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54화 (254/280)

제254화

율리아 옆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프로 머리를 한 흑인 여배우가 서 있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헐리웃 배우, ‘프레셔스 존스’였다.

최근에 멜로부터 뮤지컬, 심지어 액션 영화까지 온갖 배역을 맡으면서 한창 떠오르는 배우였다.

멋들어진 와인색 드레스 차림이라 그런지, 평소에 영화에서 봤던 모습보다도 더 고혹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내게 인사하면서도 한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하우스 밴드의 베이시스트, 소닉 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소닉 독이 서둘러 바깥에 나가려 했다.

내가 소닉 독에 질문했다.

“어디 가요?”

소닉 독이 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아, 저, 그, 볼 일이 생겨서. 숙소 가봐야겠어.”

“크루즈에서 갑자기 볼일이 생겨요?”

“그런 게 있어서요. 갈게요!”

소닉 독은 억지로 문을 열더니만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

고개를 돌려 프레셔스 존스를 확인해보니, 뛰쳐나가는 소닉 독의 꽁무니에 시선을 고정 중이었다.

‘뭘까?’

프레셔스가 내게 다가와서는 불쑥 인사를 건넸다.

“율리아에게 말 많이 들었어요. 오늘 제임스 브라운 무대 정말 멋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오늘 무대는 워낙 전설적인 가수의 커버 무대라,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연주자분들에게 의지했습니다.”

프레셔스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연주자라면….”

“다들 고생하셨지만, 특히 드럼과 베이스가 고생하셨죠. 미스터 팍! 저분이 한국의 드럼 레전드시거든요. 선배! 고맙습니다!”

흥겹게 술을 마시고 심지어 가볍게 춤까지 추면서 파티를 즐기던 박찬용 드러머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며 화답했다.

프레셔스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내게 말했다.

“베이시스트는요?”

“아. 소닉 독 씨요. 굉장하죠. 제가 직접 뉴욕 씬에서 발굴한 분인데. 정말 개성 넘치는 연주를 해주세요. 저희에게는 보석 같은 분입니다.”

“네에 그래요…. 비원더 분들. 밴드 멤버까지 모두 다. 내일 제 파티에 초청하고 싶은데요. 어떠세요?”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우승 후보였던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이겼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3라운드에 진출했을 뿐이었다.

아직, 넉넉잡고 5번의 라운드가 더 있었다.

아직 오디션의 초반부 반환점도 돌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리고 당장 마주칠 3라운드 상대도 상당한 강팀이었다.

한창 지금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아일랜드의 팀 ‘저스트 클릭’이었다.

천재적인 흑인 알앤비 보컬리스트 ‘스티븐’과 혜성처럼 등장해 빌보드를 서서히 정복하고 있는 전자음악 프로듀서 ‘프레드릭’으로 이루어진 듀오였다.

특히 그중 프레드릭은 내 기억에 2020년까지 자신의 곡을 발표하는 족족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안착시키는 유명 프로듀서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미 전성기를 누린 바로네스 메이어스보다도 더 골치 아픈 상대였다.

바로 지금부터가 ‘저스트 클릭’의 전성기였으니까.

적어도 여유 있게 파티나 하면서 놀아도 될 정도로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저희 다음 라운드 준비를 해야 해서요.”

프레셔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게 문제였어요? 그러면 문제없겠네요.”

“왜요?”

“저랑 율리아가 내일 주최하는 파티의 디제잉을 ‘저스트 클릭’이 맡거든요. 두 팀 다 쉬면 괜찮잖아요? 일종의 휴전 상태인 거죠.”

‘바로 이번 주에 대결인데, 상대 팀은 한가하게 파티 디제잉을 한다고?’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

사실 우리 비원더는 지금 월드 스타 바로네스 메이어스까지 잡으며 한창 주가를 올리는 중이었다.

미디어 데이에서 미국 대표 루비아이, 일본 대표 베이즈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은 팀이었을 정도였다.

그런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는 상대가 있다고 하니 한번 그들의 면상이나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럼, 이왕 초대해주셨으니 저만 한번 가보겠습니다.”

어차피 아직 재호와 환희가 곡 작업을 하는 기간이라, 나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한번 적을 정탐해보기로 했다.

* * *

다음날 비원더 밴드 합주실.

연습에 앞서 멤버들에게 오늘 저녁 내 일정을 공유했다.

그리고 상대 팀인 저스트 클릭이 클럽에서 디제잉을 한다는 사실도 말했다.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환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 너무 얕보이는 거 같네요. 꼭 본때를 보여주죠!”

딱 두 명만 다른 반응이었다.

우선 소닉 독은 넋이 빠져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에 반해 박찬용 드러머는 꼭 저스트 클릭의 선택을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1프로듀서 1가수 체제라면 프로듀서는 이미 곡을 몇백 개 준비해뒀을 걸세. 연습도 완벽하게 되어있을 테고. 그중에 미션에 잘 맞는 곡을 적당히 선곡하기만 하면 정작 대회 기간에는 두 사람은 여유가 있을 수도 있네. 밴드 음악하고는 다르지. 차라리 파티에서 디제잉 등을 하며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

하긴, 저스트 클릭 또한 이미 함께한 지 5년이 넘어가는 팀이었다.

한 팀이 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는 비원더와는 차이가 컸다.

박찬용 드러머가 드럼을 세팅하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의외로 방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세.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말고 우리의 음악을 해야겠지. 하여튼 오늘 가서 상대방의 무대를 잘 보고 의견을 주게.”

“알겠습니다.”

사실, 박찬용 드러머 말대로 당장 우리나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미션이 또 걸작이었기 때문.

이번 미션은 ‘사운드트랙’ 미션이었다.

그리고 사운드트랙이 되어야 할 영상은 일반 영화음악이 아니라… 스폰서사인 민티의 광고였다.

