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바로네스 메이어스.
최근 2~3년간 빌보드 차트 TOP10에 자주 얼굴을 비친 세계 정상급 여가수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현재 세계 최고의 가수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었다.
제롬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도 이번에 이겨봤자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못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 현재 최고의 가수니까.”
글로벌 비전에서 우승하면,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가수가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빌보드 차트에 알박기하는 월드 스타가 되는 건 아니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 같은 월드 스타가 ‘될 수도 있는’ 길이 열리는 것뿐이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엔간한 글로벌 비전 우승자보다도 더 유명한 가수였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글로벌 비전에 참여한 거야?’
* * *
1라운드 승리 후 다음 날.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배로니스 메이어스의 영상들을 확인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무대를 이렇게 자세히 살펴본 건 처음이었다.
일단 당연한 말이지만, 무지하게 예뻤다.
어깨에까지 닿는 갈색 생머리가 시선을 우선 사로잡았다.
그녀의 강렬한 옅은 갈색의 눈빛에는 순수함과 강인함이 공존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핑크빛 드레스도 그녀의 순수한 외모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냥 이쁜 게 전부가 아냐. 아니, 오히려 외모 때문에 음악이 가려진 거라고 봐야지.’
일단, 그녀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코첼라부터 빌보드 어워즈, MTV 언플러그드 공연, 그래미 어워즈까지, 우리가 꿈꾸던 모든 곳에서 공연했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게다가 공연에서의 퍼포먼스도 너무 좋았다.
그냥 운이 좋아서 이 무대에 선 사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 바베이도스 출신인 그녀는, 그답게 레게 음악을 주특기로 한, 리듬감 위주의 음악을 했다.
내가 재호에게 물었다.
“너 카리브해 음악이 좋다고 거기 가서 이스트 웨이브도 만나고 그러지 않았었냐?”
“그랬지.”
“어땠어?”
재호가 피식 웃었다.
“말해 뭐해! 푸지스, 밥 말리… 카리브해 음악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어. 엄청나게 깊이 있는 음악이야. 심지어 공산국가라 국경이 닫혀 있는 쿠바음악까지도 다 엄청난 수준이라구.”
“그 정점에 있는, 카리브해 출신 최고 스타가 바로 바로네스 메이어스고 말이지.”
재호가 내 말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래!”
나도 재호를 따라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재호가 말을 이어갔다.
“참고로 말이야, 이스트 웨이브가 카리브해에 있던 거도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오, 둘이 같이 곡 작업 하나?”
“아니, 곡 작업만 하려면 뭐 안 만나도 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우리가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이, TV에서는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격렬한 안무로 온몸을 흔들면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환희가 경탄의 신음소리를 냈다.
“와… 미쳤어! 미쳤어! 어떻게 혼자서 저런 완벽한 무대를 하죠?”
재호도 거들었다.
“그러게! 뭔가 엄청 고음이라거나. 엄청 특이한 음색이라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빠져드는데?”
나는 금방 그녀 노래의 특색을 눈치챘다.
“저건 그루브의 힘이야.”
“그루브요? 그건 누구나 있는 거 아니에요? 형도 그루브 있게 부르잖아요. 저도 노력하고,”
“그래 환희, 네 노래에는 항상 그루브가 있지. 근데 그루브가 뭐냐?”
환희가 내 말을 듣고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말로 표현을 하라 하니까. 어려운데요? 뭔가 좀 쫀득쫀득하고. 찰지고. 그런 거 아닐까요? 말미잘 같은?”
어떤 개념을 말로 표현하라 해보면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여부가 드러나는 법이다.
“뭐, 꼭 이해하고 그루브를 탈 필요는 없지. 말로 표현 못해도 너는 감각적으로 잘하는 타입이니까. 하여튼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본능적으로 그루브를 알아.”
박자를 아주 미세하게 정박보다 느리게 탔다.
강세를 섬세하게 조절해서 흐름을 만들었다.
누구나 아는 그룹의 기본기지만 완벽하게 지키기는 어려웠다.
이런 그루브를 가지면서도 격렬한 춤과 노래를 놓치지 않았다.
무대를 보면 볼수록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실력에 감탄이 나왔다.
