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글로벌 비전 심사위원 바네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첫 본선 날이었다.
“첫날이 가장 중요한데.”
보통 방송은 첫날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게 오디션 프로라면 더더욱 그랬다.
결승까지 탄력을 받고 점점 관심을 얻느냐, 아니면 첫날에 몰린 대중의 관심을 잃느냐 여부는 초반부에 모두 결정됐다.
첫날 촬영이 잘되는 것이 제작진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대진은 일단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제롬 대 비원더라니. 시작부터 박 터지겠는데?’
이번 대회 첫 라운드는 아프리카에서 진행했다.
제롬은 홈 어드벤티지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상황.
이번 라운드에만 한정하면 미국 대표나 영국 대표와 같은 우승 후보보다도 더욱 강력한 참가자일지 몰랐다.
그리고 비원더.
보통이라면 아시아 국가의 참가자는 글로벌 비전에서는 무관심이었을 터였다.
아시아 출신 우승자는커녕, 4강 진출자도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네사는 직접 한국 예선에서 심사위원을 하며 비원더의 무대를 체험했다.
그들에게는 알앤비의 본고장 못지않은 소울과 리듬감이 있었다.
압도적인 구성미, 다채로운 음악, 멤버 간의 화합 등, 본토에서도 보기 힘든, 비원더만의 강점마저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을 해외 시청자 중 상당수가 이미 방송을 통해 체험했다.
이번에도 비원더의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였다.
그중에서도 노엘 퀀의 무게감은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그런 가수가 있던가?’
바네사 본인도 전설의 디바였다.
대중가수는 물론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까지, 온갖 가수들과 협연을 해봤다.
하지만 그녀는 권노을과 같은 가수는 처음 봤다.
성악가를 넘나드는 압도적인 성량에 최고의 알앤비 가수들을 연상시키는 기교, 거기에다가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확함까지.
권노을은 자신이 본 가수 중 아마도 가장 뛰어난 가수 중 하나일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회자 말론 웨이가 무대에 나와 무대를 진행했다.
“자! 오늘의 첫 번째 순서는. 아프리카의 제왕, 아프리카의 자부심. 아프리카의 제롬!”
제롬이 춤을 추면서 폴짝 무대에 뛰어올랐다.
현지 관객들은 제롬에게 열광했다.
아프리카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제롬은 노래를 시작했다.
랩인지 노래인지 알기 힘든 노래, 하체 스텝의 유연성을 크게 활용한 춤 동작, 그야말로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팝 음악이었다.
무대 못지않게 관객석도 강렬한 춤판이 펼쳐졌다.
이스트 웨이브가 중얼거렸다.
‘…대로군.’
바네사가 슬쩍 물었다.
“예상대로라고 생각했지?”
“그래 뭐. 아프리카 팝스타라면 딱 떠오르는 스타일이 이거지.”
“그게 아프리카에서 먹히는 거니까 좋아하는 거 아냐?”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프리카 음악을 소개하려고 연구 많이 하는데. 아프리카라고 이런 댄스 음악만 한다는 건 게으른 생각이야. 아프리카에도 다양한 음악이 있다고.”
“뭐, 관객들이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바네사가 관객들을 빤히 지켜보았다.
관객들은 제롬의 뻔하디뻔한 무대에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맛의 노래지만,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비원더가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멋진 음악을 가져다준다면, 비원더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까?’라는 묘한 기대감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제롬의 무대가 끝나고, 말론의 평이한 인터뷰가 끝났다.
평소의 인터뷰 당하는 가수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론 특유의 변칙 질문들도 없었다.
‘아무래도 사실상 제롬이 ‘홈 어드벤티지’를 가진 가수기도 하니 질문할 때 몸을 사리라고 제작진 중 누군가가 말론에게 경고한 모양이군.’
말론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제롬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애매했지만 말이다.
바로 말론이 다음 가수를 소개했다.
말론 웨이는 한층 마음이 편해 보였다.
“자! 다음은 써울 코 레아에서 쏘울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까지 날아온! 비! 원! 더!”
제롬 순서에 비해 확연히 작은 환호 소리, 그리고 약간의 야유가 들려왔다.
“우우!”
주환희가 느닷없이 무대로 펄쩍 뛰어오르며 노래를 시작했다.
