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47화 (247/280)

제247화

지금 이곳은 아프리카다.

그리고 제롬은 아프리카에서도 음악 강국으로 소문난 나이지리아의 대표였다.

제롬은 아프리카에서는 관중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일 것이라는 짐작이 쉽게 가능했다.

물론, 글로벌 비전의 점수 집계는 심사위원 점수와 시청자 점수의 합계였다.

관객 점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란 게 있는 법.

만약 관객들이 제롬의 무대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면, 그의 점수도 자연스레 오를 터였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 * *

우리를 태운 배, 드림 크루즈가 케이프타운에 기항했다.

예상대로 남아공에서 제롬의 인기는 최고였다.

‘제롬!’을 연호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배가 흔들릴 정도였다.

내가 배영웅 실장에게 툴툴거렸다.

“거의 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돌아온 느낌이네요.”

배영웅 매니저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현지인들이 비원더를 공격해서라도 제롬이 이기게 할 거라는 농담도 있던데요? 하하! 농담이겠죠 농담.”

실제로 지난 글로벌 비전에서는 자국 이탈리아 대표의 탈락에 흥분한 관중들이 난투극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그런 농담은 제 심장에 해로우니 좀 자제해 주세요.”

“일단 보안 인력은 충분합니다. 외국이니까요. 당분간은 조심해야죠.”

제롬의 인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외부 일정마다 ‘제롬’을 외치는 목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심지어 연습실에서도 연습이 어려웠다.

하도 ‘제롬! 제롬!’ 하는 소리가 창문마다 울려 퍼지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귀가 예민한 재호가 투덜거렸다.

“관중들이 우리 무대 때도 이 정도 크기로 야유하는 거 아닐까? 우우~ 하고 말야.”

내가 재호를 다독였다.

“에이 뭐. 그 정도 매너는 있겠지.”

환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근데 대체 왜 제롬은 저리 인기가 많아요? 이름도 ‘제롬’이던데. 백인 같은 이름이지 않아요?”

“뭐 이름이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저 사람 본명은 ‘자말’이래.”

환희가 손을 치들어 올리며 흥분된 마음을 보여줬다.

“그거 봐요! 자말! 누가 봐도 흑인 같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자말이 아프리카 음악계의 희망인가 봐. 아프리카는 음악 강국인데 스타는 많지 않았으니까.”

사실 아프리카 음악은 재즈부터 알앤비, 록, 힙합까지 대중음악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비해, 아프리카 출신 스타는 너무 적었다.

제롬은 그런 설움을, 깨줄 수 있는 스타였다.

나이지리아 출신이었지만, 런던에 투신해 단숨에 영국 클럽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빌보드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는 래퍼로 성장했다.

어쩌면 아프리카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도 당연해 보였다.

‘약간 아시아에서 우리 비원더의 위치랑 비슷한 건가?’

환희가 고민이 생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뭘?”

“관중들이 다들 저희를 싫어하고 상대편인 제롬만 응원하잖아요?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라 대체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감이 안 잡혀요.”

환희의 포인트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 이런 무대는 처음이었다.

어찌 되었든 여태까지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에서 했던 오디션에 참여했었다.

이방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은 마치 어웨이로 치루는 스포츠 경기처럼, 다수의 관중이 상대편을 응원하는 상태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평소와는 또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재호도 눈을 질끈 감으며 고민을 시작했다.

“뭐 방법 없냐? 노을아?”

“나라고 뭐가 있을 리가 있냐?”

그때, 갑자기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여동생의 국제전화였다.

“여보세요?”

-오빠! 아프리카는 어때?

“야, 지금 서울 야밤인데 어떻게 전화했어?”

-나 모로코잖아 오빠. 까먹었어?

“아.”

그러고 보니 국악 전공인 여동생은 최근 전 세계 국악 투어를 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 내가 번 돈으로 여동생은 대학을 씩씩하게 다니고 있었다.

이제 1학년이지만 이미 학교의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전 세계 투어를 다닐 정도로 성장했다.

이게 국악 전공자의 장점이다.

클래식은 전 세계 1위여야만 세계 투어가 가능하지만, 국악은 다르다.

국악 연주는 한국에서밖에 배울 수 없으니까.

