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드디어 2라운드 날이 밝았다.
슬슬 추워지는 가을이었지만, 2라운드를 치르는 필리핀 세부의 공기는 따스했다.
세팅을 끝내고 무대로 가는 길에 바로네스 메이어스와 마주쳤다.
그녀는 가볍게 우리에게 목례했다.
딱 봐도, 며칠 전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여유 있게 바로네스 메이어스에게 인사했다.
“어제 기사 봤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무슨 축하할 것까지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입꼬리는 귀밑에 걸려 있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환한 웃음이었다.
‘역시나 여지까지는 이혼 소송 관련 스트레스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모양이군.’
지금의 그녀가 진짜 본인의 모습일 터였다.
“멋진 무대, 기대하겠습니다.”
나 또한 그녀에게 미소를 띠며 덕담을 건넸다.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재호가 내게 말했다.
“어제 기사 봤지?”
“그래.”
“전남편이 그런 범죄자인 줄 누가 알았겠어. 덕분에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스태프들이 다 돌아왔다네?”
사실 내가 주도한 일이지만, 나는 굳이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딱 봐도 그래 보이더라.”
과연, 며칠 전에 오합지졸 같던 매니저들이 싹 다 프로 느낌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이제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음악 외적인 부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천채왕 프로듀서와 배영웅 매니저도 그 부분을 걱정했다.
왜 나서서 적인 바로네스 메이어스에게 좋은 일을 해주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이 일은 단순히 옳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준 덕분에, 오늘 대결은 나의 승리로 끝날 터였다.
* * *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무대를 할 차례였다.
무대 앞에 선 우리는 제임스 브라운의 느낌이 나는 옷차림을 입었다.
반짝이는 붉은색 슈트를 입은 환희부터 호피 무니 셔츠를 입은 나, 그리고 가죽 롱코트를 입은 재호까지 모두 레트로 느낌을 진하게 풍기는 제임스 브라운 패션을 차용했다.
무대에 서보니 1라운드에 비해 한층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아마도 상대가 팝스타 중의 팝스타 바로네스 메이어스라 그렇겠지.
1라운드의 제롬도 대단한 스타였지만, 결국 아프리카의 로컬 스타였다.
그에 반해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빌보드 줄 세우기를 했던,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디바였다.
당연히 전 세계인의 관심도가 달랐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 대결은 라이브 방송 시간대도 가장 많은 관심을 얻을 수 있는 미국 시간대로 편성했다.
말론이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관중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그는 분위기가 달아오른 걸 확인한 뒤에야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비원더는 이번에! 제임스 브라운을 골랐던데. 맞나 브로(Bro)?”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크으~. 뭘 좀 아네. 그래도 동양인이 흑인의 음악을 부르는 거니까 뭔가 보여주긴 해야 할 거야. 알지? 하하!”
말론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워낙 유명한 가수를 선택한 만큼, 그에 걸맞은 좋은 무대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윽고, 무대 불이 꺼지고, 무대가 시작됐다.
우리 팀의 기타리스트 미도리가 강렬한 사운드를 건 기타 리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브라운을 상징하는 노래, ‘I feel good’의 리프였다.
이번 무대에서는 제임스 브라운의 유명 곡을 그대로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한 곡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3곡을 합쳤다.
그리고 조금씩 멜로디를 재호가 변형해서 한 곡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제임스 브라운 랩소디’라고 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
첫 곡에서는 환희가 랩에 가까운 화려한 리듬감을 보여주었다.
환희는 자신에게 맞는 선곡을 만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만의 리듬감과 그루브를 보여줬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다운 화려한 안무는 덤이었다.
강렬한 환희의 무대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다음 차례는 재호였다.
박찬용의 드럼과 소닉 독의 베이스가 자연스럽게 연주 리듬을 바꾸어 잔잔한 발라드, ‘Please Please Please’로 연결했다.
나와 환희는 코러스를 담당했고 재호가 메인 보컬로 나서서 발라드를 불렀다.