‘오호?’
바네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공격적인 힙합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컬 위주의 팀치고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힙합 프로듀서인 이스트 웨이브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음악을 즐겼지만, 솔직히 알앤비 보컬인 바네사는 아쉬웠다.
이토록 뛰어난 알앤비 보컬 그룹이 굳이 관객을 신나게 하기 위해 힙합을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곧 기우로 드러났다.
후렴만 힙합일 뿐, 벌스로 들어가자 1절에는 아름다운 알앤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뭔가 편곡이 독특했다.
평소에 비원더는 정통적인 알앤비, 휭크 밴드 사운드만을 고수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바네사가 본 적이 없는 악기들이 잔뜩 추가되어 동양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이건, 대체 뭐지? 처음 들어보는 음악인데.’
그때였다.
후렴의 강렬한 힙합 훅을 주환희가 내뱉자마자, 갑자기 전혀 엉뚱한 게스트가 등장했다.
흑인 여성이 독특한 오색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부채를 든 채로 무대에 등장했다.
아프리카 흑인인 듯했는데, 옷차림은 동양 느낌이 물씬 났다.
“저게 뭐야!"
나도 모르게 외친 바네사의 질문에, 이스트 웨이브가 답해 주었다.
“한복이군.”
“한복?”
“코리아의 전통 의상이야. 그 왜, 비원더 지역 예선에서 봤잖아? 남자들이 입은 옷. 그거에 드레스 버전이야.”
“아…!”
그제서야 바네사는 비원더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비원더는 아예 한국 전통 음악으로 승부할 참이었다.
흑인 여성의 보컬 또한 독특했다.
전혀 팝 음악과는 상관없이, 독특한 떨림이 있는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이러니하게도 동양인 보컬 비원더가 흑인 여가수의 노래를 그대로 팝 느낌으로 받아쳤다.
전혀 모르는 언어로 노래하는 흑인 여가수와 달리, 권노을이 부르는 파트는 영어 가사라 이해가 쏙쏙 되었다.
[오늘은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마지막은 아니야
함께 있어 줘]
동서양이 화합한 듀엣이었다.
둘의 위치가 바뀌긴 했지만.
두 사람의 노래는 점차 고조되어, 마지막 브릿지 부분에서 터졌다.
어마어마한 음압이 느껴지는 성량이었다.
점차 노래는 단순한 사랑 노래에서, 모두가 하나 됨을 외치는 인류애적인 느낌으로 변해 갔다.
후렴과 후렴 사이의 브릿지 부분에서는 아름다운 알앤비 선율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함께 손잡을 수 있다면
약속된 희망을 기억할 수 있다면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꿈은 계속 이어질 거야]
바네사는 사실 전혀 다른 두 개의 곡이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간혹 비원더뿐 아니라 한국 가수들이 이런 매시업(* 대조되는 두 곡을 섞는 수법)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바네사는 그냥 하나의 노래만 불렀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비원더의 무대는 예외였다.
이번 곡 ‘날개’에서는, 두 개의 서로 대조적인 음악이 서로를 받쳐주며 서로의 음악을 자극하며 새로운 감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이건 다양해지고 싶어서 억지로 여러 종류를 섞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 자체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한 매시업이었다.
게다가 대조적인 두 보컬의 고음이 썩 잘 어울렸다.
바네사는 전율했다.
글로벌 비전이 대단한 오디션인 건 사실이었다.
세계 최고의 오디션이자, 유일하게 전 세계 가수를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네사는 자신이 못 본 음악을 하는 가수는 글로벌 비전에서 아직 보지 못했었다.
록, 댄스, 팝페라… 글로벌 비전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몇몇 공식의 무대가 있었다.
대부분의 참가자가 그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비원더의 무대는 달랐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창의적인 무대였다.
이를 위해 본 적도 없는 악기를 쓰고, 들어본 적도 없는 멜로디를 붙였고, 독특한 타입의 보컬리스트를 공수해 왔다.
그 결과는 독창적이면서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역사적인 무대가 나왔다.
제롬의 무대는 훌륭했지만, 평이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음악가가 오디션 프로에 나온다면 딱 부를 거 같은 뻔한 노래였다.
