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60화 (260/280)

제260화

직원의 안내를 따라 들어가 보니 한 흑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네이비 슈트에 베레모까지 써서 멋들어진 느낌이 났다.

흰 턱수염과 머리 사이에, 차가운 회색 눈이 보였다.

“누구…시죠?”

“베리라고 하네.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의 프로듀서야. 본선 진출 축하를 드리고 싶어서 초대했지.”

베리가 슬쩍 곁눈질로 말론을 쳐다봤다.

그는 내가 여태껏 본 중에 가장 단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말론의 공손한 표정만 봐도 이 ‘베리’라는 남자가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짐작이 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음악만 알지, 방송판은 잘 몰라서.”

“아아, 신경 쓰지 말고 앉아요.”

베리는 말투는 친절했지만,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쏘고 있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감촉이 평소와 다른 것이, 딱 봐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구였다.

앉자마자 베리가 말을 이었다.

“정말 멋지더군요. 아시아인 중 이렇게 높게 오른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본선은커녕, 한국 대표는 참가도 허가된 적이 없었다.

진출조차도 영광인 대회라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무대들도 멋졌고. 얼마나 오랜 기간 연습했는지가 느껴지더군요.”

“감사합니다. 최대한 딴짓하지 않고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연습하기가 어렵겠죠. 잘한 거 같군요.”

“연습이 앞으로 어려워요?”

내 질문에 프로듀서 베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는 엄청나게 바빠질 텐데. 연습할 시간이 빠듯할 거요.”

“앞으로 제가 바빠진다고요? 왜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앞으로 1달간 글로벌 비전은 본선 전 휴식기를 가진다.

이후에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2주에 한 번씩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자가용 비행기 일정이라 굳이 말하자면 이동 기간이 줄어서 이전보다 연습 기간이 많아질 거라 예상했었다.

베리의 말은 전혀 내 예상과 반대였다.

베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군. 그럼 내가 말해주겠소.”

‘그럴 리가 없죠 영감님. 누가 말해주겠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글로벌 비전 16강에 가본 적이 없는데.’

베리의 경고는 계속되었다.

“앞으로 엄청나게 바빠질 겁니다. 아마 눈코 뜰 새 없겠죠. 1달간의 휴식 기간에 연습할 시간은 없다고 봐도 좋아요. 팝스타의 삶이란 게 그런 거요. 억지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연습은커녕 유지도 불가능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냥 노래 연습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글로벌 비전에서 당신이 우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오?”

“그야, 팝스타가 되겠죠?”

그게 우리들의 목표였다.

하지만 베리 프로듀서의 말은 차원이 달랐다.

“그 정도가 아니오. 이번 결승은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립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모르는데요.”

“이전에 글로벌 비전을 우승한 팀이 미국 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인즉슨, 만약 한국 대표인 비원더가 우승하면 다음 결승은 대한민국에서 열린다는 뜻이다.

“글로벌 비전 결승을 위해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이는 건 알고 있소? 우승팀이 있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경제 효과가 생기는 거지. 어마어마한 권리요. 당신은 그 정도가 되는 거요. 관료부터 기업인까지, 온갖 사람들이 이권을 위해 당신에게 달라붙기 시작할 거요. 나의 직업은 그런 똥파리들이 글로벌 비전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나를 보지 못했던 것이오. 너무 바쁘니까.”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름 슈퍼스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연예인의 인기 정도였다.

앞으로 우리는 마치 2002년 월드컵 4강 축구 대표팀처럼 전 국민, 아니,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될 예정이다.

‘관심의 무게가 다르다는 뜻이군.’

베리 프로듀서가 마치 불길한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처럼 경고를 마무리했다.

“엔간한 각오로는 휩쓸려 버릴 정도의 유명세요. 중심을 꽉 잡는 게 좋을 거요. 그래야만 유지가 될 테니까.”

* * *

베리의 경고는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호주에서 공연을 마친 우리는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한 달간의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팬부터 언론까지, 수많은 인파가 우리 비원더를 보려 공항에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권노을 님 여기 보고 웃어주세요!”

“오빠 너무 멋있어요~.”

“원재호 님 인터뷰 요청합니다.”

공항 게이트에서부터 자동차까지, 얼핏 봐도 30m가 넘는 거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이마를 짚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어쩌죠 이거?”

나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요. 실장님도 이건 대비 못하셨나 보네요.”

“보통 저희가 언론을 부르려고 하지, 언론에게 제발 오지 말아 달라고는 안 하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사람이 많네요.”

나도 실수를 저질렀다.

오늘 나는 별생각 없이 공항에 가족인 동생을 불렀다.

이대로라면 동생 또한 위험했다.

핸드폰을 꺼내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인파 너무 많다.

-나도 봤음.

-여기 괜히 왔다가 너도 언론에 잡히겠다. 그냥 가라.

-어디를 가?

-일단 공항에는 있지 말고, 다른 데로 좀 가봐. 지하철역 쪽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데리러 갈게.

-ㅇㅋㅇㅋ

“휴.”

일단 한숨 돌렸다.

동생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으니, 이제는 내가 이곳을 나가야 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 방법밖에 없나.’

* * *

환희가 침대에 구르며 말했다.

“이런 곳이 다 있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나는 재호, 환희와 함께, 배영웅 매니저만 동행한 채로 옷을 갈아입고 몰래 공항 내 캡슐 호텔로 들어갔다.

설마 우리가 바로 호텔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우리를 놓쳤다.