환희가 혀를 내둘렀다.

“영화도 아니고 광고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오라니. 이런 미션 진짜 처음 봤어요. 너무 자본주의적인 거 아니에요?”

내가 툴툴대는 환희에 어깨를 마사지하며 위로했다.

“뭐 하루 이틀이냐.”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영상, 당연하지만 광고 음악답게 너무 유치했다.

사실상 장르도, 리듬도, 분위기도 모두 정해져 있었다.

유쾌하고 밝은 전자음악, 팝 펑크록, 혹은 팝 음악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상이었다.

메인 프로듀서 역할인 재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재호가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일 터였다.

재호가 입을 열었다.

“뭐 할 게 없는데요? 다들 똑같은 음악을 만들 거 같은데. 심지어 우리하고 잘 맞지도 않는 음악 장르가 강제된 상황이에요.”

이번만은 밴드 마스터부터 박찬용, 소닉 독, 심지어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미도리까지 잔뼈가 굵은 뮤지션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이런 과제는 그들의 음악 인생에서도 처음일 테니 말이다.

내가 슬쩍 그들에게 전략을 하나 제안했다.

“제가 사실 생각이 하나 있는데요…. 한번 잘 들어봐 주세요.”

* * *

그날 밤, 나는 예정대로 율리아와 프레셔스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크루즈를 나와 세부의 한 바에 향했다.

내일 새벽 일찍, 크루즈는 3라운드를 치를 장소인 호주 시드니로 향할 예정이었다.

오늘 밤이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셈이었다.

나는 배영웅 매니저와 함께 걸어가면서 조금 전 소닉 독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소닉 독에 한 질문은 간단했다.

‘프레셔스랑 아는 사이에요?’

그냥 예스, 아니면 노라고 대답하면 되는 쉬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소닉 독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런 게 있어요. 신경 쓸 거 없잖아요? 사생활이라고요.]

‘같이 일하면서 그렇게 방어적인 태도는 처음이었어.’

아무래도 둘 사이는 특별한 듯했다.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둘이 어떤 관계이든 간에 소닉 독의 말처럼 사생활일 따름이고 내가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는 바에 도착했다.

파티장에 갈 때마다 늘 그렇듯, 험상궂은 얼굴의 경호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130kg은 되는 거 같은 몸이 탄탄한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VIP 초대 손님 목록에 들어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VIP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 보니 VIP 라운지는 조용했다.

아래의 메인 스테이지는 그 대신 아주 난리가 났다.

저스트 클릭의 무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티븐은 윗옷을 벗은 채로 근육을 과시하며 정열적으로 무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프레셔스와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아고고.”

뭔가 눈길을 피해야만 할 것 같은 짙은 수위의 키스였다.

키스하는 도중에도 프레드릭은 능숙하게 BPM을 맞춰서 다음 레코드를 걸었다.

저스트 클릭의 음악은 상당히 좋았다.

유명한 곡 구성을 따오는 것 같아도 의외로 비트는 전개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저 음악을 상대하기가 두렵다기보다 ‘저 정도로 잘하는 사람이 왜 저렇게 적당히 무대를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 같으면 무대 음악 진행 중에 키스하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는 심지어 일하는 20대 기간에는 연애에도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프레드릭은 심지어 다음 곡 LP를 재생한 후에는 데킬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내 기준에는 너무 엉터리로 하는 무대였다.

‘저 정도라면 충분히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무대가 끝나고, 프레드릭이 성큼성큼 VIP 라운지로 걸어 올라왔다.

이제야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금발의 바가지 머리, 찢어진 청바지, 핫핑크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특히 껑충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프레셔스의 허리에 손을 휘감은 채로 나에게 걸어왔다.

180이 넘는 나보다 훨씬 큰 것이, 최소 190cm는 되어 보였다.

그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오! 노엘. 왔나요? 내 프레셔스(My precious)가 초대했다면서요?”

프레드릭이 장난스럽게 프레셔스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민망한 광경이었다.

고민 끝에 허공을 응시한 채로 대답했다.

“어, 뭐 그렇죠. 직접 뵈는 건 처음이네요. 노엘입니다. 반갑습니다.”

“멋지죠? 이게 진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곳이에요. 골방 녹음실이 아니라! 이곳이 진짜 관객들이 우리 음악을 어떻게 느끼는 것인지, 그 결과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요. 백날 혼자 연습해봤자 관객과의 호흡을 비교할 수는 없죠.”

그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기관총처럼 빠르게 열변을 토했다.

말을 듣다 보니 프레드릭의 강점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클럽 공연은 그에게는 일종의 ‘실험실’이었다.

클럽에서 공연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어떻게 즐기는지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관객들 반응이 좋지 않은 부분은 빼고 관객이 열광하는 부분은 부풀리고 늘렸다.

그러다 보니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프로듀서가 탄생한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댄스 음악 작곡가라면 해볼 만한 일이긴 하네.’

비로소 프레드릭이 이해가 되었다.

나 같은 발라더, 알앤비 가수와는 사뭇 다른 접근법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의 동료 스티븐은 보이지 않았다.

“스티븐 씨는?”

“아, 노는 중이죠.”

무대 아래를 보니, 스티븐은 여자들에 둘러싸여 신나게 떠드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닌 거 같다.’

팝가수와 아이돌 가수의 문화 차이가 아무리 있다고 해도, 저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저러니까 글로벌 비전 우승까지 했으면서 금방 커리어가 폭망했지. 어? 잠깐. 어???’

방금, 나는 무시무시한 기억을 소환해버렸다.

내 기억 속에서, 이번 글로벌 비전의 우승자는 ‘저스트 클릭’이었다.

‘지금 나, 우승 후보랑 붙은 거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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