들의 질문이 잠잠해졌다.
내가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질문 없으시면 이 정도로….”
그때였다.
일본 기자 중 한 명이 다시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베이즈는 80년대부터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던 글로벌 일류 그룹입니다. 이미 세계를 제패한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과의 대결이 떨리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세계제패?
베이즈는 물론 대단한 그룹이다.
하지만 미국 재즈 차트에 몇 번 이름을 올린 걸 가지고 ‘세계제패’라니, 말이 좀 과했다.
아무래도 질문을 던진 기자가 애국심 때문에 좀 과하게 허풍을 섞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무 감정을 실으면 촌스러워지는 법이다.
나는 최대한 드라이하게 답변했다.
“글쎄요. 베이즈의 80년대 음악을 존경합니다. 저도 곧 이스트 웨이브와 함께하는 리드 싱글이 나와서, 그때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일본 언론 사이에 싸한 침묵이 흘렀다.
베이즈는 비주류 장르가 돼버린 ‘재즈’ 차트에 가끔 얼굴을 비춘 팀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현재진행형 톱스타인 ‘이스트 웨이브’의 신보 리드 싱글에 메인 보컬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스트 웨이브는 지금껏 정규앨범 빌보드 차트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는 최고 인기 래퍼다.
베이즈와 나를 비교해볼 때, 누가 더 세계제패에 가까운지는 자명했다.
‘하지만 누가 더 가까운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 무대에서 진짜 ‘세계적인 음악’이 뭔지 보여줄 거니까.’
나는 싸해진 기자단 분위기를 제대로 만끽하며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 * *
상파울루의 비원더 연습실
배영웅 실장은 처음으로 비원더에게 어떤 음악을 추천해줘야 할지 난감해졌다.
이전에 그는 운전할 때마다 비원더에게 잘 맞는 곡을 추천해서 들려주었다.
원래 연주자를 꿈꿨던 배영웅에게 곡 추천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배영웅은 지금 처음으로 비원더가 자신의 영역을 뛰어넘었음을 직감했다.
매니저 업무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비원더 멤버들의 곡 연습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번 곡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곡이었다.
뭐랄까, 장르를 아예 초월해버린 느낌이었다.
해줄 조언이나 참고할 음악이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배영웅 매니저의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연습에 방해가 될까 봐 배영웅 매니저는 바로 녹음실 바깥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천채왕의 전화였다.
-그래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승산 있을 거 같아요?”
“승산이요? …이건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배영웅 매니저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채왕이 허허 웃더니 대답했다.
-좋네요. 하지만 조심합시다. 베이즈 뒤에 어떤 회사가 있는지 알죠?
“예정 엔터 말씀이시군요.”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악덕 회사 예정 엔터.
그 회사가 베이즈의 끄나풀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미리 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배영웅은 머릿속에서 예정 엔터가 혹시나 저지를 트러블의 가짓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대회 당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노을 아티스트가 해준 말이 있었지….’
* * *
드디어 16강 전 당일.
글로벌 비전 대회의 심사위원인 이스트 웨이브는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심사위원석에서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즈는 이스트 웨이브가 상당히 좋아하는 밴드였다.
가끔 그들의 연주를 샘플링해서 자신의 곡에 쓰기도 했다.
한편, 그의 상대 팀인 비원더는 그가 초반부터 발굴한 팀이었다.
메인보컬 권노을과 함께 작업한 곡을 다음 앨범 타이틀곡으로 내정했을 정도로 밀고 있는 팀이었다.
어느 쪽이든 벌써 둘 중 한 팀이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뭐 이제는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할 때가 왔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자니 관객들의 함성이 서서히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베이즈의 무대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에브리바디! 메이크 섬 노이즈!!! 고!”
기타리스트 카가와의 선창과 함께 강렬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말도 안 되는 테크닉의 속주였다.
그러면서도 편안한 재즈에 가까운 멜로디 라인을 놓치지 않았다.
딱 전형적인 베이즈의 연주였다.
베이즈의 무대가 끝나자마자 비원더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권노을은 태평한 표정으로 무대 위에 올라왔다.
그런데 뭔가 밴드 구성이 이상했다.
‘저 여자는 또 뭐야? 못 보던 사람인데? 그리고 왜 현악기가 저렇게 많지? 원래 비원더는 클래식 악기는 안 쓰는데?’
자꾸 물음표가 생기는 무대 구성이었다.
이윽고, 강렬한 현악기 연주와 함께 비원더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