그에 비해 비원더의 노래에는 참신함이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감흥을 주는 마무리에 관객은 만족스러운 호응을 보냈다.
“브라보 브라보!”
바네사도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무대가 끝나고, 말론 웨이가 장난기를 머금은 채 비원더에게 질문을 던졌다.
“옆에 있는 레이디는 누굽니까?”
노엘이 마이크를 흑인 여가수에게 넘겼다.
“직접 소개해주세요.”
“칼라 이푸파입니다. 나미비아에서 왔어요.”
나미비아라면 바로 이곳, 남아공 근처였다.
말론 웨이가 관객이 든 질문을 대신 물어주었다.
“나미비아에서 여기는 왜 왔나요!”
칼라가 대답했다.
“사실 저는 한국에서 한국 전통 음악… ‘국악’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통 음악에 매력을 느껴서요. 오늘은 국악과 알앤비를 조합할 수 있는 무대를 전 세계인에게 보여줄 기회가 있다고 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제 꿈을 펼칠 수 있게 해준 한국에 감사하고, 비원더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 꿈을 응원해주세요!”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바네사가 슬쩍 이스트 웨이브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째, 관객 반응이 되게 좋네? 그러고 보니 제롬 무대 반응은 내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던 거 같고.”
처음에는 제롬의 무대에 대한 반응도 충분히 열광적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비원더의 무대와 비교해보니 이전 제롬 무대에 대한 반응이 부족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거’ 때문인가? 스캔들?”
“무슨 스캔들?”
“무슨 루마니아의 모델이랑 제롬이 만난다고 하던데. 현지 아내를 두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열애설 때문에 인기가 떨어진단 거야?”
“뭐 그건 아닌데. 유럽 여자랑 놀아나는 흑인 가수보다야, 자기 나라 가수를 게스트로 써서 예상치 못한 노래를 보여주는 가수에게 더 뜨거운 반응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설마….”
하지만 사실, 바네사 또한 느끼고 있었다.
현장 분위기는 이미 완전히 비원더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이렇게 되면 애초에 음악조차 더 탄탄하고 독창적이었던 비원더에게 너무 유리해진다.
이스트 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500점 만점이지? 100점 이상 차이 안 나면 내가 여기서 벌떡 일어나서 브레이크 댄스 춘다.”
“아니, 사양할게.”
* * *
말론이 잔뜩 과장된 제스처로 승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승자는! 놀랍군요. 바로….”
환희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아이고. 빨리 좀 발표하지.”
내가 환희에게 슬쩍 속삭였다.
‘입 모양 보일라, 속으로 생각해 속으로. 한국인은 알아봐.’
환희가 손을 입으로 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말론 웨이의 뜸 들이기가 모두 끝났다.
“비! 원! 더! 1라운드 진출! D등급의 대이변이네! 콩그레츄레이션!”
제롬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되어 힘을 꽉 주었다.
‘한 대 치려나?’
그런데 제롬이 의외로 선선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비원더를 오해했군. 멋진 무대였어. 나보다 더 흑인 같은 소울이야.”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냥 무대 타입이 달랐던 거지 당신도 실력은….”
“실력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실력을 얼마나 예술적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지. 너도 잘 알잖아? 내 완패야.”
의외로 쿨한 사람이었다.
찌푸린 인상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니 왠지 험악하다고 생각했던 얼굴도 순박하게 보였다.
내가 슬쩍 그에게 말했다.
“당신 음악에는 시대가 원하는 뭔가가 있어요.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하면… 세계적인 팝스타가 될 거예요 아마도.”
“하하! 고맙군. 무슨 부두술사라도 되나?”
‘아니, 부두술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온 사람이지.’
나는 그저 그의 미래를 읽어 준 것뿐이었다.
다만 전생에 그는 도중에 가수를 포기하는 바람에, 몇 년 시간을 허비한 후 팝스타가 되었다.
그 시간이 아까워 조금 충고를 해준 것에 불과했다.
제롬이 내게 말했다.
“이왕 나를 이겼으니, 우승까지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 말은 하기 어렵겠네.”
“왜죠?”
재호의 질문에 제롬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너, 너희 다음 대진 상대가 누군지 모르냐?”
잘 알고 있었다.
다음 대진 상대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