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바로네스 메이어스랑 이혼 소송 중인 남편 말이야.
“네. 토미 콜롬보라는 이름이던가요?”
-그 사람. 어마무시한 바람둥이라던데. 그게 이혼 사유라는 모양이야.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알고 보니까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모든 계약을 쥐고 있던 매니저더라고. 커리어 초기에 연인하고 완전 불공정한 계약을 한 거지.
“그래서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이혼 후에 기획사도 없이 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거군요? 매니저가 훼방을 놓는 셈이니. 그리고 그런 이유로 본인 커리어가 막다른 골목이니까 할 수 없이 월드 스타가 매니징하고 큰 상환 없는 오디션에 참여한 거고.”
빌보드를 호령하던 탑스타가 왜 굳이 다시 오디션에 참여했는지 이제야 납득이 갔다.
-그래. 참 황당하지! 그런 대 스타가 조심성 없이 모든 계약을 남편한테 맡기다니. 지금 전남편은 또 다른 젊은 여가수를 어디 콜롬비아인가에서 발굴해서 월드 스타로 키우려고 하고 있다네? 바로네스는 졸지에 기획사도 없는 신세가 됐고 말야.
“그래도 다른 곳에 갈 수 있지 않나요? 아무에게도 제안이 오지 않는다는 건 좀….”
-그게 좀 수상해. 뭔가 냄새가 나. 좀 더 알아보고 알려줄게.
나는 천채왕에게 감사를 표현한 후 통화를 끊었다.
이전 생에서 나는 왜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이혼했는지 몰랐다.
끝까지 이유가 대중에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귀자도 비공개 정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전남편, 토미 콜롬보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지식을 활용해서 토미 콜롬보의 비밀을 미리 파헤쳐 보기로 했다.
이를 통해서 나는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돕는 일은 그녀는 물론, 나를 돕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계획은 일단 다 세운 것 같군.’
이제는 실행만 남았다.
* * *
비원더의 하우스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은 흑인 베이시스트 소닉 독.
그는 요즘 꿈결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있던 뉴욕 재즈씬을 박차고는 과감하게 동양의 가수인 비원더의 밴드에 들어갔다.
인생을 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잭팟이 터졌다.
비원더는 훌륭한 성적으로 글로벌 비전 본선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소닉 독 또한 미국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일했을 때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루브가 강조된 비원더 특유의 음악에서는 소닉 독의 역할이 매우 컸다.
게다가 그는 밴드의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덕분에 미국 언론과 두어 번 인터뷰도 했다.
그렇게 즐겁게 지낸 것도 잠시, 갑자기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내려왔다.
2라운드밖에 되지 않았는데,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상대로 만났다는 것이다.
빌보드를 최근 융단폭격했던 절대지존 여가수 바로네스 메이어스라니, 전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신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
좌절하던 그에게 노엘이 더욱 황당한 요청을 했다.
“제임스 브라운을 레퍼런스로 이 곡 편곡 좀 해주세요.”
“왔(What)? 제임스 브라운? 제정신이야?”
소닉 독은 당황했다.
제임스 브라운은 흑인의 자부심과 같은 존재였다.
비유하자면 흑인의 비틀스랄까?
함부로 외국인이 재해석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존재다.
“좋잖아요. 그루브를 보여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소울이 있고, 알앤비의 아버지고, 딱 저희랑도 어울리는 음악이죠. 거기다 최근에 작고하시기도 했고요. 많이 고민해서 잡은 컨셉이에요. 버들이 곡은 거의 완성했어요. 소닉 독의 편곡이 필요합니다.”
“제임스 브라운은 흑인 음악의 지존 중의 지존이야. 그렇게 쉽게 제임스 브라운의 느낌을 낼 수는 없어. 제아무리 노엘 너라도.”
“편곡에서 소닉 독의 특기를 살려줘요. 재지하게. 그것도 굉장히 난해한 프리 재즈 느낌으로. 그러면서도 제임스 브라운 특유의 춤도 출 수 있을 정도로 신나게.”
“그게 되겠어?”
권노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소닉 독이라면 가능하니까 부탁하죠! 최대한 소닉 독답게 부탁드려요. 자 여기, 이 루프예요. 재호가 만든 겁니다. 여기에 베이스라인을 잡아주세요.”
“으음….”
소닉 독은 떨떠름하게 동의했다.
일단 한배에 탔으니 보조는 맞춰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뿐, 권노을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합주실.