재호의 장기인 달콤한 중저음이 돋보이는 선곡이었다.
평소에는 코러스를 담당하던 재호가 메인 보컬을 담당하고 나와 환희가 화음을 담당해 색다른 맛을 냈다.
원곡에서는 제임스 브라운이 강력한 샤우팅 고음으로 곡을 마무리했다.
이 부분을 환희는 자신의 특기인 안정적인 가성으로 처리했다.
원곡과 전혀 다른 부드럽고 로맨틱한 느낌이 나는 결말부였다.
그사이 소닉 독의 화려한 베이스 연주와 함께 곡의 리듬이 다시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느린 리듬에 간신히 적응하던 관객들은 강렬한 리듬에 다시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 노래는 제임스 브라운의 최고의 히트곡, ‘Papa's Got A Brand New Bag’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경쾌한 리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루브부터 감정 표현까지, 내 특기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흥겨운 노래였다.
환희가 리듬에 방점을 찍었다면 나는 리듬을 보여주면서도 가창력에 집중했다.
어느새 곡이 끝날 듯하다가 다시금 드럼과 베이스가 몰아치면서 처음에 시작했던 곡인 ‘I Got You’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전형적인 비원더의 편곡으로 다시 불렀다.
내가 메인 멜로디를 불렀고 재호와 환희가 코러스를 담당했다.
드디어 비원더의 전형적인 구성이 나왔다.
제임스 브라운의 가장 유명한 곡을, 익숙한 구성으로 부르자 관객들이 뜨겁게 환호했다.
여지까지의 변칙은 결국 이 정석을 보여주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뜨거워진 관객들의 열기를 느끼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 * *
무대가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재호가 걱정스레 내게 물었다.
“나름 우리는 무대에 만족하긴 하는데. 이 정도로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이길 수 있을까?”
“글쎄?”
우리 다음 순서로 등장한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그야말로 멋진 무대를 보여줬다.
아니, 그보다는 무대를 부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자신의 4살 난 딸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다.
1라운드에서의 힘을 꽉 준 무대와는 달리 편안하고 밝은 무대였다.
[넌 나의 구원
언제까지나 너는 나의 원
항상 함께해]
모니터를 통해 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졌다.
아마 라이브로 이 무대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더더욱 직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 증거로,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심사위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정말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무대였다.
무대를 지켜보던 환희가 지그시 말했다.
“이거… 너무 좋은 무대예요. 하지만, 하지만… 좀….”
내가 방긋 웃었다.
‘바로 그거야.’
아무 대답도 필요 없었다.
나도 환희와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점수 발표를 위해 무대로 올라갔다.
재호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내가 슬쩍 물어봤다.
‘왜 그래?’
‘너무 압도적인 무대였어. 완성도가 높아도 너무 높아. 녹음본보다 훨씬 좋았어.’
나도 파하하 웃으면서 동의했다.
‘그냥 방금 라이브 공연을 그대로 녹음만 해도 길이길이 듣고 싶은 퀄리티였지.’
‘내 말이. 저걸 어떻게 이기냐?’
‘이길 만할걸?’
재호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뭐?’
무대 위에 올라간 우리를 지켜보는 이스트 웨이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눈빛으로 내게 ‘미안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원더보다 바로네스 메이어스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준 모양이었다.
눈빛으로 보니 바네사나 미스터 로메로도 마찬가지였다.
재호가 입을 꽉 깨물고 내게 눈짓했다.
‘거봐 안 되잖아!’라고 눈으로 내게 말했다.
말론 또한 우리의 패배를 직감했는지 눈동자가 떨렸다.
“자 좋아. 심사위원 점수를 공개할게!”
역시나 우리가 20점 정도 밀렸다.
300점 만점이니 제법 큰 차이였다.
‘하지만 말이야, 전체는 500점 만점이야.’
200점의 ‘관객 점수’가 남아 있었다.