‘평소라면 관심도 고마운 일인데, 오늘은 너무 피곤했으니까. 가끔은 이렇게 시선을 피해도 되겠지.’

사실, 지금 비원더 3인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2주에 한 번씩, 세계적인 가수들을 상대로 치열한 경연을 했다.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동남아를 거쳐 호주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면서.

재호는 이미 캡슐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환희 또한 피곤한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가 환희에게 말했다.

“너도 빨리 자라. 내일 새벽 한 4~5시쯤 빨리 나가야 하니까. 혹시나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그래요.”

배영웅 실장은 회사와 통화 중이었다.

“네네. 공식적인 일정은 내일부터, ‘회사를 통해서’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원래 팬들 및 기자들과 인사를 해야 하지만 지금 너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요.”

배영웅 매니저는 오늘 사태의 뒷수습을 대신 하는 중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상황을 골똘히 생각했다.

여태까지 우리는 미디어에 관심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입장이었다.

설사 한국에서 음악방송 1위를 달성했어도, 앨범판매량 1위가 되었어도, 심지어 글로벌 비전 콘테스트 한국 대표로 선택되었을 때도 이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미디어의 관심은 아예 우리 회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도 벌써 노트북으로 확인해 보니, 우리가 공항에서 기자들과 팬들에게 인사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을 가지고 어마무시하게 많은 비판 기사가 쏟아졌다.

[비원더 공항에서 실종. 팬들 기만?]

[비원더 소속사, ‘가수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잠시 휴직 중, 양해 부탁’]

[비원더, 이 컨디션으로 16강 괜찮은가?]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미디어와 팬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가수를 시작했는데, 정작 이제는 그 힘이 너무 커져서 관심에서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단 오늘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은 듯이 쓰러져 자는 재호를 보니, 오늘만은 비원더 멤버들에게 휴식을 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우리를 만나고픈 사람과 만나야 했다.

우리 팀의 PR 담당 작가인 메리가 작성해 준 인터뷰 가이드를 읽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배영웅 매니저가 캡슐 호텔의 문을 두드렸다.

“네?”

배영웅 매니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희 내일, 대통령 인터뷰 잡혔어요.”

“네?”

* * *

다음 날, 우리는 새벽같이 소속사에 출근해서 꽃단장한 후 바로 청와대로 출근했다.

아무리 휴식이 중요하다 해도 대통령의 콜은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한 차를 타고 우리는 조심스레 청와대에 도착했다.

혹시나 우리의 동선이 읽힐까 봐 평소에 쓰는 볼보가 아닌 다른 카니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뒷좌석에 앉은 재호는 하염없이 창문으로 청와대 주변을 감상했다.

낯빛이 많이 좋아진 것이, 어제 푹 잔 덕을 본 모양이었다.

환희가 배영웅 실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저희에게 무슨 일이실까요?”

“글쎄요 요새 비원더가 외교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판이니… 모르겠네요.”

내가 되물었다.

“외교 문제요?”

배영웅 매니저가 내게 신문 하나를 던져주었다.

“3면 아래 기사 읽어보세요.”

제목 : 일본 언론 비원더, 베이즈와 달리 정부 도움받아…. 비겁해.

본문 : 일본 아사히 TV가 비원더는 베이즈와 같은 진짜배기 음악이 아닌 가짜라며 맹비난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여러 특혜를 주면서까지 비원더를 돕고 있다는 음모설을 제기했다.

비원더 소속사 TYB는 정부와 함께 일했던 적이 없다며 황당한 반응이라는 반응을 남겼다.

내가 소리 내서 읽은 기사를 다 듣고 나서 환희가 황당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아니! 자기들이야말로 베이즈 뮤직비디오를 정부 권한으로 아무 곳에서나 찍게 해줘 놓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다 직접 섭외해서 찍었는데. 자기들이 오히려 대놓고 정부 도움을 받아 놓고.”

재호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뭐,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니까.”

나도 재호의 말에 동의했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의 대결 구도는 앞으로 점점 심해질 운명이었다.

바로 다음 라운드인 16강 전에서 우리가 맞붙을 상대가 다름 아닌 일본 대표인 베이즈였으니까.

‘한일전이라니… 절대 지면 안 되지.’

그 일 때문에 대통령이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솔직히 대통령님 입장에서야 뭐 우리랑 사진 찍으면 지지율에 도움이 되니까 부르신 거 아닐까요?”

* * *

대통령 박이도.

30년 넘게 국회의원을 하다 80이 다 돼서야 대통령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백발 머리를 올백으로 넘겼지만 탄탄한 근육질 몸에 안경도 쓰지 않아 제법 젊어 보였다.

큰 눈망울 또한 소년처럼 보였다.

“반갑습니다.”

나는 박이도와 악수했다.

내 손을 쥔 대통령의 손힘이 제법 강인했다.

대통령이 소파에 앉으며 손짓했다.

“자자 여러분들도 앉으시죠.”

미팅은 사실 별 내용이 없었다.

‘무대 잘 봤다’라거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너무 자랑스럽다’ 등등, 대통령 축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 내용 없는 대화들이 이어졌다.

박이도 대통령이 조금 재미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은 미팅이 시작되고 20분쯤 후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일본 언론이 비원더가 한국 정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말하던데요.”

재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하하. 말도 안 되는 말….”

대통령이 넌지시 말을 이어갔다.

“그거, 한 번 현실로 만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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