거기다가 음악 그 자체도 훌륭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카리브 전통의 레게 음악 작곡가들은 물론, 이스트 웨이브 등의 팝 프로듀서와도 활발하게 작업하면서 다양한 곡을 소화했다.
이렇게 전방위로 고품질의 음악을 한 덕분에 그녀는 최근 2년간 가장 두드러지는 가수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재호에게 슬쩍 운을 뗐다.
“재호 너, 빌보드 자주 확인하지?”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주 체크해.”
“바로네스 메이어스보다 더 빌보드 차트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던 여가수가 최근에 있던가?”
재호가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없던 거 같은데?”
환희가 절규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가수가 대체 왜 오디션에 참여하냐고요!!!”
‘나도 궁금한데?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알아볼 방법이 없을까?’
다행히 금방 기회가 찾아왔다.
* * *
글로벌 데이 본선에서는 미디어 데이가 ‘매주’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아프리카의 대표 격이자 강력한 경쟁자였던 제롬의 패배 후 기자들이 비원더에 부쩍 관심을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 중에는 곤란한 질문도 많이 있었다.
“권노을 씨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선배 가수 문루아 씨와 꾸준히 스캔들 의혹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네 그냥 선후배 사이입니다.”
최대한 뻔하고 건조하게 답변했다.
무엇보다 그게 사실이었다.
나도 이제 이 바닥 밥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의 대처법도 알고 있었다.
“비원더는 베이즈와 사이가 안 좋다는데 사실입니까?”
“전혀 친분이 없습니다. 다만 뮤직비디오는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이와 식사를 함께한 사진을 한 파파라치가 찍었는데요. 어떤 관계이신가요?”
“같이 글로벌 비전에 참여해서 매니저 등과 함께 밥 먹은 게 전부입니다. 크루즈에는 전 세계의 훌륭한 음악가들이 모여 있는데요. 이것도 기회인지라 매일 두어 팀과 함께 식사합니다.”
‘이거 뭐, 세계 어디나 기자는 똑같구만.’
한숨이 절로 나오는 질문들에 답하고 있노라니 시간이 술술 흘러갔다.
사실, 우리 상대인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비원더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많은 형편없는 질문을 받았다.
“이혼 수속은 어떻게 돼가십니까?”
“역시 남편분과 베이비 시터와의 불륜 의혹이 사실인가요?”
“재산 배분은 어떻게 됩니까?”
“양육권은 누가 갖게 되나요?”
“언제부터 별거를 시작했나요?”
주로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뭐, 요새 상황이 워낙 기사화되기 좋은 상황이긴 하지.’
나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무대에서는 너무도 자유로운 한 마리의 독수리 같던 그녀가 인터뷰장에서는 새장에 갇힌 우울한 앵무새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스태프가 너무 적고 행동도 허술했다.
TYB가 아이돌 기획사라 팝 기획사보다 좀 스태프가 많은 편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바로네스 메이어스 팀의 스태프는 너무 적은 감이 있었다.
‘거의 본인이 혼자 해결하는 느낌인데?’
그렇게 기자 간담회가 끝났다.
숙소로 돌아가려 하는 길이었다.
세계적인 팝스타인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보러 지나치게 많은 인파가 모였다.
그에 비해서 안전 요원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내가 배영웅 실장에게 귀띔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한테 안전 요원이 추가로 필요하겠는데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배영웅 매니저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저희 팀이 지금 가겠습니다!"
“꺄아아악!"
마침 그때, 인파 중 누군가가 넘어지면서 도미노처럼 인파가 바로네스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네스가 인파에 깔리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
배영웅 실장이 빠르게 파견한 우리 팀 안전 요원이 아슬아슬하게 몸으로 막아서 바로네스 메이어스를 지켜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만 ‘그라시아스 땡큐’ 한 마디만 남기고 서둘러 차량에 탔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배영웅 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아니, 명색이 팝스타인데. 팀이 왜 저래요? 저거 매니저 잘라야겠는데요?”
내가 나직이 답변했다.
“어쩌면 매니저를 해고해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겠죠….”
“네?”
