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46화 (246/280)

제246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뭐야?’

호텔 방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문을 열어보니, 복도에 빽빽하게 사람들이 서 있었다.

시장통처럼 북적이는 분위기였다.

배영웅 매니저가 문을 막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귓속말로 물어봤다.

‘누군가요 실장님?’

‘비원더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는데요?’

‘저희를 보러요? 왜요?’

배영웅 실장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르겠네요.’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오전 8시였다.

재호는 아직 운동을 할 시간이고, 환희는 아직 잘 시간이다.

시차 적응도 완벽하지 않은데, 괜히 팀원들의 컨디션에 방해되지 않도록, 숙소를 조용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배영웅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일단 연락처하고 이름만 받아 주시겠어요?’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려요.’

나는 배영웅 실장에게 상황을 맡기고 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방안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가구가… 다른데?’

싸구려 TV가 최고급 50인치짜리로, 플라스틱 탁자가 마호가니 탁자로 바뀌었다.

심지어 탁자 위에는 못 보던 생화가 담긴 꽃병이 장식되어 있었다.

어젯밤과 분명 다른 풍경이었다.

마침 배영웅 매니저가 바깥 상황을 정리했는지, 문을 열고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상황은 정리됐네요.”

“왜 저렇게 된 걸까요? 이 배에는 관계자밖에 없을 텐데.”

제작진은 철저하게 팬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글로벌 비전 제작진 외에는 가수들밖에 없었다.

“배 안의 가수들과 관계자들이 어제 방송을 흥미롭게 본 모양이네요.”

“아, 오메가 토크쇼요?”

배영웅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에 방영되는 방송이니까요.”

지금은 2천년대 중반, 아직 티비의 힘이 강고할 때였다.

그중에서도 미국 프라임 타임 최고의 토크쇼라면 방송의 여파가 여전히 굉장했다.

‘아무래도 하루 만에 우리 지위가 많이 달라진 거 같은데.’

비원더의 위상이 나빴던 이유는 율리아 뵘을 억지로 섭외해서 뮤직비디오를 띄웠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율리아 뵘이 자기가 스스로 참여하고 싶어서 자진해서 출연했다는 해명을 프라임 토크쇼에서 한 덕분에 민심이 다시 좋게 변화한 듯했다.

‘그럼 앞으로가 중요하겠는데.’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호텔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영웅 실장이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웨이터가 서 있었다.

“침대를 새로 교체해 드리려 왔습니다.”

배영웅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대요? 왜요?”

“너무 안 좋은 침대를 쓰시는 거 같아서….”

“아직 사람이 자고 있으니, 저희 나가고 나서 바꿔주세요.”

“알겠습니다.”

호텔 직원이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 내게 말했다.

“어제 방송 잘 봤습니다! 너무 멋있어요!”

인도계 여성 직원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대로 후다닥 나가 버렸다.

“????”

배영웅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텔 직원도 어제 방송 보고 팬이 된 모양인데요?”

“뭐… 저런 걸로라도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겠네요.”

도움이 될지, 아니면 더 귀찮아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 * *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방송 덕분에 비원더의 상황이 나아지기도 했지만, 더 귀찮아지기도 했다.

우선 좋은 일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직원들의 태도가 매우 달라졌다.

갑자기 크루즈 직원들이 자진해서 수건, 비누 등의 소모품을 최고급 제품으로 교체해주기 시작했다.

식사 메뉴도 급격히 훌륭해졌다.

룸서비스를 직원들이 임의적으로 최고급으로 바꾸어 주었다.

덕분에 환희는 행복하게 돼지껍질 튀김 등의 간식을 챙겨 먹는 호사를 누렸다.

반면에 귀찮아진 점도 있었다.

“같이 밥 먹을래요?”

“식사나 같이하지.”

“제가 먼저 합석했는데요?”

…갑자기 온갖 참가자들이 우리랑 식사나 같이 하자며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식사 시간에 누군가와 동석하는 것은 환영이었지만, 매 끼니 때마다 두 팀 이상 합석을 요청하니 거절하는 배영웅 매니저가 가시방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면서 미팅을 두 탕씩 뛰었다.

그래도 유명해지니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면이 많았다.