말론 웨이가 제작진에게서 봉투를 받았다.
“지금 최종 결과를 전달받았는데 말이야.”
그가 뜸을 들이는 동안, 나는 내 작전을 되새겼다.
나는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사생활 속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얼핏 보면 이는 그녀를 돕는 행위였으니, 내게는 불리해 보였다.
물론 옳은 일이어서 했던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비원더의 대회 성적에도 피해를 안 끼칠 것을 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원래 글로벌 비전 같은 오디션에 나올 이유가 없는 가수였다.
그런 그녀가 이 대회에 나온 이유는 전남편과의 이혼 소송으로 매니지먼트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에게는 이제 글로벌 비전 오디션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네스 또한 무의식적으로 이를 느낀 게 분명했다.
내가 재호에게 슬쩍 말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 무대, 좋았지?’
‘끝내줬지.’
‘근데 말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아? 오디션인데 그 흔한 고음 하나 없었어. 매일 듣기 좋은 맨밥 같은 노래야. 완성도는 높지만, 오디션에서 호응받기는 어렵지 않아?’
재호가 손을 턱에 갖다 대며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그 순간 말론 웨이가 결과를 발표했다.
“승자는! 관객 점수 합한 점수로 비! 원! 더!”
“와!”
재호가 저도 모르게 양손에 주먹을 쥐고 치켜들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도 관객들이 비원더에 몰표를 준 이유를 알고 있을 터였다.
관객들은 바로네스의 우승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빌보드 스타였으니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최대한 빠른 신곡 발매와 공연이었다.
그녀의 팬들조차 그녀에게 투표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큰 차이로 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패배를 안겨 드려 죄송하네요.”
“미안할 필요 없어요.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니까. 당신에게도 알려줄게요. 승리한다고 행복을 얻는 건 아니에요. 우승이 곧 성공은 아니라는 거예요.”
“우승이… 성공은 아니다.”
솔직히 글로벌 비전 우승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내게 손 인사를 흔들며 말했다.
“심지어 저는 빌보드 1위를 해봤잖아요!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요. 이혼하면 열받고, 아이 보면 행복하고.”
“…….”
당연한 말인데, 내가 목표로 하는 존재인 빌보드 스타에게 들으니 묘한 느낌이었다.
“잘 생각해봐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내게 생각보다 묵직한 숙제를 안겨주고 대회를 떠났다.
* * *
2라운드 통과 후 조촐하게 밴드 멤버들과 함께 세부섬에서 파티를 즐겼다.
하지만 나는 왠지 집중되지 않아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며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해요?”
조민하 선배가 내게 물었다.
“선배. 선배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 질문이 엉뚱했는지, 조민하 선배가 피식 웃었다.
“뭐 이렇게 무대 끝내고 술 한잔하는 게 즐거운 거죠. 뭐 별거 있어요?”
“그럴까요….”
사실, 지금 나는 충분히 기분 좋은 상태였다.
내 가수 인생은 내 계획대로 탄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솔직히, 이대로 탈락하더라도 이제는 미국 시장에 진출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자신이 있었다.
우울감은 없다.
그러니 그냥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이야기는 무시하고 앞으로 나가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내 목표가 어디까지인지는 한 번 고민할 필요가….’
“노엘!”
골똘히 생각에 빠진 내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어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깜짝 놀랄 사람이 서 있었다.
내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준 할리우드 배우 율리아 뵘이었다.
“율리아? 여기까지 왜 왔어요? 무슨 일이에요?”
율리아가 까르륵 웃었다.
“세부에 촬영 있어서 머무르고 있었어요. 스케줄이 다 끝난 차에, 노엘 공연이 있다 해서 놀러 왔죠. 자, 여긴 제 친구들이에요.”
딱 봐도 배우 혹은 모델인 거 같은 여성들이 줄줄이 걸어왔다.
“헉!”
그런데 그녀들을 보고 밴드 멤버 중 한 명이 헉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소닉 독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