* * *
케이프타운에서의 콘서트가 마무리되고, 남은 64개 팀은 다시 비전 크루즈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필리핀 세부로 향했다.
팀이 절반으로 줄어드니, 크루즈도 단숨에 한가해졌다.
‘중국, 일본, 미국, 영국, 스웨덴… 강국들은 대부분 다 남아 있는 거 같네.’
다른 스태프와 멤버들이 모두 함께 석식을 먹으러 나갔다.
나는 식사 전 슬쩍 방을 나섰다.
우선 나는 매일 우리 방을 치워주는 직원 ‘아이샤’에게 팁을 주었다.
그녀가 오늘 내게, 매우 유용한 정보를 하나 주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나는 호텔 직원이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크루즈의 갑판 한쪽 구석으로 가 보니, 바로네스 메이어스와 한 여성이 함께 서 있었다.
둘 사이에는, 이제 갓 걸어 다닐 수 있을 법한 아기가 뛰어놀고 있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내 얼굴을 알아보더니, 당황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여긴 어떻게 왔죠?”
“우연입니다. 아이 귀엽네요.”
“고맙… 아니, 내가 바본 줄 알아요?”
“이분은 유모이신가요?”
딱 봐도 바로네스 옆에 서 있는 여성은 아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프로였다.
고급스러운 영국풍 정장 차림의 중년의 백인 여성이었다.
나이는 낮게 잡아도 60? 하지만 그만큼 노련미가 있었다.
바로네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만, 유모에게 지그시 지시했다.
“에이미, 잠시만 샤넬 데리고 방으로 가줄래요?”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와 손잡고 갑판 어딘가로 사라졌다.
바로네스가 꾹 다문 입술을 열었다.
“왜 여기에 왔어요? 우린 적 아닌가요?”
“매일 이 시간만 되면 아이와 함께 갑판을 걷는다는 소문을 누군가에게 들었습니다. 대결 전에 한번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 와봤습니다.”
“하! 난 보디가드도 지금 없어요. 혼자 있는 여성을 노려서 뭐 하게요. 위해라도 가하겠다는 거예요?”
“세계 최고의 팝스타께서 보디가드도 없이. 너무 위험하신 거 아닙니까?”
“남아 있는 스태프가 없어요. 어쩔 수 없죠.”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지금 그녀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상대인 전남편은 다름 아닌 그녀의 매니저였다.
“매니저가 사라졌다고 해도. 바로네스 메이어스인데요? 다른 회사에서 매니징해 주겠다고 나서지 않아요?”
“없어요. 그 자식이 어떤 묘수를 부렸는지도 모르죠.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아요. 지금은 혼자 하고 있어요.”
빌보드를 씹어 삼킨 여가수가 인디 가수처럼 스스로 매니지먼트를 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해가 안 되네요, 다른 대형 기획사가 어떻게든 계약하자고 올 거 같은데.”
“아이 키우는 퇴물 싱글맘 가수는 아무도 관심 없는 걸까요?”
바로네스 메이어스의 목소리에 처량함이 묻어 나왔다.
그녀와 함께 지는 해를 감상했다.
“어쩌면 내 커리어가 지는 것도. 저 석양처럼 운명일지 모르죠. 석양은 누구나 매일 보는 거예요. 하지만 새삼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하지만 나, 호락호락하게 지진 않을 거예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예요. 이대로 끝날 순 없어!"
“그래서 글로벌 비전에 오셨군요. 혼자서도 오디션에는 참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요!”
거기다가 그녀의 모국은 바베이도스, 소국이었다.
만약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글로벌 비전에 참여한다고 선언하면 그녀가 국가 대표가 되는 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어쩐지…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저도 팬이었는데. 굳이 오디션에 나오신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나는 질 수 없어요.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결의의 찬 채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이해됩니다.”
바로네스 메이어스가 헛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당신은 사람 힘 빠지게 하는 재주는 있네요. 여튼 만만하게 지진 않을 테니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바로네스 메이어스는 그렇게 총총걸음으로 갑판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왜 이 대회에 참가했는지 알았다.
‘이걸 잘 고민해보면, 그녀를 이길 방법도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선 그 전에, 이번 무대부터 준비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