외톨이였을 때는 배 안의 정보를 몰라서 여러 불이익을 당했는데, 이제는 정보가 공유되어 훨씬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지금은 클래식 성악가 출신인 메이와 조식 후 레스토랑에서 커피타임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방송 잘 봤어요. 역시 루아가 많이 이야기한 대로였어요. 훌륭한 노래네요. 라이브로 보면 더 훌륭하려나요?”

내가 답례로 목례했다.

“별말씀을요… 근데, 문루아 선배는 어떻게 아시나요?”

메이가 싱긋 웃어 보였다.

메이는 전형적인 중국계 미녀였다.

큰 눈에 오뚝한 코, 백옥 같은 피부, 거기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내렸다.

지금은 청재킷에 면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었지만, 보통은 정통 중국 복식을 입고, 오페라를 부르는 정통 클래식 가수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대형 스타였고, 일찌감치 호주에 이민 왔다.

지금은 급하게 중국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말이다.

특기 배역은 ‘투란도트’의 중국 공주 배역이었다.

‘그런데 전문 오페라 가수가 어떻게?’

“친구예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푸훗!”

‘왜 루아 선배 지인은 나를 보면 저런 웃음을 짓는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메이는 내 노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클래식 보컬보다도 더 발성이 좋아요. 우리 성악가는 평생 발성만 파는 사람들인데, 우리보다 더 발성이 좋으면 우리는 뭐 먹고 사나요?”

“과찬이십니다.”

메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겸손한 게 아니라, 이 정도 칭찬은 당연하다 여기는 거 아니에요?”

“설마요.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메이가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내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가끔, 글로벌 비전에서 듀엣 미션이 있을 때가 있어요. 혹시, 그때 좀 도와줄 수 있나요?”

메이는 현재 20대 초반으로 세계 오페라계에 충격적으로 데뷔한 신성이었다.

게다가 나와 창법도 대조적이면서도 성량이 비슷해 좋은 보컬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나에게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뜻.

단련된 성악 소프라노와 내가 듀엣 하면 잘 맞는다는 건 이미 지역 예선에서 경험했던 적이 있었다.

“좋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메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네요. 오늘 미팅하러 온 보람이 있었어요.”

“제가 영광이죠.”

“자꾸 겸손한 척! 후후. 그래도 솔직히 기분은 좋네요. 근데 저기 저 사람, 당신 보러 온 거 아니에요?”

나는 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민티의 오너가족 멤버인 론이 얼굴을 붉힌 채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종잇조각이 들려 있었다.

론이 성큼 걸어와선 종이를 내게 전달했다.

그가 대뜸 내게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이게 뭔데요? 아, 메이 님. 일단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메이는 우아하게 내게 손 인사하고는 총총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는 종잇조각을 살펴봤다.

영수증이었다.

“이게… 뭐죠?”

품목을 보니 룸서비스, 침대 교체, 수건, 비누 등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 어제 크루즈 직원들이 자진해서 우리 방에 줬던 품목들이었다.

“왜 자기 멋대로 최고급품을 가져다 썼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서비스도 받았더군! 그건 VIP에게만 허락된 건데.”

“직원들이 스스로 줬….”

론이 내 말을 끊었다.

“됐고. 돈이나 지불해.”

배영웅 실장이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그가 론에게 대답했다.

“매니저입니다. 저랑 이야기하시죠.”

“뭐야?”

배영웅 매니저가 입 모양으로 ‘걱정 마세요.’라고 대답했다.

아마 법인카드로 처리하려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호텔 직원들이 해준 서비스는 분명 가수들에게 포함된 서비스였을 것이다.

등급이 낮다고 해서 굳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건 그냥 트집 잡기였다.

아마 론은 자신의 직관이 틀리고, 비원더가 스타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냥 심통이 나서 분풀이를 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면 내가 진짜 맛을 보여줘야겠군.’

다행히, 크루즈에 처음 탑승했던 날과는 달리, 이제는 나도 좀 배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론을 마크하는 동안, 나는 말론 웨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말론 웨이는 짧고 굵은 답장을 보냈다.

[적당히 시간을 끌고 있으면 심판의 날을 보여주지.]

‘심판의 날이라니 너무 거창한 거 아냐?’

하지만 솔직히 좀 기대되기는 했다.

나는 슬쩍 론과 대화를 시작했다.

“자자, 진정하시고. 민티라도 한 잔 드시면서 이야기하시죠.”