소닉 독은 정말 자기 멋대로 아방가르드한 베이스라인을 만들어 왔다.
자기가 봐도 엔간한 프리 재즈보다 더 화려하고 복잡한 베이스라인이었다.
화성이 너무 복잡해서 자기도 연주하면서 숨이 찼다.
그는 일부러 과하게 전위적인 음악을 들고 왔다.
‘이 정도로 어렵게 만들면 거절하겠지!’
‘다른 곡을 써 오든지, 나를 편곡자로 만들지 말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그런데 자신을 연주를 듣고 나서 비원더 멤버들은 소닉 독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권노을이 태평하게 곡을 다 듣더니만 엄지를 척 내밀었다.
“좋은데요! 박찬용 선배님, 당연히 제임스 브라운 느낌을 내려면 드럼머신으로 찍기보다는 선배님께 드럼 연주를 부탁드려야겠죠?”
박찬용이 허허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내가 쳐야지. 미디의 ‘미’ 자도 꺼내지 말게. 자! 당장 한 번 쳐보지.”
박찬용은 재즈용 브러쉬 솔과 스틱을 가지고 녹음실로 들어갔다.
소닉 독은 한국 연주자들의 이런 점들이 참 놀라웠다.
소닉 독 자신은 모든 곡을 자기 특유의 재즈 스타일로 일관되게 연주했다.
다른 멤버들은 매주 장르와 시대, 스타일이 바뀌는 비원더의 곡에 맞춰 매번 새로운 스타일로 연주했다.
‘드러머인 팍만 해도 그래. 70살 노인이 어떻게 저렇게 다양하게 연주하지? 분명 기본 베이스는 로큰롤인데. 더 루츠같은 힙합 리듬을 기가 막히게 치지 않나. 살사나 보사노바도 소화하질 않나. 이제는 프리 재즈를 하겠다고?’
박찬용이 스틱을 짚고는, 능숙하게 드럼을 연주했다.
소닉 독의 전위적인 연주에 지지 않고 묵묵히 받쳐주는 듬직한 연주였다.
게다가 음악이 점점 고조되어 절정에 이르러서는, 되려 소닉 독 연주보다도 박찬용의 드럼이 더 복잡하다 느껴질 정도로 연주가 화려하게 바뀌었다.
‘아니 저런 화려한 재즈 비트를 칠 수 있었는데 여태껏 숨겼던 거야? 설마 저 어르신, 메탈 드럼도 칠 수 있는 거 아냐?’
이번에는 원재호의 요청으로 조민하가 소닉 독과 박찬용의 연주에 화려한 코러스를 얹었다.
소닉 독이 일부러 과하게 만든 화려한 화성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춘 정교한 코러스 라인이었다.
녹음작업을 보면서 소닉 독이 혀를 내둘렀다.
팔색조 같은 다양한 장르 흡수력에다가 2주일 만에 이 모든 곡 작업과 무대 준비를 끝내는 속도까지.
비원더에서 소닉 독은 그야말로 빠르게 한국식 음악의 강점을 흡수하고 있었다.
‘질 수 없지. 나도 보여주겠어!’
소닉 독이 추가로 더욱 화려한 베이스 솔로 라인을 추가했다.
소닉 독 또한 한국의 음악에 지지 않는, 자기만의 강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점점 비원더만의 강점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음악이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 * *
저녁을 먹은 후 권노을은 배영웅과 함께 크루즈의 파티룸으로 향했다.
입장을 위해서는 옷차림도 중요하다고 해서 일부러 연미복을 맞췄다.
크루즈 파티룸은 여태껏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내가 배영웅에게 말했다.
“1라운드 진행 전까지는 저희는 저런 곳에는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는데 말이죠.”
“하하! 마리 이사님이 사과하시더라고요. 자기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며.”
“다 론이 했다는 건가요?”
“일단 그분 주장은 그렇습니다.”
사실, 파티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드림 크루즈 배 내에는 분명 참가자 외에는 스태프만 있어야 했다.
그런데 생방이 끝나는 날마다 외부인들이 어딘가에서 크루즈로 들어와 광란의 파티를 즐겼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설사 파티에 갈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거리를 두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파티에 가서 알아보고 싶은 내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파티룸에 들어가자마자 건장한 경호원들이 나를 둘러쌌다.
“검문 있겠습니다.”
배영웅 매니저가 미리 주최 측에게 받아놓은 초대장을 보여줬다.
경호원이 세심하게 서명된 초대장을 확인하더니만, 나를 VIP 라운지에 데려다줬다.