한국에서만 가능한 특수성이 있기에 국내 수준급의 국악 연주자는 모두 세계무대에 설 수 있었다.

지금 동생 또한 동기들과 함께하는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모로코에서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우연히도 시간대가 겹친 셈이다.

-이번 월드 투어는 모로코가 마지막이야. 다음 투어는 아마 호주랑 동남아 위주로 할 거 같아.

“바쁘겠네. 거기는 뭐 텃세 없냐? 아무래도 있겠지?”

내가 제대로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보니, 동생도 비슷한 신세는 아닐지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은 걱정 없다는 듯 핀잔을 줬다.

-무슨 소리야 오빠! 오빠 내 룸메 누군지 기억 안 나?

그제야 동생의 룸메이트가 누구인지가 기억났다.

“아, 맞아. 그러네. 텃세가 있을 리가 없….”

그때였다.

뭔가,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라 버렸다.

“야, 잠깐만 기다려봐. 너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된다고?”

지금 상황을 반전할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생각난 것이다.

* * *

“국악을 하자고?”

재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빠르게 대답했다.

“진짜 정통 국악을 하자는 건 당연히 아니지.”

“야, 국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판소리 하나에 장인이 되려면 평생 파야 해.”

“국악 사운드를 조금 넣은 알앤비, 힙합이면 될 거 같은데? 이런 것처럼.”

그러면서 나는 스리랑카 전통 음악과 일렉트로닉, 힙합 등이 섞인 M.I.A의 음악을 들려줬다.

재호와 환희가 유심히 음악을 들었다.

조금 표정이 누그러진 재호가 내게 질문했다.

“무슨 악기를 넣을 건데?”

“일단 가야금은 있어야 할 거 같고. 아쟁, 피리… 아! 타악기도 들어가야 했네. 장구나 꽹과리 가능해?”

재호가 한숨을 살짝 쉬었다.

“한번 해 봐야지.”

환희가 끼어들었다.

“키미 선배님한테 여쭤보는 거 어때요? 국악 악기 샘플링한 아이돌 곡은 몇 곡 있었던 거 같아요. 천신군단 곡에서 대북이랑 아쟁을 썼던 거 같은데.”

“바로 연락드려야겠다.”

다행히 내가 아이디어를 주자, 재호랑 환희가 삐걱거리지만 조금씩 곡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재호는 키미 작곡가와 통화하면서 조금씩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환희 또한 곡 작업에 달려들어 조금씩 러프한 멜로디와 가사를 붙여 보았다.

그러다 환희가 내게 질문했다.

“근데요 형. 국악으로 무슨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로잡아요?”

“그건 두고 보면 알아.”

의외의 충격을 줄 게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 * *

그날 밤, 왠지 잠이 너무 일찍 깨버렸다.

새벽 5시지만 아직 헬스클럽은 열려 있었다.

슬쩍 헬스장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나 혼자 운동이라도 해보실까?”

나는 혹시나 남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트레이닝 차림에 스냅백을 눌러 쓴 채였다.

조심스레 러닝머신으로 갔다.

대회는 저녁이지만, 아침에 조금 땀이라도 빼두면 컨디션 조절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때였다.

글로벌 비전 스폰서 오너 집안사람인 론과 마리가 투덜거리면서 수행원과 함께 헬스장에 들어왔다.

‘윽!’

왠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슬쩍 나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모자를 푹 눌러 쓴 채로 토끼 발로 구석의 러닝머신으로 갔다.

다행히 론과 마리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좀 거리를 둔 채로 나란히 러닝머신에서 걷기 시작했다.

둘의 대화가 명징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번 순서 론 네가 뒤바꾼 거지?”

“바꾸다니! 순서 결정은 제작사의 정당한 권한이야. 그걸 조금 활용한 것뿐.”

“왜 제롬이 제일 첫 번째로 바뀌었지?”

‘우리가 첫 번째라고?’

못 들어본 소리였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론이 자기 멋대로 진행 순서를 바꿔버린 듯했다.

론이 피식 웃었다.

“제롬은 현지 최고 스타니까, 오프닝에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만약에 제롬이 패배하면? 아프리카의 스타가 패배하는 걸 처음에 보여줄 셈이야?”