나와 배영웅 매니저가 시간을 끄는 사이, 말론 웨이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같이 왔는데?’

멋들어진 은발을 장발로 기른 채로 최고급 네이브 맞춤 쓰리피스 양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셔츠 커프스도 유난이 고급져 보였다.

매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마치 뱀과 같아 보였다.

그가 론과 배영웅 매니저 앞에 섰다.

노인을 보자 론이 화들짝 놀랐다.

“할아버지?”

‘저 사람이 스폰서 집안의 할아버지인가?’

나이는 적게 잡아도 여든은 돼 보였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하는 거냐?”

론이 나와 배영웅 매니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아, 미수금이 있어서 찾으려….”

“멍청한 녀석! 우리가 왜 방송을 스폰하는지 아느냐?”

“미, 민티를 알리려….”

“슈퍼스타와 민티를 연결하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 앞에 그 슈퍼스타가 있는데, 그깟 침대 시트값이 중요하냐? 당장 치우지 못해?”

노인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전혀 굽지 않는 꼿꼿한 허리 덕분에 힘이 한층 실렸다.

론이 떨떠름하게 말대답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놈들은 매출에 영향이….”

“매출은 이놈아! 매일 바뀌는 거다. 숫자에 매몰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숫자는 고용된 회계사가 신경 쓸 일이지 주인은 더 큰 것을 보라고 늘 말했거늘…. 대체 어떻게 해야 마리처럼 현명해질꼬?”

노인이 자신의 앙숙인 여동생을 언급하자 론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에잇! 맘대로 하세요.”

그러더니 신경질을 내며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후계자 참~ 삼고 싶겠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노인이 내 앞에 손을 모아 조아리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손님 대접이 너무 추레했지요. 어제 오메가 쇼 잘 봤습니다. 우리 집안이 부족해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여든이 넘은 재벌 노인이 기껏해야 스무 살인 나에게 존댓말로 극진하게 나를 모시고 있었다.

영어에도 높임말이 있다.

그는 나를 sir(‘경’ ‘님’ 정도의 높임말)로 호칭했고, 말투도 미묘하게 높임말을 활용했다.

동방예의지국의 유교 보이의 정체성이라고나 할까, 노인에게 존대를 들으니 내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노인에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존댓말만은 하지 마세요. 반말로 부탁합니다.”

노인이 빙긋 웃었다.

“멋진 친구로군. 잠시 티타임이나 하지.”

* * *

“나 때는 말이야. 사업이 이렇게 이상하지 않았네.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명확하게 기여했고. 그 기여한 만큼만 돈을 벌었지. 지금은 글로벌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주식 가치는 엔간한 나라와 대등하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불행해진 느낌일세.”

노인의 이름은 ‘헨리’, 민티 그룹의 창업주였다.

그는 지금, 나와 비원더 멤버 전부를 자신의 스위트룸에 초대해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기절할 만큼 비싼 간식과 차 세트를 마시던 헨리가 우리에게 갑자기 신세 한탄을 했다.

전형적인 ‘라떼는 말이야’식 꼰대어였지만, 압도적인 실적을 갖춘 노인이 말하니 괜히 설득력이 저절로 생겼다.

나는 헨리를 위로했다.

“그래도 손자 손녀 두 분 다 강단 있고 괜찮아 보이던데요.”

헨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론과 마리? 둘 다 형편없네!”

‘둘 다? 마리는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의문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헨리가 슬쩍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배는 마다가스카르를 거쳐, 케이프타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육안으로 조금씩 케이프 타운이 보였다.

헨리가 넌지시 내게 질문했다.

“나는 비원더에 기대를 걸고 있네. 역대 최초 아시안 슈퍼스타가 우리 글로벌 비전에서 탄생한다면, 그만큼 높은 주목도도 없지. 장사꾼의 직감이야.”

“아, 그렇군요.”

과할 정도로 솔직한 노친네였다.

‘니들 잘되는 건 관심 없다, 다만 니들이 잘되면 나도 돈 벌 거 같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1라운드를 통과해주어야겠지. 준비는 잘되나?”

재호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쳤다.

“어떻게든 해봐야죠. 상대가 A급이라 저희 같은 D급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헨리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A급?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군.”

내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제롬은 이곳에서는 S급일세. 전체 1등일지도 몰라.”

‘그것’ 때문이군.

헨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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