‘특수 초대장이 없으면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나 보군.’
대부분 가수들은 그라운드 플로어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VIP 라운지는 2층 발코니에 자리했다.
라운지로 들어가니 가운데에서 마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국식 실크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내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왔군요 노엘! 지난주에는 파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요. 론 오빠가….”
“됐습니다. 파티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마리가 넌지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오늘 온 건 뭐죠? 전 세계에서 슈퍼 모델들이 당신하고 한번 말이라도 섞어 보고 싶어서 대기 중인데, 그녀들 만나보고 싶어요?”
“관심 없습니다.”
환희가 어떤 곤욕을 치렀는지, 나는 똑똑히 봤다.
딱 봐도 VIP 라운지에는 외부인이 거의 없어 보였지만 1층은 아니었다.
딱 봐도 일반인으로 위장한 기자들이 양을 노리는 늑대처럼 기삿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마리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럼 왜죠?”
“저에게 소개해주셨으면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요.”
“누구죠?”
“토미 콜롬보요.”
“토미 콜롬보….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전남편 말인가요?”
나는 선선히 인정했다.
“맞습니다.”
마리가 큭큭 웃었다.
“당신, 제법 비열하군요?”
“왜요?”
“경쟁자와 이혼 소송 중인 상대를 만나려 하다니, 뻔하잖아요?”
마리의 짐작과 내 실제 생각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말을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리가 말을 이어갔다.
“좋아요! 소개해주죠. 그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는 법이죠.”
토미 콜롬보는 팝가수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큰 매니저였다.
예를 들면 전 아내인 바로네스 메이어스처럼 말이다.
그가 글로벌 비전처럼 온 세계의 유망한 가수가 모이는 큰 행사를 놓칠 턱이 없었다.
마리가 손으로 1층을 가리켰다.
“자, 저기 바 테이블에 죽치고 앉아있는 저 중년 백인이 토미예요. 소개는 안 해도 되죠? 제가 좀… 저 사람하고 불편한 관계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행운을 빌어요.”
바로 나는 바 테이블로 성큼 가서 자연스럽게 토미 콜롬보의 옆자리에 앉았다.
토미가 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실례, 거기는 자리가 있는데.”
“누구 자리인가요?”
“내가 새로 레이디를 초대하면 그 사람이 앉아야지. 아무튼 당신은 아냐.”
말하면서도 콜롬보는 노골적으로 어느 곳인가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글로벌 비전 참가자인 메이가 차이나 드레스 차림으로 서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아직 조안과 소송은 안 끝났는데, 괜찮겠습니까?”
조안은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본명이었다.
‘조안’이라는 말에 콜롬보의 인상이 바뀌었다.
“당신, 내가 누군지 아나?”
“저는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글로벌 비전 2라운드 상대인 비원더의 멤버인 권노을이라고 합니다.”
“아, 실례. 동양인들은 얼굴 구별이 잘 안되어서 말이야. 그래도 어떻게 나를 잘 찾아왔군. 나한테 말을 건 거 보면 우연은 아닐 텐데? 왜 왔지?”
“우연은 아닙니다.”
콜롬보가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소리를 죽인 채로 쿡쿡 웃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조안의 약점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쿡쿡! 나한테 잘해주면 그녀를 박살 내 줄 수도 있어! 핫핫핫!”
“어떤 약점이 있나요?”
“조안의 약점은 옆구리야.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리면 맥을 못 춘다고. 아, 그래도 실제로 해보지는 마. 나와 달리 네가 그러면 성추행으로 고소당할 거니까.”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나, 참으로 불쾌한 남자였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대화는 끝내야 했다.
“뭐, 딱히 도움 되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원래 다~ 그런 거지! 무슨 정보를 가졌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어어? 메이?”
메이는 어느새 파티에서 사라져 버렸다.
콜롬보가 벌떡 일어났다.
“에이 재미없군! 나는 그만 가야겠어. 어이!”
그가 휘이익 손짓하자 어린 여성 모델 3~4명이 그를 따라왔다.
“나는 이만 간다? 잘 있으라구. 조안을 박살 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이제 부숴버릴 내 장난감이니까.”
그가 사라지자 배영웅 매니저가 내게 슬쩍 속삭였다.
‘불쾌한 남자네요.’
‘네, 이 장소도 썩 유쾌하진 않군요. 하지만, 제 목적은 다 달성했어요.’
나는 사실 그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본 후, 나는 확신이 생겼다.
내 작전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