론이 버럭 소리 질렀다.

“질 리가 없어!”

마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평가는 심사위원과 시청자가 하지, 관중이 하는 게 아니야. 결과를 어떻게 확신해? 만에 하나라도 제롬이 지면 관중들 분위기가 시작부터 확 죽을지도 모른다고.”

론이 고개를 저으며 빈정댔다.

“그렇게 문제가 될 상황부터 생각하니까 시원시원하게 일을 못 하는 거야. 여자들이 원래 다 그렇지. 그래서 여자들은 사업에 적합하지 않은 거라고.”

마리도 한 치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이브하게 대충 넘어가니까 남자들이 사업하다 큰 실수를 많이 하는 거 아닐까? 내기 도박으로 카지노를 통째로 날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론이 주먹으로 러닝머신을 휙 쳤다.

“그건 사기였어! 난 작업 당한 거라고! FBI가 그놈들을 뒤쫓고 있으니 어떻게든….”

마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하는 놈이 문제지. 그게 비즈니스야. 알잖아 론?”

‘아이고야. 싸운다 싸워.’

아무래도 이야기가 너무 점점 내밀하게 흘러가는 것을 본 이상, 내가 들어본 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정보는 충분히 얻었다.

조용히 토끼 발로 헬스클럽 바깥으로 향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고,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때였다.

갑자기 헬스클럽 문이 휙 열리고 마리가 튀어나왔다.

“새벽부터 뭐 해요?”

“깜짝이야!”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운동이라니,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요. 차세대 월드 스타신데.”

“누군가는 붙어 있을 겁니다."

사실, 지금도 김나리 사원이 혹시나 하는 안전 상황에 대비해 남자 로드 매니저와 함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배영웅 실장의 ‘보안 인력을 늘리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 제안, 여전히 거절하고 있는 건가요?”

“민티의 스폰을 받아들이라는 제안 말씀이신가요?”

마리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녀 뒤에 서 있는, 얼핏 5명도 더 되는 경호원들도 마리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무슨 코러스야?’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민티는 스폰서 관심 없어요. 내 오빠 론만 해도, 비원더는 돈 안 되는 한국 시장 대표라 스폰 제안에 무관심하죠.”

“그럼?”

“나, 마리 록하트가 스폰서가 되겠다는 거예요. 뻔하잖아요?”

“다른 건가요?”

“매우 다르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살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내게 그놈의 ‘스폰서’를 해주고 싶어 하는지, 그 스폰서란 게 정확하게 뭘 말하는 건지, 모두 애매모호했다.

그녀가 다시 헬스장으로 향하며 말했다.

“뭐 천천히 생각해봐요. 설마 1라운드에서 떨어지진 않겠죠? 믿고 있을게요. 저력을 보여줘요.”

“제롬은 ‘아프리카의 영웅’입니다. 아시죠? 매우 어려운 상대예요.”

“그 정도는 이겨야 우승 후보라고 할 수 있겠죠. 눈치챘겠지만 제롬은 인기가 있지만 우승 후보 정도는 아니에요. 8강 정도 진출하면 선전이죠.”

지금 케이프타운을 들썩이게 하는 제롬,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글로벌 비전 본선에는 많다는 뜻이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글로벌 비전의 우승자는 단숨에 세계 규모의 슈퍼스타가 된다.

이번 대회 우승자는 바로 월드컵 주제가를 부르는 가수로 선정된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제롬이 제아무리 대단한 가수라 해도 결국은 한 지역의 스타다.

글로벌 비전의 우승을 노리려면 이 정도는 이겨야 한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마리가 냉정한 눈빛을 보이며 헬스장 문을 닫았다.

“최선으론 안 돼요. 잘해야죠. 제롬의 홈그라운드니까 어렵겠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건 ‘내 나름의’ 겸손이었다.

나는 무조건 이길 작정이었다.

나에게는 ‘비밀 병기’가 있었으니까.

‘상상도 못 하겠지. 비원더는 이번에 케이프타운을 홈그라운드로 바꿔버릴 계획인데 말이야.’

우리 무대가 끝나고 나서 마리와 론의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글로벌 비전의 1라운드 본선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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